재벌성공시대를 넘어 재벌특권해소시대로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난 7월의 상법개정에 이어 이른바 더 센 상법개정안이 지난 25일 국회를 통과했다. 자산 2조 이상 상장사에 대해 집중투표제를 정관규정으로 배제하지 못하게 의무화하고 분리선출 감사위원을 1인 이상에서 2인 이상으로 늘렸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지만 재계와 보수야당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재계는 한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의, 중소기업연합회, 상장회사연합회 등 8개 경제단체를 총동원해서 반대캠페인을 벌였다. 국힘당은 24시간 필리버스터를 진행하였으나 여권이 단독으로 통과시키자 이른바 ‘노랑봉투법’과 쌍벽을 이루는 ‘경제내란법’이라며 몰아붙였다.
더 센 개정상법, ‘먹튀’조장법이자 경제내란법?
개정반대론자들은 두 차례의 상법개정으로 도입된 이사선출시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이사) 2인 이상 분리선출 의무화, 분리선출시 지배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에 대한 총3% 의결권 제한이 결합하면 지배주주(재벌총수) 대신 2대, 3대 주주 혹은 소수주주 연합이 7인 이사회의 경우 최대 서너 명의 이사도 뽑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대, 3대 주주가 외국의 행동주의펀드라면 이사회에 최소한 2인 이상 교두보를 확보해서 기술투자를 위한 내부유보 대신 주주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을 끊임없이 요구할 것으로 우려한다. 이렇게 되면 미국식 중단기 실적주의가 팽배하여 머지않아 기업경쟁력이 떨어지고 국민경제가 시들어가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밑밥을 깔아줬다고 비판한다.
반대론자들은 특히 자산 2조 이상 상장사의 경우 대주주인 국민연금의 역할이 몹시 커질 게 분명하고 국민연금이 적극적 행동을 요구받을 경우 정부의 개입통로로 작동하며 연금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우려한다. 이들은 대응책으로 보완입법을 요구한다. 알토란 국내기업이 해외 기업사냥꾼들의 적대적 M&A(인수합병) 시도를 방어할 수 있도록 지배지분에 대해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 필(poison pill)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방어수법을 인정하고 특별배임죄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포이즌 필은 적대적 인수합병이 시도될 때 기존주주들에게 시가보다 훨씬 싼 값에 신주를 발행해줌으로써 기업사냥꾼의 지분율을 낮추고 인수합병비용을 높이는 경영권 방어 전략을 의미한다.
17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사옥에서 깃발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이날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2025.7.17 연합뉴스
과장과 엄살
개정상법 반대론자들의 우려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만 크게 과장된 것이다. 실은 다른 경제선진국들의 소유분산 대기업 경영진은 적대적 인수합병작전의 대상이 될 위험 앞에 상시적으로 노출돼 있다. 우리나라의 재벌대기업들은 그들에 비하면 총수일가와 계열사의 지분율 합계, 즉 내부지분율이 50% 안팎으로 높은 편이라 적대적 M&A 위협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재벌총수가 무리한 직접, 우회 터널링으로 계열사와 일반주주의 재산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으면 약탈적 기업사냥꾼이 들어와도 소액주주들을 등에 업고 성공하기가 몹시 어려운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소액주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야만 성공가능한 적대적 M&A를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인수합병 자본시장이 작동해서 비효율적이고 약탈적인 경영진이나 지배주주를 솎아내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이사선출시 집중투표제가 시행돼도 소수주주가 이사 1인을 선출하려면 100÷(선출이사수+1)% 이상의 지분율이 요구된다. 선출대상 이사 수가 많을수록 용이해지는데 현실세계에서는 어떤 대기업에서도 이사 전원을 한꺼번에 교체하는 경우가 드물고 매년 2,3인을 선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정관으로 이사의 교차임기제를 도입해서 매년 이사교체인원이 1,2명으로 제한될 경우 집중투표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쉽다. 어떤 교수가 몇 가지 가정 아래 시뮬레이션을 해본 결과 집중투표제와 동시에 감사위원(이사) 2인 이상 분리선출시 3%룰을 적용받을 경우 소수주주들이 이사정원 7인 가운데 서너 명까지도 선출할 수 있었다고 보고했는데 엄청난 과장이다. 그런 결과를 내는 데 필요한 여러 가정들이 현실의 회사실무에서는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산규모 2조 미만 대기업에 대해서는 상장 여부를 불문하고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2인 이상 분리선출, 3%룰이 작동하는 상장대기업은 현재 230개 정도이고 몇 개를 빼고는 전통적인 재벌대기업 소속 계열사로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이번 8월 25일자 개정상법의 규율내용은 선진국들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하지만 그건 빗나간 비판이다. 다른 선진국들에는 약탈적 자기거래로 마음 놓고 막대한 사익을 편취해온, 3% 소수지분을 가진 재벌총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개정상법이 과연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의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재벌총수의 사익편취 특권이 행사되는 최적 환경은 자산규모를 불문하고 경영권 세습을 위한 비장의 무기로 간수해온 크고 작은 지주회사격의 비상장계열사들이다. 상장대기업은 일반주주들이 많은데다 자본시장의 감시를 받기 때문에 아무리 총수라도 함부로 노략질을 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상법개정에서도 비상장 계열사에 대한 특별규제가 빠진 것은 큰 한계와 허점이 아닐 수 없다. 재벌체제가 선진국 중에서는 우리나라에만 고유하기 때문에 재벌체제와 재벌특권에 대한 실효적인 규율은 우리나라 정치권과 학계, 언론계의 고유한 임무이다. 나는 이미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이들이 오히려 재벌권력에 포획돼 뒷북치기 땜질입법으로 시종일관했으며 방조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재벌도 수고 많았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의 10대 경제 강국이다. 식민지배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시작해 반 세기 만에 이룬 눈부신 성취의 중심에 재벌이 있었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세계시장을 호령하는 제품들 중 재벌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고 우리의 일상생활도 재벌제품으로 시작해서 재벌제품으로 끝날 만큼 재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재벌이 국가의 전 방위적 지원정책 아래 성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맨주먹으로 5대양 6대주를 누비며 Made in Korea 의 영토를 개척한 그들의 공로에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1세대 창업주들의 기회포착과 도전정신, 적응력은 분명 우리경제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렇다고 성공신화의 후광 뒤에서 은밀하게 작동해온 재벌들의 일그러진 특권을 언제까지나 용납할 수는 없다. 국민의 의식은 이미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는데 재벌의 의식은 여전히 과거의 후진적 행태에 머물러 있다. 우리사회는 지난 60년 넘게 그들이 편법과 불법의 장막 뒤에서 자행해온 교묘하고 집요한 부의 무세 대물림과 경영권 세습을 목도해왔다. 이는 정상적인 경영활동이 아니라 알토란같은 계열사에 빨대를 꽂고 총수일가의 금고를 채운 조직적 배임범죄이자 대담한 강도질에 다름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이제 재벌총수의 사익편취 특권을 완전히 해소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발전이 불가능한 위험단계에 와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세금 없는 승계, 그 추악한 연금술의 비밀
이미 10대 재벌그룹의 창업자들은 100% 사망했다. 한화, 롯데 등 여전히 2세가 오너총수인 경우도 있고 LG처럼 드물게 4세 승계가 이뤄진 경우도 있지만, 삼성, 현대차 등 대부분의 재벌은 3세 오너 총수체제다. 이들 재벌의 경영권이 2세나 3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상속세 때문에 계열사 몇 개를 팔아서 그룹규모가 축소됐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2세나 3세로 사실상 경영권이 사전(死前) 세습되는 과정에서 엄청난 증여세를 물었다는 얘기도 들어보지 못했다. 연금술을 동원한 게 아니라면 창업자나 2세가 무슨 조화를 부렸기에 살아생전에 2세나 3세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데 필요한 황금지분을 만들어줄 수 있었을지 실로 궁금하다.
2세, 3세 재벌총수는 수 조 원, 아니 수십 조 원의 가치를 지닌 그룹경영권을 부친이 살아생전에, 그러니까 부친의 재산을 한 푼도 공식적으로 상속받지 않은 상태에서 확보했다. 그렇다고 변변한 증여세 납부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부친한테 지주회사격인 핵심계열사들의 지배지분을 적법하게 증여받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이 정도면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알고 보니 대단한 연금술을 동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핵심계열사에 빨대를 꽂아 직접, 간접 터널링으로 온갖 사익을 편취해온 재벌총수만의 ‘신공’이 그 비결이었다. 법적 규율이 없진 않았지만 빠져나가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가장 노골적인 사례가 바로 삼성이다.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은 1995년에 단돈 16억 원을 증여세로 내고 대한민국 최대기업집단의 ‘오너’ 경영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배임연금술의 시작은 1996년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이었다. 당시 이건희 회장의 뜻과 비서실의 기획에 따라 에버랜드 이사회는 전원 특수관계인(계열사와 공익법인) 주주들의 이익을 철저히 외면한 채 주당 수십만 원의 가치를 지닌, 지배지분 물량의 전환사채를 단돈 7,700원에 총수의 1남3녀 자녀에게 넘겼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총수자녀들, 특히 이재용이 에버랜드 지배지분을 확보한 직후 연금술의 다음 단계가 진행됐다. 이건희 회장의 뜻에 따라 삼성생명 전·현직 임원들이 차명으로 보유해온 삼성생명 주식 344만 주가 주당 9,000원이라는 터무니없는 헐값에 에버랜드로 넘어가서 에버랜드가 삼성생명의 최대주주가 된다. 이로써 ‘이재용 → 에버랜드 → 삼성생명 → 삼성전자 → 삼성전기 → 에버랜드’로 이어지는 기형적인 순환출자 고리가 완성된다. 부친의 막대한 지분을 상속받기도 전에 그룹 전체를 호령하는 ‘오너’ 황제 이재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거래조건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는 불과 1년여 뒤 명확히 드러난다. 2000년 이건희 회장은 삼성자동차 부실의 책임을 지고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를 내놓으며 주당 가치를 70만 원으로 평가해서 2조8,000억 원을 사재 출연했다고 떠들썩하게 홍보한다. 1년 사이에 주식가치가 9,000원에서 70만 원으로 80배 가까이 폭등한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70만 원짜리 주식을 차명 관리하던 임원들에게 수고비 조로 주당 9,000원을 쥐어주고 빼앗아 온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이는 명백한 배임이자 불법이었다.
2015년의 제일모직-삼성물산 부당합병은 이 세습작전의 화룡점정이었다. 오직 이재용 개인의 지배력 강화를 위해 그룹의 모태이자 알짜 기업인 삼성물산의 가치가 의도적으로 폄하되고 상대적으로 가치가 부풀려진 제일모직과 불공정한 합병이 강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은 국민의 소중한 노후자금으로 사들인 물산주식을 헐값에 넘겨주는 부당한 거래에 거수기 노릇을 했다. 이 모든 과정이 그룹경영권 강화를 위한 치밀한 작전의 산물이었음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법부는 편리한 경영판단 논리와 자의적인 증거부족 방패 뒤에 숨어 이재용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결국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반도체 성공신화가 외아들의 명백한 범죄행위를 가려준 셈이다.
왜 법과 제도는 이들의 범죄를 막지 못했나?
이것이 어찌 삼성만의 이야기이겠는가. 현대차그룹의 글로비스 일감몰아주기, SK의 SK C&C를 통한 지배구조 완성 등 수많은 재벌이 지난 수십 년간 비슷한 연금술로 부와 권력을 세습해왔다. 왜 법과 제도는 이들의 탐욕을 막지 못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국회가 실효적인 법을 만들지 못했고 정부는 있는 법조차 강력하게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역대정부가 재벌규율입법을 안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뒷북치기 땜질입법으로 그쳤고 근본 처방을 외면했다. 자산규모, 지분율, 상장여부에 따라 규율대상과 규율내용을 달리 정했기 때문에 규율대상보다 사각지대가 더 넓었고 빠져나갈 우회로와 구멍이 적지 않았다. 재벌들은 당연히 그런 사각지대와 허점을 빠짐없이 활용했다. 지난 수십 년간 회사법과 공정거래법의 재벌규율조항들이 대형스캔들이 날 때마다 강화됐지만 여전히 땜질입법의 한계와 허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25년 넘게 숱한 스캔들을 낳으며 떠들썩하게 진행된 삼성 경영권세습 문제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단 한 번도 삼성사안 국정조사나 10대 재벌의 편법 경영권세습 국정조사를 실시하지 않았다. 2세, 3세, 4세로 10대 재벌의 경영권이 넘어가는 동안 그들의 증여세/상속세 납부실적이 얼마인지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재벌의 경제 권력이 정치권력 위에 군림하며 감시와 견제의 시스템을 무력화시킨 결과다.
사법부는 미진한 법이라도 법의 정신을 최대한 살리는 엄정한 해석을 내놓는 대신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운운하며 재벌총수의 배임범죄에 대해 상식 이하의 관대한 판결을 선고했다. 그러면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사면의 은사를 베풀었다. 가장 큰 수혜자는 삼성그룹의 이건희-이재용 부자였다. 이건희 회장은 집행유예와 사면을 받아 끝까지 구속을 피했고 이재용 회장도 뇌물사건으로 실형을 살았을 뿐 부당합병에 대해서는 법원이 핵심 증거들을 증거능력이 없다고 배척하며 면죄부를 발행했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이 재벌총수 앞에서는, 특히 삼성총수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재벌특권, 지난 60년으로 족하다
지난 60년 넘게 너무 오랫동안 겪어서 지긋지긋한 재벌특권의 고리들을 이제 끊어낼 때가 됐다. 더 이상 재벌의 성공신화가 재벌의 불법과 편법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재벌의 특권과 반칙을 금지해야 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법적 이유는 이미 차고 넘친다. 먼저 정치적으로 재벌의 경제력 집중과 황제 경영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소수의 총수 일가가 사실상 국가경제에 관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독점하고 그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정치와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여론을 왜곡한다. 이는 건강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심각한 암초다.
경제적으로도 세금 없는 세습과 사익 편취는 시장경제의 근간을 뒤흔든다. 혁신과 경쟁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대신 어떻게 하면 세금을 덜 내고 자녀에게 경영권을 넘겨줄지 골몰하게 만든다. 이는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을 낳고 소액주주들과 중소협력업체들의 희생을 담보로 총수 일가의 배만 불리는 약탈적 경제구조를 고착화한다. 끝으로 재벌총수에 대한 봐주기 판결은 사법정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냉소를 확산시키고 법치주의의 근간인 법 앞의 평등을 뿌리부터 썩게 만든다.
특권 없는 경제를 위한 구체적 대안
재벌의 문어발확장(경제력집중) 특권과 부당내부거래(사익편취) 특권을 해소하는 방안은 이미 나와 있다. 첫째, 금산분리 철저 집행이다. 은행뿐 아니라 보험사, 증권사, 펀드투자사 등 제2금융권도 금산겸업을 금지해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즉각 매각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금융계열사가 총수일가의 지배력 유지를 위한 사금고 역할을 하는 비정상적인 구조를 끝내야 한다.
둘째, 출자구조 개혁이다. 3단계 이상의 피라미드 출자와 기존의 순환출자 고리를 일정 기간 내에 해소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총수가 1%의 지분으로 100%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짜 지배력을 걷어내고 소유와 지배의 괴리로 말미암은 지배주주(총수)와 일반주주의 구조적인 이해상충 요인과 재벌총수의 사익편취 유인을 해소해야한다.
셋째, 총수의 자기거래(특수관계인간 거래) 원천 봉쇄다.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 통로가 되는 특수관계인 간의 거래는 원칙적으로 수상한 자기거래로 금지하되 ①모든 거래내용의 철저한 사전 공시, ②거래의 공정성에 대한 입증책임 전환, ③이사회 내 독립적인 위원회의 특별 승인, ④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배제한 주주총회 특별결의 등 철통방어 장치를 통과할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이러한 조치들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재벌의 문어발확장 특권과 사익편취 특권은 급속히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이 부당하게 오랫동안 누려온 특권을 해체하자는 것이지 재벌을 해체하자는 게 아니다. 재벌의 양대 특권을 해소한다고 해서 총수라는 이름의 ‘오너 지배’ 기업집단이 모두 당장 해체되지는 않는다. 이른바 경로의존성까지 작동하기 때문에 지금의 재벌체제가 어디로 향할지도 불분명하고 불가역적인 변모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맺음말
그럼에도 위의 규율시스템이 도입되면 재벌체제에 적지 않은 변화가 불가피하다. 우선 재벌의 양대 특권이 해소되면 창업에 성공해도 대기업집단을 건설하는 게 이전보다 어려워지고 설령 대기업집단을 만들어도 지금처럼 문어발 구조가 아니라 수직계열화로 모습과 규모가 바뀔 가능성이 높다. 기존의 10대 재벌은 4세 전면 승계 대신 4세를 위한 선택과 집중의 계열사 구조조정을 진행해서 규모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으로 재벌생태계가 시나브로 그 성격과 규모 모두에서 커다란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변화의 과정에서 일부 계열사가 매각되거나 더 이상 자녀에게 경영권을 세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재벌들의 사정일 뿐 일반시민들이 걱정할 바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해소됐어야 마땅한 특권을 우리사회가 60년 넘게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결과로 재벌은 너무 오랫동안 특권을 누렸고 우리사회는 너무 오랫동안 그에 휘둘렸다. 이제는 그 상흔과 폐단으로 우리사회가 여기저기 피멍이 들고 순환이 제대로 안 된지 오래다.
시민의 공동선과 공익은 특권과 반칙에서 벗어나서 법과 정의가 바로 서는 건강하고 활력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데 있다. 부지런히 개척해온 재벌 덕에 이만큼 온 것도 사실이지만 부지런히 약탈해온 재벌 탓으로 우리경제의 부정적 측면이 강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우리사회가 재벌성공신화의 오랜 주술에서 깨어나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특권 없는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주저하지 말고 재벌특권개혁을 결단해야 대한민국이 비로소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시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