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잇의 전환이야기】IMO 중기조치 1년 유예, 기회인가 위기인가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국제해사기구(IMO) 회원국들은 지난 17일 넷제로 프레임워크(국제 해운 산업 탈탄소 체계)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이를 1년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결정의 표면적 이유는 명확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재집권 이후 반(反) 기후 정책, 개도국과 선진국 간 비용분담 갈등, 대체 연료 공급망의 불확실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특히, RU(Remedial Units, 의무구매배출권) 와 SU(Surplus Units, 초과 감축 크레딧) 제도의 구체적 설계가 미완성인 상태에서 성급한 합의는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그러나, 이번 유예는 탄소 감축 목표 자체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IMO 사무총장 아르세니오 도밍게즈(Arsenio Dominguez)는 런던 회의 종료 후 성명에서, 넷제로 프레임워크는 여전히 살아 있으며, 이번 결정은 단지 의결 연기일 뿐 목표의 철회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는 2050년까지 전 세계 해운이 순배출 제로에 도달한다는 목표를 유지한다는 의미로, 결승선이 명확한 마라톤과 같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그 지점에 도달하느냐이다.
이번 1년 유예 결정은 산업 현장에 여러 해석을 불러왔다. 낙관론자들은 졸속 합의보다 실효성 있는 프레임워크 완성을 위한 시간이라고 평가하며, 현실론자들은 정치·경제적 여건 변화를 반영한 불가피한 조정으로 보고 비관론자들은 글로벌 기후 대응의 동력 상실을 우려할 것이다.
한국 해운·조선업의 기회와 위기
한국의 해운·조선업계는 이번 유예를 두고 엇갈린 평가를 내놓고 있다. 먼저 기회의 측면에서 보자면, 해운사 입장에서는 대규모 선대 교체와 친환경 선박 전환에 필요한 투자를 조정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화주와의 친환경 비용 분담 협상 여력도 확보했다. 또한 불확실한 연료 공급망에 대한 조기 투자 리스크를 회피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조선소 입장에서도 기술 선택의 유연성을 확보했다. 바이오, 메탄올, e-Fuel(암모니아, 수소) 등 다양한 연료 대안 중 어느 것이 최적 선택지인지 검증할 시간이 생겼다. 성급한 규제로 잘못된 기술에 락인(Lock-in) 되는 위험이 줄었고, 원가 경쟁력 유지에도 도움이 된다. 친환경 선박 프리미엄의 가격 인상 압력이 완화되면 수주 경쟁력 유지와 R&D 투자 전략도 재조정할 여유가 생긴다.
하지만 위기 측면 또한 분명하다. 정책 방향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대규모 설비투자는 지연될 수밖에 없고, 명확한 목표가 사라지면 혁신 동력도 약화된다. 게다가 글로벌 경쟁 차원에서는 ‘규제 파편화’에 대한 대응 비용이 급증한다. 유럽 항로용, 아시아 항로용, 미주 항로용 선박을 각기 다른 기준으로 설계해야 한다면, 조선소의 표준화 전략은 무너지고 비용은 급증한다. 이는 결국 화주와 소비자에게 투자 비용 전가된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시간 비용이다. 산업은 정책을 따라가지만, 시장은 기대에 따라 움직인다. 1년의 정책 유예는 정책 일관성에 대한 의문을 낳았다. 이는 금융과 투자 시장의 해운업 외면으로 이어지고, 결국 감축 지연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200여 개의 글로벌 해운사가 트럼프 행정부의 반대에도 온실가스 배출에 대한 최초의 글로벌 탄소부담금 도입을 요청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는 산업계 일부가 이미 준비를 마쳤다는 방증이다.
해운 탈탄소 로드맵의 재구성...규제 협력에서 경쟁으로
이번 유예로 해운 탈탄소 로드맵은 근본적인 재구성이 요구된다. IMO에서는 2030년 탄소집약도(CII) 40% 감축, 2050년 넷제로를 목표로 하며, 이번 채택이 예정된 중기조치는 이 두 시점 사이의 실질적 감축 경로를 구체화하는 핵심 메커니즘이었다.
그러나 산업의 대응 시차를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수주-설계-건조 단계와 연료 공급망을 재편하고 엔진 기술을 전환하는 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2030년 감축 목표는 달성 목표가 아닌 중간 평가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초기 2040년대까지 완만한 감축 이후의 급격한 감축이 이루어지는 ‘하키스틱’ 곡선으로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이며, 지금 미룬 감축 부담은 나중에 배가되어 돌아온다는 뜻이다.
또한 글로벌 단일 규제 체계는 이미 흔들렸다. EU 배출권거래제도(ETS)와 FuelEU Maritime, 이에 준하는 각국의 규제는 IMO와 무관하게 2025년부터 순차적으로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는 ‘규제 협력’에서 ‘규제 경쟁’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유예는 기회가 아니라 유예일 뿐
이제 우리는 이 1년의 유예를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IMO 중기조치는 미뤄졌지만, 유럽 선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금융시장의 ESG 압력은 강화되고, 화주들의 스코프 3 감축 요구도 지속되고 있다.
지금 해야 할 질문은 우리는 이 1년을 도약의 발판으로 쓸 것인가, 아니면 불확실성을 핑계로 투자를 미루는 데 쓸 것인가?”이다.
조선업은 이미 기술 개발의 레일 위에 있으며,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레일을 흔들림 없이 빠르게 달리느냐이다. 해운업은 본격적인 전환의 출발선에 섰다. 조선소가 만들어놓은 기술을 어떤 전략으로 선택·운영하고, 비용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향후 10년의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결단이다.
IMO의 1년 유예는 두 산업에 동일한 시간을 부여했지만, 그 시간을 쓰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 조선은 기술의 깊이를, 해운은 전략의 명확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이 이 1년을 기회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분명하다. 1년 더 있으니 천천히 하자는 안일함과 불확실한 시기에 한 가지 해법만 고집하는 근시안적인, IMO의 결정만 기다리는 수동적 모습이다.
우리는 2050년 넷제로라는 명확한 결승선을 향한 마라톤 여정에 있다. 정책은 언제나 늦고, 시장은 먼저 움직인 자를 보상한다. 이번 1년의 유예는 위기가 아닌 선택의 기회다. 기술이 정책을 앞서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일부 국가의 정책 후퇴가 만든 불확실성을 뒤로하고, 우리는 명확한 레일을 따라 달릴 수 있어야 한다.
☞지혜련 연구원은
지혜련 연구원은 에너지 정책 연구기관인 플랜잇(PLANiT)에 소속되어 활동 중이다. 플랜잇은 에너지 전환경로를 식별하는 모델 기반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는 정량적 연구 기관이다. 지 연구원은 CFD 기반 연구를 수행해 온 조선• 해운 분야 연구자로, ESG 실무 경험도 보유하고 있다. 2006년 한국과학기술원(KORDI, 현 KRISO)에서 연구를 시작했으며, 2008년부터 대우조선해양 선박해양연구팀에서 15년간 CFD를 활용한 선박 기술 연구를 수행해왔다. 2022년부터 ESG 실무를 담당했으며, 현재는 해운• 조선산업의 탈탄소 전략, LCA 기반 온실가스 감축 평가, 국제 규제 대응 등을 주제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