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홀 밀폐공간에서 죽어가는 산재 후진국 노동자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안종주 언론인, 보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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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전 11시 31분 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공업지역 한 아연가공업체 지하 수조 안에서 40∼60대 하청업체 노동자 4명이 질식한 채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지만 3명이 숨지고 1명은 중태에 빠졌다. 이들은 지하 수조 내 암모니아 저감 설비 설치를 위한 배관공사에 투입됐다. 작업자 1명이 보이지 않자 다른 3명이 그를 찾으러 수조로 들어갔다가 함께 피해를 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이 당시 지하 수조 안을 유해가스 측정 장비로 분석한 결과 일산화탄소가 검출됐다.
27일 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공업지역 아연가공업체에서 경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방, 고용노동부, 산업안전공단, 한국가스공사 등 관계자가 합동 감식을 하고 있다. 지난 25일 이 업체 지하수조에서 배관 작업하던 작업자 4명이 쓰러져 이 중 3명이 숨졌다. 2025.10.27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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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안전보건 연구를 맡은 국내 유일의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역학조사를 하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현재 단 한 명도 없다. 1988년 7월,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 등 직업병과 열악한 노동조건 문제가 드러나면서 정부의 효율적인 산업재해예방과 직업병 조사·연구를 위해 이 연구원이 설립됐다. 연구원은 1994년부터 역학조사, 특수건강진단 실습 등을 통해 공공영역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를 양성하는 수련기관으로서 명맥을 이어오며, 연간 1명 이상 전문의를 배출해오고 있다. 1~2년 전만 해도 5~6명의 직업환경의학·예방의학전문의가 활발하게 역학조사를 해오다 잇따라 그만두고 현재 한 명의 예방의학전문의만 일하고 있다.
이 두 사례는 대한민국이 왜 산업안전보건 후진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한국이 산업안전보건 후진국임을 보여주는 사례는 그 밖에도 많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최근에 드러나 일반 시민에게 다소 낯익은 것을 소개하는 것일 뿐이다.
매년 똑같은 원인으로 노동자 10~20명 밀폐공간에서 숨져
맨홀 등 밀폐공간에서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질식하는 판박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지난해에도, 올해도 거의 똑같은 유형의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올해는 지금까지 최소 10건의 사고가 발생해 작업자 9명이 숨졌다.
해마다 10~20명의 노동자가 밀폐공간에서 숨진다. 돼지 축사, 정화조, 오폐수 처리시설, 상하수도 처리시설, 유해물질 저장탱크 등 장소와 시간만 다를 뿐 사고 원인과 사고 과정도 거의 같다. 산소 부족이나 일산화탄소, 황화수소, 이산화탄소와 같은 유독가스 흡입으로 죽는다. 사고 과정도 판박이다. 작업 전 안전보건교육 미실시→작업 공간 산소·유해가스 농도 미측정→호흡보호구 미착용→질식 사고 발생 뒤 안전장치 없이 동료 구하기와 집단사망 순서로 이어진다. 이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사망 또는 집단사망을 막을 수 있었다.
노동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21년부터 올해 8월까지 발생한 밀폐공간 질식 사망사고 14건 중 12건(85.7%)은 작업 전 산소·유해가스 농도를 측정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10건(71.4%)은 보호구를 제공하지 않았고, 9건(64.2%)은 감시인을 배치하지 않는 등 규정을 어겼다. 측정 장비는 있었으나 이를 사용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지자체 공공시설에서도 질식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25일 서울 강서구 염창동 맨홀에서 작업자 한 명이 내부로 휩쓸려 가는 사고가 발생, 관계자들이 가양빗물펌프장에서 구조 작업을 하고 있다.2025.8.25 연합뉴스
위험 회피 행위 알면서도 안 하는 산재 후진국 실상
밀폐공간은 환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산소 결핍이나 유해가스로 인한 질식, 화재, 폭발 등의 위험이 있는 장소다. 상식이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질식사고는 치명률이 높다. 재해자 2명 중 1명이 사망할 정도다. 최근 10년간(2015~2024년) 질식 재해 사망률은 42.3%다. 1% 내외인 일반 사고성 재해 사망률의 40배가 넘는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관련 업체와 노동자들은 이를 깊이 인식하지 못해 위험을 회피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산재 후진국이라고 불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안전한 작업이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안 하고 있는 것이다.
경주 맨홀 집단 사망사고 다음날인 26일 김영훈 노동부 장관은 정부서울청사에서 관계부처 합동 브리핑을 열고 기초 안전수칙만 지켜도 예방할 수 있는 중대재해가 반복되는 상황을 매우 엄중하게 인식한다”며 노동부는 그간 대형사고 위주로 강제수사를 활용했으나, 향후에는 기초 안전수칙을 준수하지 않거나 같은 유형의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경우에도 압수수색, 구속 등 강제수사를 적극 활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해답은 강제수사나 엄한 처벌에 있지 않다. 표피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사고가 일어나는 근본 이유를 찾아내어 관련 업체와 노동자들이 실제 안전 행위를 하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관련 법규와 기준이 없어서 이런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과감한 전략으로, 다른 프로그램으로, 더 많은 예산 투입으로 교육하고, 홍보하고, 사고조사를 해야 한다.
업체와 노동자가 왜 안전교육을 안 받는지, 교육받아도 왜 그대로 실행에 옮기지 않는지, 왜 작업 전 유해가스 측정을 하지 않는지, 왜 측정 장비를 갖추고 있지 않은지, 왜 측정 장비를 갖추고 있어도 이를 활용하지 않는지, 왜 동료가 밀폐공간에서 쓰러지면 호흡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고 마구잡이식으로 구출하러 가는지, 상황에 맞는 호흡보호구 쓸 줄은 아는지 등등을 파악해야 한다. 이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산재 후진국의 또 다른 방증인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실태
두 번째 사례는 노동자들의 질병과 건강과 관련한 내용이다. 김대중 정부 이래 윤석열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가 눈앞에서 벌어지는 중대재해 사고에만 몰두해 직업병 등 업무상질병에 대해서는 소홀하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단 한 명도 없다는 현실이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는 이재명 정부도 마찬가지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현재 산업안전보건공단 소속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직업병 역학조사 등 산업안전보건 분야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유일 연구기관이다. 산업안전보건을 연구하는 다른 국가기관은 공공연구기관을 포함해 한 곳도 없다. 직업병 역학조사와 신기술을 이용한 산재 예방 연구, 산업안전보건 정책과 제도, 노동자 건강 실태 조사 등 거의 모든 것을 이곳에서 하고 있다. 그래서 할 일이 산적해 있다. 하지만 이런 임무에 걸맞은 규모의 조직은 전혀 아니다. 연구 인력은 턱없이 모자라고 연구예산도 형편없다. 한국이 산재 발생뿐만 아니라 안전보건 연구도 후진국임을 방증한다.
안전보건연구원은 2022년 이후 여러 차례 전문의 채용공고를 냈다. 올들어서도 1월과 6월에 채용공고를 냈다. 하지만 응시자는 한 명도 없다. 이 때문에 내년 초에는 직업환경의학과 전공의 수련기관이 지정취소될 위기에 놓였다. 안전보건공단은 2014년 인천에서 울산으로 옮겨간 뒤 의사들이 계속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인천에 중부역학조사팀을 남겨놓았다. 국토부는 이것이 공공기관 지방 이전 방침에 어긋난다며 2024년 말까지 모두 울산에서 근무토록 명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그나마 이곳에 있던 의사들은 지난해 모두 그만두고 수도권 종합검진기관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안전보건연구원 전문의사 확보가 최우선 과제
국가가 안전보건 연구 향상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걸림돌, 아니 훼방꾼이 된 것이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의사들은 줄곧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다. 공공병원 의사들이 연간 3억~4억 원의 보수를 받고, 근로복지공단 연구 의사들이 1억 5000만 원의 연봉을 받을 때 1억 원 안팎을 받았다. 그래도 사명감 하나로 버텼는데 근무지마저 비수도권이 되자 죄다 사표를 낸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의사가 없는 안전보건 연구, 그로 인해 벌어지는 질 낮은 직업병 역학 연구 등은 고스란히 노동자의 건강 위험으로 연결된다.
산재 예방의 두 축인 안전과 보건, 그 가운데 산재 예방 선진국의 잣대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의 건강을 도외시한 국가가 선진국이란 명칭을 입에 올리기에 낯부끄럽지 않을까. 이재명 정부는 과거 정부가 하지 못했던 노동자 건강 문제를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야 한다. 관련 로드맵도 만들어 실행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안전보건연구원 전문의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당정 티에프 또는 범정부 티에프를 만들어 올해 안으로 확정·시행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