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유신 풍자한 김지하 ‘비어’, 김민기 ‘잃어버린 말’ [사람들]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의 12·6 국가비상사태 선언과 12·27 국가보위특별조치법(이하 국보법) 날치기와 함께 시작했다. 음모와 부정과 강압으로 점철된 1971년은 사실 1972년의 ‘최종적 해결’을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 국보법은 10개월 뒤 강행한 비상계엄 발동과 유신체제 수립의 ‘불법적인’ 법적 근거였다.
12·6 비상사태는 그야말로 느닷없었다. 대통령 박정희는 정기국회 회기가 끝나가는 12월 6일 돌연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동시에 국민과 정치권을 향해 6개 항의 특별한 ‘협박’을 한다. 국가안보를 최우선에 두겠으며, 이를 위해 일체의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겠고, 국가의 안전을 위해 국민의 자유도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당시 시민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는 유신체제 등장의 복선이었으며, 영구 집권 총통제를 뼈대로 하는 유신헌법의 뼈대였다.
1971년 12월 6일 느닷없이 국가비상사태를 선언을 발표하는 윤주영 정부대변인(왼쪽)과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 이어 국회는 여당 단독으로 국가보위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 영구집권의 토대를 마련했다.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
‘느닷없다’라고 한 것은 4월 대통령 선거 이후 계속되던 대학가의 시위는 10월 15일 위수령 발동과 함께 군의 무력에 의해 억눌린 상태였다. 대학교는 모두 휴교하거나 휴업했다. 시위와 관련해 대학생 1800여 명을 체포했고, 백수십 명을 제적하고 징집했으니, 대학가는 태풍과 홍수에 휩쓸려버린 전답처럼 황폐했다. 정치권도 조용했다.
박정희도 비상사태 선포가 민망했던지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댔다.
최근 중공(중국)의 유엔 가입을 비롯한 국제 정세의 급변과 이의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및 북괴의 남침 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양상을 예의주시, 검토해 본 결과 현재 대한민국은 안전보장상 중대한 차원의 시점에 처해 있는 것으로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자다가 봉창 두드려도 유분수지, 동북아의 평화가 왜 비상사태라는 것일까. 핑퐁외교를 통해 국교 정상화를 목전에 둔 중국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 그리고 중국의 유엔 가입은 동북아 냉전의 축을 무너뜨리고, 한반도 주변의 긴장을 완화하는 획기적인 요인이었다. 실제 불과 2개월 뒤 미국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주석과 정상회담을 열었고, 중국과 일본은 국교를 맺었다. 미국은 또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겠다고 발표한 터였고, 이듬해 8월 전투병을 모두 철수시켰다. 한반도를 둘러싼 불안 요소 가운데 두 개가 사라진 셈이었다. 게다가 북한의 김일성은, 불과 3개월 뒤 만천하에 드러났듯이, 남침 준비는커녕 남한의 박정희와 역사상 최고의 밀월 관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비상사태 선포의 이유로 댄 핑계들은 그야말로 횡설수설이나 다름없었다. 한반도 주변의 긴장 완화가 비상사태라니, 그건 긴장과 충돌로 연명하는 박정희 정권의 쿠데타 세력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었다. 국가안보를 위해 태어나선 안 되는 정권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었다.
돌아보면 당시 남북 정권에는 ‘정략적 혹은 위장 평화’의 필요성이 절박했다. 박정희 정권은 영구 집권을 위해 개헌을 추진하고 있었고, 북한 역시 김일성 체제의 영구화를 위한 지배체제의 일대 전환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1972년 11월(남)과 12월(북) 확정되는 남북 양쪽 헌법의 뼈대는 같았다. 이름만 하나는 ‘유신헌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일성 헌법’으로 달랐을 뿐이다.
남북 양쪽 정권은 각자의 목적이 관철될 때까지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등 ‘한시적이고 정략적인 평화’를 이어갔다. 따라서 1972년은 분단 이후 남북 관계가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기였다. 물론 국민을 현혹하고 시간을 벌기 위한 ‘평화’였으므로, 그 필요가 사라지면 즉시 긴장과 대치로 되돌아갈 운명이었지만, 적대적인 두 체제가 이렇게 찰떡궁합을 이루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박정희는 이런 정치 일정을 염두에 두고, 12·6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후속 조치로 ‘반헌법적’ 아니 ‘초헌법적인’ 국가보위특별조치법 제정의 필요성을 제기했으며, 공화당은 바로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신민당의 전면적인 반대와 물리적인 저지로 말미암아 이 법안의 국회 통과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러자 박정희는 12월 23일 국회를 향해 최후통첩, 아니 최종적인 협박을 했다. 12월 중 국가보위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지 않으면 ‘비장한 각오’를 하겠다”라는 내용의 공한을 백두진 국회의장에게 보낸 것이다. 박정희에게 한 방 먹은 공화당은 신민당의 저지를 뚫고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 법안을 강행 처리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컨대 대통령은 행정은 물론 입법, 사법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1개월 뒤 선포한 유신헌법에 모두 담기게 될 내용이었다.
①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으며
② 경제 규제를 명령하고 국가 동원령을 선포하며
③ 옥외집회나 시위를 규제하고
④ 언론ㆍ출판에 대한 특별조치를 취하며
⑤ 특정한 근로자의 단체행동권을 제한하며
⑥ 군사상 목적을 위해 세출예산을 조정할 수 있다.
박정희가 이렇게 무리를 범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71년 4월 27일의 제7대 대통령 선거와 5월 25일의 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때문이었다. 특히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204개 의석 중 89석을 차지했다. 박정희 정권은 개헌선(재석 2/3 이상) 확보를 위해 온갖 투‧개표 부정을 다 저질렀지만 실패했다. 선거 역시 내용상 여당의 패배였다. 서울을 비롯해 대구‧부산 등 대도시에서 여당은 참패했다. 서울과 대구에서는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이런 추세로라면 다음 선거에서 박정희와 공화당은 재집권은커녕 몰락할 가능성이 컸다. 5‧16쿠데타 이후 온갖 부정부패, 인권유린을 저질러 온 박정희 정권과 그 하수인들로선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72년으로 들어서자, 박정희 정권의 최종적인 조처를 향한 발걸음은 빨라졌다. 이들이 동원한 수단은 밖으로는 한반도 평화공세, 안으로는 북한의 남침 우려를 앞세운 안보 공세였다. 물론 평화도 거짓이고 남침 위협도 거짓이었다. 국민과 야당에 대한 기만이자 협박이었지만, 이 자가당착의 선전 선동에 휩쓸리거나 심지어 앞장서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북한과의 접촉은 연초부터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남북을 오갔다. 3월엔 박정희가 5대 평화 원칙을 발표했다.
이 꼴을 지켜보던 학생과 시민 야당 정치권이 정신을 차리고 전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비상사태 철회와 국보법의 폐기를 요구하는 시위를 확대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야말로 느닷없이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972년 남과 북은 겉으로는 남북공동성명과 평화무드를 조성하고 ,남한에서는 유신헌법, 북한에서는 김일성헌법을 만들어 영구 집권의 길을 열었다. 사진은 1974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의 김일성과 몰래 만나 악수를 하는 모습.
일대 사변이었다. 성명대로라면 남북의 평화는 물론 통일까지도 가능하리라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산가족 상봉과 고향 방문을 논의할 남북적십자회담도 열렸다. 10월 12일엔 남북의 항구적인 평화를 논의한다는 정부 당국자 간의 남북조절위원회 1차 회의가 열렸다.
그로부터 불과 닷새 뒤(10월 17일), 평화와 통일에 대한 국민적 기대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다. 박정희는 돌연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국회 기능은 이른바 비상국무회의가 대신하도록 했다. 다시 군대가 진주했고, 헌정은 중단됐다. 비상국무회의는 26일 단 하루 만에, 미리 준비한 개헌안 심의를 마치고, 27일 공고했다. 이른바 유신헌법이었다.
북한 김일성도 절묘하게 박정희와 보조를 맞췄다. 다만 조금 염치는 있었던지 박정희보다 한 발 뒤에서 따랐다. 북한은 ‘김일성이 곧 국가’라는 내용의 ‘김일성 헌법(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 반포했다(12월 27일).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모시고, 주석이 국가수반은 물론 행정 권력과 인민의 무력을 모두 장악하는 내용이었다.
누가 누구를 모방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일성 헌법과 유신헌법은 일란성 쌍둥이와 다름없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해산권을 포함한 비상대권을 부여하고, 체육관 선거(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무제한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대통령이 국회 의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지명하도록 했다. 집권당이 항구적으로 국회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 속된 말로 ‘생물학적 어머니’ 말고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박정희는 히틀러였고, 유신체제는 총통제였다.
1년 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이 했던 예언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던 박정희의 괴이한 약속도 실현됐다.
1972년 10월 17일 오후 7시 박정희 정권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언, 국회해산과 정치활동 중지를 단행했다.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이 비상계엄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출처: 경향신문
남북은 저마다 총통제와 주석제를 추진하며 남북당국자회담, 남북조절위원회 회담, 남북적십자회담 등 평화라는 포장지로 그 속셈을 겹겹이 감췄던 셈이다. 조절위 1차 회담 후 5일 뒤 이른바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유신 헌법안 공고 뒤 엿새 뒤(11월 2일) 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 2차 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평화의 위장막을 더 뒤집어씌우려 위해 11일엔 대남, 대북 방송을 24년 만에 중단했다. 그리고 열흘 뒤 유신헌법 찬반투표가 군경의 감시 아래 실시돼 91.5%의 찬성으로 통과됐다(11월 21일). 열흘 뒤 3차 조절위원회 위원장 회담(12월 1일)이 열렸다. 그리고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가 제 8대 대통령으로 뽑혔으며, 북한에선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김일성 헌법’)이 채택됐다. 이번에는 사이좋게 12월 27일 같은 날이었다.
‘김일성 헌법’은 김일성이 정리했다는 ‘주체사상’의 계승과 주체혁명의 완성을 목표로, 이른바 ‘혁명적 수령관’ 또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 입각하여 북한 사회를 하나의 ‘대가정’으로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그 정점에는 대가정의 영도자이자 생명체의 뇌수로서 수령을 두었고, 수령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했다. 김일성은 현실 정치의 총통이자 현세와 내세를 모두 관장하고 영도하는 ‘신’이 되었다.
1972년은 이렇게 남북이 각자 ‘박정희 일당’과 ‘김일성 일가’의 영구 집권 체제를 완성한 해였다. 이 터무니없는 체제에 대한 반발을 막고, 인민 혹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동원한 것이 남북 합작의 긴장 완화 및 남북 평화라는 현란한 불꽃놀이였다. 인민과 국민이 이 불꽃에 홀린 틈을 타, 남북의 정권은 국민주권을 영구적으로 훔쳤다.
1972년 시대상황을 노래한 잃어버린 말은 1993년 재발매된 김민기 1집 앨범에 실려 세상 빛을 보게 됐다. 사진은 김민기 1집 앨범 사진.
이런 1972년의 시대 상황을 상징하는 노래가 김민기의 ‘잃어버린 말’일 것이다.
간밤에 바람은 말을 하였고
고궁의 탑도 말을 하였고
할미의 패인 눈도 말을 했으나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내 귀가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여인의 손길은 말을 하였고
거리의 거지도 말을 하였고
죄수의 푸른 옷도 말을 했으나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내 귀가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잘리운 가로수는 말을 하였고
무너진 돌담도 말을 하였고
빼앗긴 시인도 말을 했으나
말 같지 않은 말에 지친 내 귀가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말들을 모두 잊어 듣지 못했네
요컨대 거짓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정작 진실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김지하의 두 번째 필화 사건이었던 담시 ‘비어’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비어는 ‘유언비어’의 뒷말로, ‘팔짝팔짝 뛰는 메뚜기’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김지하의 비어는 떠도는 말이로되 진실이라는 것, 진실은 떠돌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을 아는 척했다가는 경을 친다는 것, 따라서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1972년 남이든 북이든 정권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거짓을 진실로 믿어야 하고, 진실을 말하면 혀가 잘려 나가는 시대에 대한 처절한 풍자가 바로 ‘비어’이고 ‘잃어버린 말’이었다.
김지하는 1972년 4월 창조에 실린 담시 비어로 두번째 필화사건을 겪었다. 사진 왼쪽은 도피생활을 하던 김지하가 언론과 인터뷰하는 장면, 사진 오른쪽은 지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자수한 김지하가 수의를 입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비어’는 1972년 4월 가톨릭에서 발행하는 잡지 에 실렸다. 정권은 날고뛰며 진실을 전하는 ‘비어’를 잡기 위해 경찰, 정보기관 등을 총동원했다. 잡지 발행인과 주간을 연행하고 4월호를 판매 금지하는 한편 이미 깔린 잡지를 모두 회수했다. 중앙정보부는 잠적한 김지하를 찾는다며 교수, 학생, 친구 170여 명을 연행해 주리를 틀었다. 김지하는 지인들의 피해를 더 키우지 않기 위해 결국 자수해야 했다.
당시는 박정희가 멋대로 선포한 ‘비상사태’였기에 정권은 국가보위특별조치법에 따라 행동은 물론 마음에 품고 있거나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까지도 처벌할 수 있었다. 신문 방송은 정부의 발표만을 보도해야 했다. 거짓을 말해도 사실로 발표해야 했고, 진실은 여지없이 잘리고 왜곡되고 삭제됐다. 따라서 사실과 진실은 신문‧방송의 언론이 아니라 시중에 떠돌 수밖에 없었다. 김지하의 ‘비어’ 또는 김민기의 ‘말’은 이런 진실이 뒷골목에서 떠돌 수밖에 없는 현실, 그런 현실에서 숨겨진 채 떠도는 진실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다만 김지하의 경우 떠도는 진실, 압살당하는 진실을 풍자적으로 그리고 전했다면, 김민기의 ‘말’은 말 같잖은 말에 지쳐버린, 그리하여 떠도는 진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런 불온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말’은 21년이 지난 1993년 ‘김민기 전집’이 발매되고서야 비로소 세상 빛을 볼 수 있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누구도 이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대명(代名)이나 차명으로도, 익명으로도 유통되지 않았다. 김민기가 처음 정리한 악보는 험악한 시대 상황 속에서 어디론가 사라져 끝내 찾지 못했다. 노래란 시대의 소산이지만, ‘잃어버린 말’은 가혹한 시대의 정수리를 겨눈 까닭에 꽃을 피울 수 없었다.
작은 연못이 실려 있는 김민기 4집앨범
1972년 당대의 진실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김민기의 또 다른 노래가 ‘작은 연못’이었다. 동요로 받아들여질 만큼 서정적인 선율에 동화 같은 노랫말로 유명하지만, 시중에서는 남북 분단을 폭정에 악용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당시 남북이 진행 중인 평화 협상의 컴컴한 속내까지 드러내는 것으로도 알려져 운동권의 애창곡이 되었다.
그는 1993년 ‘이종환의 밤으로의 초대’ 프로그램에 출연해 어린 시절 경험했던 6·25전쟁으로 황폐해졌을 때의 기억 위에서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염두에 두고 지은 것 같다”라고 회고했다. 그러나 남북의 싸움으로 한반도 전체가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연못’이 되리라는 묵시록적 경고나 예언이 아니냐는 분석에는 천부당만부당 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싸우면 다 죽는다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 뻔한 이치를 담았다는 것이다.
창비에서 펴낸 그림책 작은 연못 표지사진
그러나 이 노래는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독자들에게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됐다. 남북 대결만이 아니라 각 시대에 일어난 분열이나 대결을 비판하고 그 파국적인 결과를 은유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그렇게 불렸다.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두 김 씨의 분열에 대한 비판으로 읽혔고, 단일화에 대한 간절한 소망 속에서 불렸다. 김민기의 ‘시대에 얽매이지 않는 원론’ 때문에 노래는 시대를 넘어 애창된 셈이다.
교육계에선 동요 혹은 동화로 수용해, 1995년부터 적용된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말하기 듣기’ 교과서엔 만화 형태로 실렸다. 출판사 ‘창비’는 같은 제목의 그림책으로도 펴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