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 잡다 빨갱이로 몰린 검사…유신국회 사무총장 [사람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선우종원(鮮于宗源, 1918~2014)의 항목 부제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최고의 빨갱이 사냥꾼이었으나 김창룡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일본 망명.
이 한 줄이 이 인물의 생애를 압축한다. 빨갱이를 잡던 사람이 빨갱이가 됐다. 그리고 돌아와 박정희(1917~1979)를 도왔고 유신국회의 사무총장이 됐다. 96년의 생애 안에 해방, 한국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유신이 다 들어 있다. 한국현대사의 모든 굴곡을 살아낸 사람이 어떻게 이 책에 이름을 올렸는지를 이 글은 따라간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18년 평안남도 대동 출생, 이북 출신 엘리트
선우종원은 1918년 2월 17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으로 달치시우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아버지는 피복공장을 운영하는 자산가였다. 경성제국대학 예과에서 잠시 홍진기(훗날 내무부장관)와 인연을 맺었다. 1942년 법학과를 졸업하고 194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월남했다. 명륜전문학교(현 성균관대) 법학교수 지원서를 냈다가 경성제대 출신은 좌경화돼 있다 며 거부당했다. 이것이 계기가 됐다. 선우종원은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어 학계로 나가는 걸 포기하고 검찰에 투신 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세례를 받은 가톨릭신자가 좌경화 의심을 받아 교수가 못 됐고, 그 분노로 빨갱이 잡는 검사가 됐다. 이것이 선우종원 이야기의 첫 번째 아이러니다.
선우종원(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세계사 속의 동류, 변신의 달인 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궤적의 인물이 떠오른다. 아르투르 쾨슬러(Arthur Koestler, 1905~1983)다. 헝가리 출신 영국 작가로 1930년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가 스탈린(1878~1953)의 대숙청에 환멸을 느끼고 대표적인 반공 지식인으로 변신했다. 그의 소설 『한낮의 어둠』(1940년)은 이 변신의 산물이다.
선우종원은 쾨슬러와 반대 방향으로 시작했다. 처음부터 반공주의자로 출발했다가 반공의 칼이 자신을 향하자 망명했고, 돌아와서는 박정희 정권에 협력했다. 한 가지는 같다. 이념이 아니라 생존과 권력이 그의 선택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1949년 텔아비브에서의 쾨슬러(위키피디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조작 의혹의 첫 무대
1946년 1월 서울지검 검사로 임명된 선우종원이 처음 이름을 날린 것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다. 조선공산당이 당비 조달을 위해 위조지폐를 제작했다고 미군정이 발표한 이 사건에서 선우종원은 공판 입회검사를 맡았다.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에 단 하나의 실물 증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며 조작 의혹을 제기해왔다.
이 사건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학살당했다. 그리고 2025년 12월 22일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선우종원이 입회검사로 참여해 구형에 관여한 사건의 피해자가 79년 만에 무죄를 받은 것이다.
선우종원(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국민보도연맹, 학살의 씨앗을 심다
1949년 6월, 선우종원은 오제도(1917~2001), 이태희 등과 함께 국민보도연맹 결성을 주도했다. 좌익 전향자들을 계도한다 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국민보도연맹의 진짜 목적은 좌익혐의자들을 한데 모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 명단이 학살 명부가 됐다. 전국에서 수십만 명의 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 학살됐다.
선우종원이 학살에 직접 손을 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학살당한 사람들을 그 명부에 올린 조직의 설계자 중 한 명이었다. 씨앗을 심은 사람과 열매를 거둔 사람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씨앗을 심은 사람의 책임이 없어지지 않는다.
선우종원(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1950년 내무부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부역혐의자 학살에 간여
1950년 8월, 선우종원은 내무부장관 조병옥(1894~1960)의 권유로 내무부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을 맡았다. 이 시기 그는 경찰수뇌부로서 부역혐의자 학살사건에 직접 책임이 있는 인물이 됐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선우종원(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빨갱이 사냥꾼 이 빨갱이로 몰린 날
1952년, 반전이 일어났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선우종원은 장면(1899~1966) 계열로 분류됐다. 방첩대 사령관 김창룡(1916~1956)에 의해 공산당으로 지목된 그는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조선정판사 사건에서 공산당을 처벌한 사상검사가, 이제 공산당으로 몰려 도망쳐야 했다.
8년간의 망명생활. 빨갱이를 잡던 사람이 빨갱이 신세로 지냈다. 이 아이러니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역사의 복수? 아니면 반공체제의 자기파괴? 어쩌면 둘 다였다.
1956년 도쿄 시절의 선우종원 @무궁화사랑운동본부
4·19혁명과 귀국, 장면의 최측근 브레인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하자 선우종원은 귀국했다. 한국조폐공사 사장을 지내면서 장면의 최측근 브레인으로 활동했다. 제2공화국 출범의 뒷배경에 그가 있었다.
1961년 5·16쿠데타 이후 반혁명 혐의로 다시 수감됐다. 두 번째 감옥 행이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2년 3개월을 복역하고 1963년 8월 석방됐다.
그런데 출소 후 박정희가 그를 청와대로 불렀다. 두 팔로 끌어안으며 선우 선생,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하도록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가두었던 사람에게 막걸리를 권하고 담뱃불을 붙여준 박정희. 그 자리에서 선우종원은 박정희의 포섭 제안을 거절했다. 아직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5년의 장면(위키피디아)
1971년, 박정희 당선을 도운 대가로 유신 국회사무총장
장면이 1966년 사망했다. 선우종원의 거취가 달라졌다. 1970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이 된 그는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와 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선관위원의 책임을 저버리고 박정희 정권이 유리하게 선거를 치르도록 조력했다. 그 공로 로 1971년 7월 30일 국회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지금의 국회 건물 설계와 건축에 간여했다. 5년 가까이 재직하며 1975년에는 청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유신 국회를 관리하는 수장 자리를 꿰찬 것이다. 조선정판사 사건의 사상검사가, 보도연맹의 설계자가, 두 번이나 감옥을 들락거린 사람이, 독재자의 국회를 관리했다.
1963년 대장 예편한 박정희(위키피디아)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선우종원 같은 인물을 가리켜 역사학자들은 체제 적응자(regime adaptor) 라고 부른다. 어떤 체제가 들어서든 그 체제에 적응해 살아남는 사람들이다. 미군정에도, 이승만 정권에도, 장면 정권에도, 박정희 정권에도. 그리고 결국 96세까지 살았다.
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8년 건국공로상, 2000년 민족상. 이 훈장들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조선정판사 사건의 조작의혹, 국민보도연맹 결성, 부역혐의자 학살간여, 두 번의 투옥, 그리고 유신 국회사무총장.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훈장을 네 개나 받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선우종원의 96년을 떠올렸다. 체제가 바뀌어도 살아남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권력의 공백을 채우는 구조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