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후 새로운 과제들 [뉴스] 제주 4·3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이에 따라 4·3은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가르치는 교육 자원으로서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됐다.
6월 24일 오후 1시 30분 해비치호텔앤리조트 다이아몬드홀에서 제21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제주포럼 4·3 세션이 열렸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주최하고 제주4·3연구소가 주관한 이번 행사는 역사학자, 평화학자, 지방자치단체 관계자, 교육계 인사, 4·3 유족과 도민 등 130여 명이 참석해 과거사를 미래 세대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논의했다.
이번 세션은 그동안 추진해온 4·3 연구의 성과와 현주소를 점검하는 자리였다. 기록물 등재라는 결실을 보았지만, 동시에 내부의 학술 연구 기반을 어떻게 다질 것인가 하는 현실적 과제도 함께 다뤄졌다.
제21회 제주포럼 4·3 세션 ‘4·3과 평화교육’ 현장(한요나 시민기자)
세션 시작에 앞서 오영훈 제주특별자치도 지사는 영상으로 전한 환영사를 통해 기록물 등재로 4·3은 이제 인류가 함께 기억하고 성찰해야 할 역사가 되었다 며 국가폭력의 비극을 성찰하고 미래 세대에게 이를 올바르게 교육하고 계승하기 위한 제주의 책임을 다하겠다 고 말했다. 이어 실체적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을 추진해 제주가 진실과 정의, 평화의 가치를 알리는 섬이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진 축사에서 고의숙 제주특별자치도교육감은 4·3이 세계의 역사가 된 시점에서, 이를 미래 세대를 위한 평화 교육과 전승의 과제로 설정하는 것은 필요한 일 이라고 평가했다. 고 교육감은 제주가 평화 교육의 표준 모델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짚으며, 도민 사회와의 공감대를 바탕으로 4·3 평화 교육의 발전을 위해 도교육청 차원의 노력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성과 뒤 가려진 제주 지역 대학의 연구 실태
이날 행사에서는 본격적인 주제 발표에 앞서, 4·3 연구의 지속 가능성과 지역 학술 토양을 점검하는 내부의 지적이 나왔다. 토론 사회를 맡은 최호근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를 비롯해 현장에 참석한 관계자들은 지역 거점 대학인 제주대학교가 정작 4·3 연구를 위한 인프라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우려했다.
과거 국가폭력의 아픔을 겪었던 일본 오키나와의 경우, 학살과 관련된 전담 연구 교수진만 20명이 넘는다. 대만 난명대학교 역시 ‘2·28 사건’ 주간에 연구진들이 전문 분야 연구에 매진한다. 이는 대학이라는 안정적 제도권 안에서 학술적 인프라가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역사적 비극인 4·3의 직접 당사자인 제주에서의 학술적 현실은 차이가 크다. 제주 지역 거점 국립대학인 제주대학교 사학과에는 현재 4·3을 전담하여 연구하고 학자를 길러내는 전임 교수가 전무한 실정이다.
세계기록유산의 가치와 평화학 이론의 교육 현장 접목
이번 포럼에서는 기록 보존의 가치를 밝히고 평화학 이론을 교육 현장의 사례와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발표됐다.
첫 번째 주제 발표를 맡은 김종민 제주4·3평화재단 이사장은 ‘4·3 평화교육의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발표했다. 김 이사장은 그동안 4·3의 진실을 밝히고 이를 제도권 교육 안으로 가져오기 위해 지역사회가 쏟아온 노력을 되짚었다. 그는 4·3 평화교육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기억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교육으로 진화해야 한다 고 짚었다. 이를 위해 교육 현장 교사들의 역량을 키우는 프로그램과 학생들이 체감할 수 있는 현장 중심의 교육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두 번째로 발제를 맡은 팍슨 반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본부 부서장은 제주 4·3 아카이브의 진정성과 기록의 완전성을 언급했다. 반다 부서장은 과거에 벌어진 국가폭력과 억압의 기억을 공적인 문서로 만들어 남기는 과정이 과거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러한 기록을 초·중·고·대학 교육과정에 도입해 미래 세대에게 시민 의식을 심어주는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이어 전우택 연세대 명예교수는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폭력 이론을 바탕으로 발표를 이어갔다. 그는 물리적인 폭력이나 구조적인 차별을 넘어, 가해 행위를 사상적으로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 명예교수는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양극화되어 서로를 비인간화했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대신 미래 세대가 함께 살아갈 희망을 이야기하는 방법론으로 북아일랜드의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이나 유대인 학살을 다룬 만화, 소설 등 문화와 예술을 접목한 평화 교육을 학교 현장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건수 강원대 교수는 전쟁이나 조직적인 집단 폭력이 생물학적 본능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적 발명품이라는 인류학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 이러한 폭력성을 평화적인 갈등 해결 방식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이 언급했던 ‘문화의 힘’을 유네스코가 지향하는 ‘평화의 문화’와 연결 지어 설명하며, 교육을 통해 서로를 존중하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일본 오사카 백두학원 건국학교의 김세연 교사는 해방 후 재일동포들이 일본 땅에서 민족 교육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역사를 전했다. 연합군 총사령부(GHQ)가 조선인 학교를 강제로 닫으려고 했을 때 맞서 싸운 동포들의 이야기와 제주 조천 출신의 자산가인 조규훈 이사장이 재산을 바쳐 학교를 세운 사연을 소개했다. 김 교사는 오늘날에도 히로시마 평화 수학여행을 떠나고 오사카 통국사에서 열리는 4·3 위령제에 직접 참여하는 등 교육 현장에서 이어지고 있는 실천 사례들을 소개했다.
제주 4·3의 상징인 동백꽃(한요나 시민기자)
화해와 상생… 기계적 중립에 대한 우려
이번 포럼은 평화 교육이 나아갈 방향을 논의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다만 현장의 논의를 지켜보며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도 있었다. 화해와 상생이라는 언어 속에 자칫 역사의 실체를 흐리는 기계적 중립 에 대한 우려다.
4·3은 수십 년 동안 은폐를 강요받았던 역사적 비극이다. 진상을 밝히고 명예를 회복하는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명확한 사실 규명과 책임 있는 반성을 건너 뛰어 화해만을 강조한다면, 4·3의 본질이 흐릿해질 수 있다. 기계적 균형은 명확한 역사적 교훈을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발표에서 언급된 김구 선생의 사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강조한 문화의 힘과 공존은 무조건적 관용이 아니라,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주체적인 노력 위에서 가능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세션은 진정한 상생을 위해 채워나가야 할 내실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4·3 평화 교육이 신뢰를 얻으려면 먼저 지역 대학의 연구 토양부터 다져야 한다. 실체적 진실과 역사적 정의 위에 교육의 방향성을 세울 때, 4·3은 미래 세대와 전 인류가 정직하게 물려받을 유산이 될 것이다.한요나 시민기자 hanyon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