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토피아] ㉜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사이 또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개복치의 입장문이었다.
-존경하는 대왕문어님. 저는 본래 환자의 몸을 다스리는 의원이었습니다. 만약 저를 풀어주신다면 속죄하는 심정으로 죽는 날까지 플라병 퇴치를 위한 백신 개발에 힘쓸 것입니다. 제가 그간 왕좌에 있었던 건 대왕문어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공석을 메꾸고자 함이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국정을 맡아왔지만 부덕의 소치로 실망시켜드린 점,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 저의 자리로 돌아가려 하오니 부디 해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허락해주십시오. 난파궁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장차 우리 해역은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하루빨리 봉인 해제하여 죽은 물살이를 걸러내고 살아있는 물살이의 심신을 안정시켜 주십시오. 조속하고도 현명한 결정 부탁드립니다.
-개복치 의원-
몇 십 년간 이 해역을 풍비박산 내놓곤 꼴같잖은 소릴 하고 있어.”
동정심 유발하는 게 아주 가관이구먼. 바지 입고 인간 흉내 냈던 거 다들 기억하지?”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으면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짓이나 다름없습니다. 정의로운 해역은 박애나 관용 같은 것으로 건설되지 않아요.(알베르 카뮈의 말)”
하지만 플라병이 발생한 이상 난파궁을 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죽으라고 가둬둔 건데 왜 열어요?”
플라병은 변수잖아요. 굶어 죽는 것과 질병으로 죽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봐요.”
우리가 세균을 퍼뜨린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의 방치로 세균이 퍼졌다곤 할 수 있죠.”
하긴 물살이권이란 것도 있으니까.”
부역자 놈들에게서 존엄성을 찾겠단 건가요?”
병을 낫게 한 다음에 단죄해도 늦지 않단 말이에요. 더군다나 개복치님은 한 때 우리 해역을 오래 다스린 대왕이에요. 어느 정도 대접해주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게. 전관예우란 게 있죠.”
리본장어 알들도 살리고 봐요.”
듣다 못한 폼폼크랩이 폼폼을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이봐요. 저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악행을 답습하는 물살이들이 또 등장하게 될 거예요. 절대로 나쁜 선례를 남겨선 안 됩니다.”
하지만 이제야 자리 잡으신 대왕문어님이 초반부터 강경하게 나오면 물살이들이 등 돌릴 수도 있어요. 연임을 생각한다면...”
벌써부터 표 걱정해요? 그러니까 아무 것도 못 하는 거예요. 이 눈치 저 눈치 다 보다가 시간 흐르면 골든타임 놓쳐요. 나중엔 해역을 바로잡는 게 더 힘들어질 거예요.”
옳소! 저놈들 봐주면 목숨 걸고 해역 지켜온 물살이들은 뭐가 됩니까?”
폭파시키는 게 영 내키지 않으면 어디 외딴 곳에다 추방이라도 시키는 게 어때요? 뜻 맞는 놈들끼리 왕국 건설해서 지지고 볶고 살라 해요.”
아니요, 결단코 살려둘 수 없습니다. 반드시 응징해야 합니다.”
온건파와 급진파로 갈려진 두 그룹은 이내 싸우기 시작했다. 한 치 양보도 없는 숨 막힌 대립이 이어지자 해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대왕문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개복치만은 용서해선 안 됩니다. 천수를 누리고 죽는 꼴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의원으로서 이 해역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다가 죽겠다잖아요.”
아니요, 이 해역은 이미 안전합니다. 지금껏 우리 중 플라병에 걸린 물살이가 나오지 않았단 게 증겁니다. 옆 해역에서 온 놈들만 죽었다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면역력을 갖추고 있다구요.”
그래도 앞으로 창궐할지도 모르니 대왕, 아니 개복치 의원을 살려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감시만 제대로 한다면 문제없을 거예요.”
방금 [오션일보]에 부고가 떴어요. 리본장어가 죽었다고 합니다.”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다시 시끄러워지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때가 되어 죽은 것뿐이에요. 원래 알 낳은 다음에 우리 물살이들 대부분 죽잖아요.”
추모 기사 봤어요? 억지 슬픔 짜내려는 행태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져요.”
아니,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어요? 마지막까지 매정할 건 없잖아요.”
[기로]
며칠을 고민한 끝에 대왕문어는 살아있는 물살이들을 방면해주기로 했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노동으로 죗값을 치르기로 했다. 알에서 막 깬 리본장어의 새끼들만은 노동에서 제외되었다. 폭탄이 제거된 난파궁의 뚜껑이 열리던 날, 해역의 물결에 비치는 빛을 처음 본 새끼장어들은 꼬리를 연신 흔들어댔다. 그리곤 앞에 선 대왕문어를 향해 넙죽 인사를 올렸다.
이제부터 대왕문어님께 최선을 다 할 거예요.”
알러뷰. 대왕님.”
어미를 잃어 상심이 크겠다는 위로를 하려던 대왕문어는 리본장어가 환생한 것만 같아 소름이 끼쳤다. 그는 준비해온 덕담도 하지 않은 채 새끼들을 서식처로 보내버렸다. 그 뒤로도 여러 잔챙이들이 교화될 것을 약속하며 난파궁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거대한 몸통의 개복치가 낚싯줄에 꽁꽁 묶여 끌려 나왔다. 그는 대왕문어를 향해 살려주셔서 감사하단 말을 짧게 전했다. 바지 벗은 개복치는 많은 물살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료소로 호송되었다.
죄수 개복치는 죽을 때까지 백신개발에 힘 쏟아야 할 것이며 종종 아픈 물살이들이 찾아오면 무료봉사하는 것으로 자숙하라. 끼니때가 되면 진료소 안으로 제한된 난바다곤쟁이가 지급될 것이다.”
대왕문어는 자신이 인간계에서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냈던 만큼 이 해역 역시 크게 몸살을 앓았음을 실감했다. 공백의 시간만큼이나 부작용은 컸다. 당장 난파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냔 문제부터 [장수일보]와 [오션일보], 그리고 무생매체의 운영, 새로 생긴 규칙 검토까지 참으로 많은 난제들이 산적해있었다. 대왕문어는 [피바다구 백전백승동 미역 25번지]를 [갯바위구 물풀동 파래 25번지]로 돌려나가는 작업부터 해나갔다. 점차 해역은 본래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듯했다.
대왕문어님이 돌아오신 기쁨을 흰 수염고래님과 함께 나눌 수만 있다면...”
은빛 연어님도 함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고 보니 은빛 연어님을 닮은 치어들을 얼마 전에 본 것 같기도 해요.”
엇, 저도요.”
은빛연어님의 새끼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겠지요?”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야 지요.”
눈 뜨고 태어났는데 거저 주어진 자유, 그걸 마음껏 누리는 치어들. 상상이나 돼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 절로 이루어지는 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장수거북과 폼폼크랩은 오랜만에 여유를 누리며 갯바위당을 거닐었다. 어느새 비밀통로까지 온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 볼펜은 불가살이의 것 아닌가요?”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을까요?”
혹시 일부러 흘리고 간 걸까요?”
그럼 불가살이도 돌아왔단 말...?”
어느 날 불쑥 우리 곁에 나타날 것만 같지 않아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몽니를 부리며.”
이제는 그 어떤 행동도 불가사의하지 않아요. 불가살이님이니까.”
폼폼크랩은 그 날 밤 개복치의 진료소 입구에 잠입했다. 불가살이의 볼펜에서 뺀 초록구슬을 구석진 곳에다 꼼꼼히 붙였다. 보름달이 서너 번 뜨고 지는 동안 별다른 정황이 포착되지 않았다. 하지만 월척은 방심한 사이에 일어나는 법이었으니 한시름 마음을 놓고서 과거를 망각할 때 쯤 덜커덕, 대어가 낚였다.
-작위를 보장해주겠단 저쪽 해역 계약서에 지느러미 사인을 하기 직전이었어. 대왕문어가 조금만 늦게 등장했더라도 상황은 바뀌었을 거란 말이지.
-이건 뭐 도둑놈한테 눈 뜨고 서식처 빼앗긴 꼴입니다. 갑자기 떡하니 나타나 투표도 하지 않고 새치기로 대왕이 되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난파궁에서 우리가 짰던 작전 2호 기억하십니까?
-옳거니, 아직 방책이 남아있지.
-까짓 거 실패하면 반역이고 성공하면 혁명 아니겠습니까? 오늘 밤 밀어붙이죠.
-좋아. 2호를 발동시킨다. 그럼 갯바위당에 잠입해서 폭탄을 가져오는 첫 임무를 누가 맡겠는가?
모두가 꼬리를 내리는 와중 리본장어의 맏이가 앞으로 나섰다. 개복치의 입 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폭탄을 가져오면 네 부모가 맡았던 [오션일보] 오너 자리를 주도록 하겠다. 자, 과거의 패배를 설욕하러 떠나거라!
[장수일보]를 통해 영상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또 한 번 해역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비밀회동 영상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 부역자들은 처음엔 아연실색했지만 나중엔 취재 윤리에 어긋나는 매체를 폐간해야 한다고 외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장수일보] 측은 ‘윤리를 어기는 자들이 없으면 취재 윤리를 어기는 일 역시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폭력이 정의에게 대들어서 맞붙으면 누가 이기겠어? 그러니 우리 승률이 항상 이 따위였던 거야. 이제 무사정신을 적극 내보일 때도 됐잖아?
어심은 어느 때보다 하나로 뭉쳐 있었다. 궁지에 몰린 부역자들은 여론을 뒤집기 위해 [오션일보]를 적극 활용하기도 했으나 무생 매체가 폐간된 뒤부터 공신력을 잃었다. 게다가 은밀하게 옆 해역으로 도주 준비 중이던 개복치가 수하의 밀고로 들통이 나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도 없게 되었다.
포승줄에 묶인 개복치가 끌려 나오던 날 시계탑 광장은 수많은 물살이들로 인해 초만원이었다. 뭉뚝한 그의 몸은 구석구석이 썩었거나 쭈그러져 있었다. 저 추한 몸뚱이가 한 때 모든 권력을 독점했었단 사실을 물살이들은 보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단상에 오른 대왕문어는 긴 다리를 뻗어 매국 수괴의 면상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저는 이 해역을 팔아먹으려 했던 개복치에게 기사회생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푼 결과는 쿠데타라는 역모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
개복치가 아가리를 벌려 대꾸하자 대왕문어는 다리를 여러 개 뻗어 매타작을 했다. 이내 상황은 수습되었다.
이 해역은 무시무시한 소용돌이에 빠질 뻔 했습니다. 이번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 절대악을 처단하는 본보기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제가 절대선이란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절대선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악은 존재합니다. 절대악의 최후를 지금부터 똑똑히 보십시오.”
과연 늙고 탐욕스러운 매국 수괴를 어떻게 처단할 것인지 모든 물살이들의 눈길이 한곳에 쏠렸다. 이어진 대왕문어의 행동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가리를 잔뜩 벌린 대왕은 개복치의 넙데데한 대가리를 한 입 푹, 하고 베어 물었다. 질겅질겅 씹을 때마다 주변의 물결이 대왕의 거친 숨결에 따라 요동쳤다. 한 때 반인반수로 불렸던 독재자의 대가리 절반이 동족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물살이들은 지켜보았다. 대왕문어의 주위가 핏빛으로 번져갔지만 아무도 동요하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적막만이 사위를 장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