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호의 생활ESG】한국ESG기준원의 전례 없는 서약서 요구, 이유는 뭘까?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현재 한국의 ESG 핵심 이슈는 지속가능성 정보의 공시다. 기업과 투자자의 이목이 공시에 집중되는 사이 ESG 평가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듯하다. 평가도 정보 공개 기준을 반영하므로 이슈의 시의성에서 밀리는 게 사실이라 미디어도 최근에는 이 주제를 크게 조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ESG평가를 주제로 펜을 든 이유는 국내 대표 평가기관인 한국ESG기준원(KCGS)이 지난 20일 발표한 ESG 평가 문항 및 제출 가이드라인에서 특이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준원이 밝힌 내용에 따르면, 기업이 ESG 평가 결과를 확인하려면 사전에 두 가지 동의서에 서명하여 제출해야 하는 열람 조건이 새롭게 붙었다.
제출해야 하는 문건은 ▲평가정보 유출방지를 위한 비밀유지 동의서와 ▲피드백 증빙자료 제출에 대한 확인서다. 전자는 한국ESG기준원의 평가정보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요구하는 동의서다. 후자는 평가 결과에 대해 기업이 증빙자료가 있는 것만 피드백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국ESG기준원은 지난 20일 2024 ESG평가문항 및 제출가이드를 공개했다고 발표했다./한국ESG기준원
기업에서 평가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뭐, 이런 것까지 요구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오죽하면 이렇게 할까”였다.
첫 번째 반응은 평가 결과를 열람할 때 이런 동의서를 요구하는 게 이례적인 상황이어서 그렇다. 글로벌 평가사인 MSCI나 S&P글로벌의 DJSI는 이런 동의서를 요구하지 않다 보니, 이에 대응하던 기업들은 기준원이 이전에는 없던 이런 요구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평가사가 평가 방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자주 비판 받는 소위 블랙박스론과 겹쳐보이기도 한다. 기업가에서는 한국ESG기준원이 최근 평가 기준을 크게 변경하고 대응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았다는 점과 소통이 잘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쌓인 가운데, “뭐, 이런 것까지 요구하나”라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두 번째 반응은 기준원이 처한 환경을 고려할 때,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KCGS가 적은 예산과 인원으로 기업의 모든 피드백에 대응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평가의 고도화를 위해서는 기준도 중요하지만, 평가를 집행할 예산과 인력을 확충하는 게 시급해 보인다.
일부 실무자들은 기업들의 책임도 있다고 주장한다. 기업들이 회사의 계정을 컨설팅 기업에 주고 평가 대응을 대신하도록 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이다. 컨설팅사는 해당 기업의 점수를 올리기 위해 억지 피드백을 하는 사례들이 왕왕 발견되므로, KCGS도 이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실무자는 “피평가 기업에게 이런 동의서와 확인서를 요구한 것은 다소 과한 처사지만, 오죽하면 이들이 이렇게까지 할까”라는 말을 했다.
이미지=한국ESG기준원
이 문제는 표면적으로 기업과 평가사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녹록지 않은 국내 ESG 생태계에 있는 듯하다.
KCGS 홈페이지에는 “기업 및 금융회사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다각도 지원을 통해 대한민국 기업과 자본ㆍ금융 시장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단체 목표가 메인 페이지에 나와 있다. KCGS는 정기적으로 연구보고서도 내고, 평가 기준도 고도화할 목적으로 매년 개정하고 있다. KCGS가 출범한 초창기에 기업의 평가 담당자들은 기준원이 소통도 잘되고 피드백도 꼼꼼하게 줬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목표에 대한 진정성과 노력은 진짜라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 잘하고 싶어도 예산과 인력이 부족해 벌어지는 상황이라고 해석해볼 수 있다.
기업 ESG 실무자들과 대화를 나누면, 역시 예산과 인력 문제가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실무자들은 평가, 공시, ESG 전략 마련과 같은 많은 일을 하면서도 경영진과 다른 부서들을 설득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차례 회의를 거친다. 기업들이 컨설팅사에 업무를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나, 시간을 쪼개 써야 하는 실무자들이 처한 한계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선택지라고 생각된다.
평가사와 기업 모두 자원이 부족하지만, 더 많은 성과를 내도록 요구받는 환경에 놓여있다. KCGS는 더 나은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마련해야 하고, 기업은 외부 컨설팅과 내부 ESG 전문성 간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는 어려워도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기업과 경제의 지속가능성이 이들의 어깨에 놓여있는 만큼, “오죽하면 이럴까”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관심을 갖고 격려하며, 충분한 지원도 제공돼야 한다.
송준호 임팩트온 취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