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감옥 살면 뭘 하겠는가? 만델라의 질문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감옥에서 27년을 썩으면 보통 사람 같으면 뭘 하겠는가. 나를 가둔 놈들 다 죽이겠지.
그런데 이 양반은 달랐다. 석방되자마자 자기를 가둔 백인 정권과 악수를 나누고, 급기야 함께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을 27년간 가뒀던 로벤 섬 교도관들을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했다. 정신 나간 거 아니냐고? 아니다. 이게 바로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라는 사람이다.
1994년의 만델라 (위키피디아)
피부색으로 사람을 나누던 미친 나라
1918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만델라는 당대 최고의 불의와 맞닥뜨렸다. 바로 아파르트헤이트 라는, 번역하면 인종격리 정책 이라는 제도다. 쉽게 말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같은 화장실도 못 쓰고, 같은 버스도 못 타고, 같은 학교도 못 다니는 황당무계한 차별 제도였다.
상상해보라. 현재 대한민국에서 서울 토박이와 지방 출신은 다른 지하철을 타야 합니다 라는 법이 생긴다면? 강남 사람들만 투표할 수 있습니다 라는 제도가 시행된다면? 당연히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남아공에서는 이게 194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합법 이었다.
만델라는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하며 이 말도 안 되는 제도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변호사였던 그는 법정에서, 거리에서, 어디서든 흑인의 권리를 외쳤다. 그러다 1962년 8월 5일, 반역죄로 체포됐다. 1964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37년의 만델라 (위키피디아)
27년 감옥살이, 그리고 기적
로벤 섬 교도소에서의 27년. 채석장에서 강제노동을 하고, 좁은 감방에 갇혀 지내면서도 만델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동료 정치범들에게 역사와 정치를 가르치고, 교도관들과도 인간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는 감옥을 만델라 대학 으로 만들었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1990년 2월 11일, 드디어 석방됐다. 당시 남아공 대통령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Frederik de Klerk, 1936~2021)는 국제사회의 압박과 내부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만델라를 풀어줬다. 세상 사람들은 예상했다. 이제 복수의 피바람이 불겠구나.
하지만 만델라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데 클레르크와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1993년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1994년 5월 27일,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75세의 나이에 말이다.
만델라와 에블린은 1944년 7월 반투 남성 사회 센터에서 열린 월터와 알베르티나 시술루의 결혼 피로연에 참석했다.(위키피디아)
복수가 아니라 화해다 , 진실화해위원회의 실험
대통령이 된 만델라가 한 일은 놀라웠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백인들이 저질렀던 온갖 범죄와 인권유린에 대해 다 용서하자 고 했다. 미쳤나? 아니다. 대신 진실화해위원회 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의 원칙은 간단했다. 네가 뭘 했는지 솔직하게 털어놔라. 그럼 용서해줄게.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면 사면해주는 대신, 피해자들에게는 진실을 알 권리를 보장했다. 이게 바로 회복적 정의 다.
일부 흑인 급진파들은 너무 관대하다 며 비판했다. 백인 극우파들은 우리를 굴욕적으로 만든다 며 반발했다. 양쪽 다 불만이었지만, 덕분에 남아공은 내전을 피할 수 있었다. 흑백 간 전면전이 벌어졌다면 수십만, 수백만 명이 죽었을 것이다.
만델라가 살았던 요하네스버그 소웨토 빈민가의 옛집 (위키피디아)
김대중과의 묘한 인연
흥미롭게도 만델라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2001년 3월 12일, 당시 김대중 대통령(1924~2009)이 만델라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닮은 인생을 살았다.
김대중도 군부독재에 맞서 싸우다 1973년 납치당했고, 1980년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감형됐지만 감옥과 가택연금을 오가며 고통 받았다. 그러다 1997년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고,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만델라는 김대중을 아시아의 형제 라고 불렀고, 김대중은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을 번역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용서와 화해 라는 공통된 가치를 공유했다.
만델라가 숨어 지냈던 릴리스리프 농장의 초가 지붕 방 (위키피디아)
지금 한국, 만델라에게 배워야 할 것들
자, 여기서 질문 하나. 현재 대한민국은 만델라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첫째, 진영 논리를 넘어선 대화다. 만델라는 자신을 27년간 가둔 사람들과도 대화했다. 한국은 어떤가? 내 편 아니면 적 이라는 흑백논리로 사회가 양극화됐다. 보수와 진보,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수도권과 비수도권... 온갖 갈등이 폭발 직전이다.
만델라는 말했다. 적과 대화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 남북의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정부의 노력에 반대하며 종북 타령을 늘어놓는 오늘 일부 정치인들,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둘째, 과거사 청산과 화해의 균형을 이뤘다. 만델라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처벌 보다 진실 에 방점을 찍었다. 한국은?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됐다. 독재 시절의 민간인 학살과 인권 유린, 5.18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 일제강점기 친일 문제 등, 가해자들은 아직도 사죄를 안하고 오히려 큰소리치며 정당화하고 있다. 가해자의 사과 없이 피해자가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기는 어렵다.
만델라식 접근은 이렇다. 네가 뭘 했는지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머리숙여 사죄해. 그럼 사회적으로는 용서할게. 대신 역사는 기록한다. 복수의 악순환을 끊으면서도 진실을 밝히는 방법이다.
셋째, 리더의 포용력이다.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식에 자신을 가뒀던 교도관들을 초청했다. 이건 단순한 쇼가 아니라 국민통합의 상징이었다.
만델라는 럭비 경기를 활용해 백인들의 마음을 얻었다. 1995년 남아공 럭비 월드컵에서, 전통적으로 백인들의 스포츠였던 럭비를 응원했다. 흑인들은 반발했지만, 덕분에 백인들도 만델라를 지지하게 됐다. 영화 인빅터스 가 바로 이 이야기다.
넷째, 경제적 정의와 정치적 자유의 병행이다. 솔직히 말하자. 만델라도 완벽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뤘지만,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현재 남아공의 실업률은 25%가 넘고, 빈부 격차는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국도 비슷한 위기에 처해 있다. 민주화는 이뤘지만, 청년 실업, 부동산 양극화, 재벌 중심 경제구조... 경제적 불평등이 심각하다. 만델라의 교훈은 명확하다. 정치적 자유만으로는 부족하다. 경제적 정의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로벤섬의 석회 채석장. 만델라와 다른 수감자들이 강제 노역을 했던 곳이다.(위키피디아)
위대한 인물의 그림자
만델라는 2013년 12월 5일, 9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 세계 정상들이 조문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1961~)은 우리 시대의 가장 용기 있는 사람 이라고 추모했다.
하지만 만델라도 인간이었다. 가족관계는 복잡했고, 경제정책은 실패했으며, 에이즈 문제에 대한 초기대응도 미흡했다. 완벽한 성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유산은 명확하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용서는 평화를 낳는다. 이 단순한 진리를 몸소 실천한 사람. 그게 넬슨 만델라다.
로벤섬에 있는 넬슨 만델라의 감방 (위키피디아)
한국사회에 묻는다
만델라는 감옥에서 나와 자신을 가둔 사람들과 악수했다. 만델라는 75세에 대통령이 돼서 5년 만에 자진 퇴임했다. 만델라는 리더십은 다른 사람을 앞에 내세우는 것 이라고 했다.
2026년, 만델라가 태어난 지 108년이 지났다. 그가 석방된 지 36년, 세상을 떠난 지 13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지금 한국사회에 더욱 절실하다.
우리는 진영논리에 갇혀 싸우기만 할 것인가? 남북간의 평화통일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놓고도 내 편 아니면 적, 멸공 , 종북 , 빨갱이 라는 맹목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만델라는 말했다. 원한은 감옥에 있는 것과 같다. 용서는 자유다. 27년 감옥살이를 한 사람이 한 말이다. 제발,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스스로를 증오의 감옥에 가두는 어리석인 사람이 되지 말자.
1985년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이 이끌던 그레이터 런던 의회 행정부가 런던 사우스 뱅크에 세운 만델라 흉상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