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무역 가해국들은 왜 사과·배상 요구 외면할까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남성이 2001년 8월 16일(현지시간) 가나의 케이프 코스트 성에 전시된 노예들이 끌려가는 그림을 보고 있다. 유엔 총회는 지난 25일 대서양을 오간 노예 무역을 가장 잔혹한 인도주의 범죄 로 규정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2001.8.16 AFP 자료사진 연합뉴스
유엔이 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본부에서 총회를 열어 과거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인도주의에 반한 가장 중대한 범죄 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가운데, 영국 BBC가 결의안 채택의 성과, 반대하는 국가들의 논리, 결의안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배상 기금의 조성 의미 등을 27일 짚어 눈길을 끌고 있다.
아프리카 가나가 주도한 결의안은 아프리카인을 노예로 삼아 재산으로 취급해 이들을 매매한 행위를 범죄로 규정했다. 노예무역이 인종적으로 차별된 체제를 통해 모든 사람의 삶의 틀을 형성하는 결과를 낳았다고도 지적했다. 이어 유엔 회원국이라면 노예무역을 사과하고 배상 기금을 조성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프리카 54개국을 대표해 연단에 오른 존 드라마니 마하마 가나 대통령은 오늘 우리는 진실을 확인하고 치유와 회복적 정의를 추구하기 위한 연대 속에 모였다 면서 역사를 되돌아볼 때 노예무역으로 인해 존엄을 침해당한 수백만 명의 기억과, 지금도 인종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옳은 일을 했다는 사실이 기록되도록 하자 고 결의안 동참을 호소했다.
이에 한국을 비롯한 123개 회원국이 찬성 표를 던졌다. 미국, 이스라엘, 아르헨티나 세 나라가 반대했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를 포함해 52개국은 기권했다
유엔총회 결의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달리 구속력은 없지만, 국제사회의 의견으로 받아들여진다고 BBC는 전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노예무역에 대해 인간의 존엄에 대한 심각한 배반 이며 정교한 비인간화와 대규모 약탈 기제 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도 남아있는 불평등과 인종차별에 맞서야 할 순간 이라며 노예제의 희생자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고 장기간 지속했던 사악한 시스템도 잊지 않을 것 이라고 말했다.
독일 외무장관을 지낸 아날레나 베어보크 총회 의장은 인류 역사에 가장 심각한 인권 침해 중 하나 라며 유엔 헌장과 세계인권선언에 담긴 원칙을 침해한다 고 말했다.
댄 네그레아 유엔 경제사회이사회 미국 대표는 결의안에 반대한 이유에 대해 미국 정부는 환대서양 노예무역으로 비롯된 역사적 과오를 비난하지만 이같은 역사적 잘못이 발생할 당시 국제법상 불법은 아니었기에 배상을 위한 법적 권리를 인정할 수 없다 고 반박했다.
쇠걸이로 연결된 노예들의 그림이 2019년 6월 19일(현지시간) 나이지리아 바다그리에 있는 세리키 아바스 노예박물관의 벽에 돋을새김돼 있다.2019.6.19 로이터 자료사진 연합뉴스
배상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BBC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1200만 명에서 1500만 명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에서 붙잡혀 노예로 카리브해나 그 연안으로 이송돼 강제 노동을 했으며 악명 높은 노예선에서 200만 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노예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통제하는 식민지로 보내졌다.
구테흐스 총장은 많은 서방 국가들의 부가 도둑맞은 생명과 노동력 위에 세워졌다 고 말했다. 그는 족쇄와 쇠걸이에서 채찍질과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야만적인 처벌이 통제를 유지했다 며 단순한 강제 노동이 아니었다 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것은 남성, 여성, 아이들에 대한 대규모 착취와 고의적인 비인간화의 기계였다. 상처는 깊고 종종 인식되지 않는다 고 개탄했다.
가나에 기반을 둔 디아스포라 아프리카 포럼을 이끄는 에리카 베넷 박사는 BBC에 이번 결의안 투표가 자신처럼 노예였던 이들의 후손에게 개인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건 내가 인정받았다는 뜻이고, 우리 조상이 마침내 안식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 압도당하고 있다.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이게 진짜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노예제 피해를 입은 국가들은 한 세기 넘게 배상금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논쟁이 격화됐다. 특히 아프리카 노예 노동으로 이익을 얻었던 일부 국가와 기업들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속죄 조치를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됐다.
브라질은 아프리카 노예를 가장 많이 수용한 곳으로, 주로 포르투갈의 식민지 시절 490만 명에 달했으며, 흑인은 백인보다 빈곤 상태에 살 확률이 두 배에 달한다고 국가 공식 통계기구(IBGE)가 밝혔다.
가나가 제안한 결의안 가운데 배상금은 조상들이 노예로 강제로 끌려간 흑인들에게 사과하고 보답하는 보상으로 작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영국의 학자이자 활동가이며 글로벌 배상 운동을 이끈 에스더 조세이 박사는 이번 투표를 환영했지만, 그 자체로 큰 변화를 가져올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배상 운동에 있어 좋은 승리이지만, 이것은 선언일 뿐임을 기억하자 면서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 논의의 중심 무대에 서는 것을 보는 것은 고무적이지만, 유엔에서는 마음과 정신을 얻지 못할 것 이라고 단언했다. 이어 진짜 싸움은 거리에서 벌어질 것이며,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노예제의 역사와 아프리카인 및 아프리카 후손들의 삶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다 고 덧붙였다.
배상에 대한 역사적 선례가 있나?
가장 유명한 배상은 독일과 관련돼 있다. 1952년 이후 독일은 나치 정권의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800억 달러 이상을 지급했으며, 이스라엘에도 지급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느 나라도 노예로 잡힌 아프리카인이나 영향을 받은 아프리카, 카리브해,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후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한 적이 없다. 19세기에 정부가 지급한 대부분의 배상금은 되레 노예 소유자에게 지급됐지, 노예에게 지급된 것이 아니었다. 영국도 포함됐다. 1830년대 노예제 폐지 이후 영국은 소유주들에게 오늘날 가치로 210억 달러 이상을 지급했다.
2022년 네덜란드처럼 노예제 관련 역할을 공식적으로 사과한 국가들조차 노예 후손에 대한 직접적인 금전적 배상을 배제했다. 네덜란드 정부는 대신 노예제의 유산을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이니셔티브 및 프로젝트 를 위한 2억 3000만 달러 기금을 설립했다.
스페인의 아프리카 식민지 연구자 셀레스트 마르티네즈 박사는 노예제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인종차별과 불평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과거를 인식하는 것은 더 공정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원한다면 매우 중요하다 고 말했다.
유엔 총회 결의안이 채택된 다음날인 26일(현지시간), 한 소녀가 세네갈 수도 다카르를 마주 보는 고리 섬에 있는 고리 기념탑 주변을 달리고 있다. 2026.3.26 다카르 AFP 연합뉴스.
배상에 반대하는 논거는 무엇인가?
배상에 대한 반대는 다양한 수준에서 일어나는데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조상들의 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희생자의 후손을 식별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배상 같은 일은 생존자가 많이 살아 있거나 가까운 가족이 살아있는 동안 해결됐다.
법적 논쟁도 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15세기부터 19세기 사이에 노예제가 합법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배상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은 노예 무역 폐지 투쟁을 주도하기 전 가해국 중 하나였으며, 배상금 지급을 반복해서 거부했다. 2024년 11월에 당시 외무장관 데이비드 래미는 나이지리아 방문 중 노예제 피해를 입은 옛 식민지에 대한 배상 개념은 현금 이전과는 관련이 없다 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조차 두 임기 동안 공개적으로 배상 정책을 추진하거나 제안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2016년 작가이자 활동가인 타-네히시 코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오바마는 퇴임 몇 주 전 미국의 정치 체제가 배상금을 사실상 실행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믿는다고 털어놓았다.
아프리카 노예제가 인류에 대한 가장 중대한 범죄 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비평가도 있다. 네그레아 미국 대표는 총회에서 위반 행위의 순위를 매기려는 시도에 강력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인도에 반하는 범죄가 다른 범죄보다 덜 심각하다는 주장은 역사상 수많은 잔혹 행위들의 희생자와 생존자들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축소한다 고 주장했다.
2023년 3월 28일(현지시간) 가나 케이프 코스트 성에 수용돼 있던 노예들이 걸어나와 노예선을 타러 걸었던 층계의 모습. 이 성의 가운데 문은 돌아올 수 없는 문 (Door of No Return)으로 통했다. 2023.3.28 AFP 자료사진 연합뉴스
얼마나 많은 돈을 말하는 건가?
가장 많이 논의되는 대목은 누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그리고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가다. 유엔 결의안은 금액을 명시하지 않았다. 노예를 소유한 기업, 기관, 가족들이 보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대부분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다.
2013년, 15개 카리브해 국가 블록인 카리콤은 10개 항목으로 구성된 보상 계획을 발표했다. 제안들은 외채 탕감, 문맹 퇴치와 공중보건 해결에 대한 투자로 확대됐다. 2023년, 이 블록은 15개 카리브해 국가들이 옛 식민 강대국들에게 최소 33조 달러(약 4경 9879조 원)의 채권을 갖고 있다고 밝힌 연구 결과를 공유했다.
서인도 제도 대학교 교수이자 카리콤 배상위원회 부위원장인 베린 셰퍼드는 국가는 항상 죄가 있다. 왜냐하면 국가가 개인, 기관, 기업들이 노예제와 식민주의에 가담하는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같은 해, 국제사법재판소의 재판관 패트릭 로빈슨은 더 큰 금액을 제시했다. 노예 노동의 혜택을 받은 국가들을 비롯해 31개국이 총 107조 달러(16경 1730조 원)를 배상해야 한다고 봤다. 이 숫자는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감당하기 힘든 천문학적 금액이다. 지난해 미국 연방 예산이 71조 달러였다.
퀸스 대학교 벨파스트 강사인 법률 전문가 루크 모펫은 집행 불가능한 거액이라고 본다. 그는 법적으로는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산이지만, 그렇다고 관련자들이 앉아서 협상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면서도 사람들은 수조 달러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논의가 어떤 형태로든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릴 가능성도 있다 고 지적했다. 누가 수혜자가 되어야 할지 명확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사과하는 것마저 꺼리는 이유는?
카리콤의 캠페인은 단지 재정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블록의 주요 불만 중 하나는 노예제로 재정적 이익을 본 대부분의 국가들이 공식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셰퍼드 교수는 피해자와 그 후손들의 치유를 위해서는 유럽 정부들이 진심 어린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 면서 일부는 대신 유감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피해자와 그 후손들이 사과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 짚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의 사라 하무드는 이러한 인정이 모든 회복적 사법 절차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재정적인 부분도 그저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어떤 나라도 노예제의 유산을 완전히 다루지 못했고,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삶에 미친 영향을 포괄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반복해 말해왔다 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국가들은 사과하지 않는 걸까? 가장 간단한 답변은 사과가 때때로 법적 책임 선언으로 작용해 금전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07년 당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가 자국의 노예 인신 매매에 유감을 표명했는데 그는 2024년 국가들이 역사적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BBC에 털어놓았다. 블레어는 역사를 되돌아보면 완전히 터무니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 있다 면서 식민주의로 얼룩진 나라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그들을 돕는 것 이라고 말했다.
나이지리아 학교 학생들이 2019년 6월 21일 바다그리의 노예 무역항이 있던 해변에서 현장 학습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9.6.21 로이터 자료사진 연합뉴스
배상으로서의 교육을
운동가들은 또 교육이 배상 노력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강조한다. 노예제 영향을 받은 국가들의 교육 인프라 투자부터 대서양 노예 무역에 관여한 국가들에서 노예제 역사가 어떻게 가르쳐지는지에 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배상금이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조세이 박사는 영국과 같은 나라의 국민들은 여전히 노예제가 조상들의 비인간화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다 고 지적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HRW)의 테페라는 배상금 논의에서 교육의 중요성이 희석될까 우려한다. 그녀는 맞다, 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아마도 돈 문제여야 할 것이다. 다른 형태의 배상으로는 피해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상은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 고 강조했다.
테페라는 노예 무역에 참여한 국가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역사를 직면하기를 꺼려한다며 적절한 심판이 회복적 정의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국가 역사의 특정한 장을 골라 기억하지 않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