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 대학, 마오 비서의 일기 소유권 다툼 승리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생전의 리루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자료사진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이 스탠퍼드 대학교가 현대 중국의 창시자 마오쩌둥의 전 비서 리루이(李銳, 1918~2019)의 일기를 소장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고 영국 BBC가 1일 전했다.
재판부는 지난 31일(현지시간) 딸 리난양이 스탠퍼드 대학의 후버 연구소에 그가1938년부터 세상을 뜨기 일 년 전인 2018년까지 꼼꼼히 쓴 일기 등을 기부한 것이 합법적이며 부친의 뜻에 부합한다 고 판시했다. 기부 물품 중에는 서신, 회의록, 작업 노트, 시와 사진이 포함됐다.
후버 연구소 소장인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이날 판결이 현대 중국 역사에 관한 가장 가치 있는 1차 기록 중 하나가 무료로 연구될 수 있도록 보장한다 고 반겼다. 스탠퍼드 대학의 변호인단은 리루이가 중국 당국이 현대 역사 서술을 은폐하려 할 것임을 이해하고 자료가 파기될까 두려워 문서를 스탠퍼드에 넘긴 것 이라고 주장했다. 대학 측은 이 재판을 중국 정부의 검열에 맞선 싸움으로 간주하며 대학이 일기의 정당한 소유자이며 중국으로 반환될 경우 금지되거나 폐기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미국 법원은 이를 받아들인 셈이다.
딸이 2014년부터 기증, 의붓엄마는 돌려달라고 소송
딸 리난양은 2014년부터 부친의 일기를 스탠퍼드 대학에 기증했다. 나중에 따로 4년 치 일기를 대학에 넘겼다. 2019년 그녀는 BBC 차이니즈 인터뷰를 통해 일기 기증이 부친의 뜻을 따른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부친이 세상을 등진 뒤 의붓어머니 장위전은 일기 등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둘째 부인인 장위전은 생전의 남편이 문서 공개 여부를 자신에게 결정하도록 위임했다며 해당 문건들이 부당하게 스탠퍼드 대학에 넘어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또 일기에 매우 개인적이고 사적인 일 이 포함돼 있어 일기 공개가 개인적인 당혹감과 정신적 고통 을 안겨준다고 주장했다.
베이징 법원은 그녀의 손을 들어줘 일기를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이에 2019년 5월 스탠퍼드 대학은 리루이 문건에 대한 장위전의 주장을 철회해달라고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연방법원에 반대소송을 제기해 같은 해 8월 재판이 시작됐다.
스탠퍼드 대학의 변호인단은 생전의 리루이가 자신의 일기와 대화에서 자신의 역사적 문서들이 후버 연구소에 의해 보존되길 바란다고 아주 명확하게 밝혔다 고 주장했다. 우리는 법원의 결정에 매우 만족한다. 리루이의 뜻이 존중되고 이 중요한 자료들이 후버와 스탠퍼드에 남아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한 것이다.
BBC는 장위전을 대리하는 미국 변호사들에게 논평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리루이 일기 일부
마오와 시진핑 등 날선 비판, 당국이 일기 태워버릴까 걱정
리루이는 1930년대에 정의, 민주주의, 애국심 등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공산당에 입당했다. 1950년대 중반 마오쩌둥의 눈에 들었다. 늘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한 마오는 개인 비서 중 한 명으로 기용했다. 하지만 1959년 루산 회의에서 마오의 견해를 비판한 뒤 당에서 제명됐고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공산당의 주장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데 적잖이 실망하던 리루이는 1959년 대약진 혼란 때 슬퍼했고 분노했다. 펑더화이(彭德懷) 당시 국방부장과 함께 마오쩌둥이 주도해 농업과 공업의 대폭 증산을 시도한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면서 반당 분자로 몰려 당적을 박탈당하고 헤이룽장의 노동개조 농장으로 쫓겨났다. 1961년 노동개조에서 풀려났지만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8년 동안 투옥돼 또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그는 1976년 마오가 세상을 등지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재부상, 수력발전부와 핵심 직책에 인물을 배치하는 당 부서를 감독했다. 그는 개혁을 옹호하는 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파벌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원로로서 그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을 저학력자 라고 비판하거나 여러 지도자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으로 말년에 눈밖에 났다. 원로당원으로서 초대 받은 2017년 제19차 당대회에는 건강을 핑계로 불참해 시진핑 지도부에 간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홍콩 밍보(明報) 인터뷰를 통해 중국인은 개인숭배의 길로 흐르기 쉬운데 마오쩌둥에 이어 시진핑이 그 길을 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소리(VOA) 방송에 지금 시진핑은 더는 충언을 듣지 않는다”고 밝힌 일도 있었다.
그는 우리가 평생 추구했던 공산당을 잘못된 방향으로 따라갔던가” 하는 회의에 빠졌다. 그의 저작물은 검열됐고, 그의 책들은 출판이 금지됐다.
리루이는 2000년 들어 사후에 일기와 개인적인 메시지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할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일기를 당국이 태워버릴 것을 걱정했다. 그를 대신해 위험을 무릅쓴 사람은 딸 난양이었다. 딸은 감시의 눈을 피해 몰래 스탠퍼드대 후버 도서관에 상자 40개를 보내고 기증 서류를 작성했다.
일기 중 가장 유명한 날은 그가 1989년 톈안먼 광장이 내려다 보이는 발코니에서 학살을 목격했다고 적은 것이다. 그의 기록에는 영어로 Black Weekend (검은 주말)라고 표기돼 있다. 이 문제는 중국에서 입에 올릴 수 없는, 아주 민감한 사안이다.
그는 광장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군인들이 총격을 가하고, 장갑차가 시위대가 세운 바리케이드를 부수며, 광장 주변 건물을 향해 총격을 가한 군인들이 그가 있던 곳을 포함해 사격을 가했다고 묘사했다.
리루이는 실각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를 지지하면서 대학생의 민주화 시위에 선처를 호소했던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개혁파 논단잡지 ‘염황춘추’를 중심으로 민주화로 가는 정치제도 개혁의 필요성 등을 촉구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또 여러 차례 당 대회에 참석해 톈안먼 사건의 재평가를 공개 촉구하고 정치개혁을 통한 ‘헌정(憲政) 대실시’를 주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