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에 드리운 외환위기의 트라우마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홍종학 전 국회의원 · 중소벤처부 장관
1997년 11월 16일, 마른 체격에 하얀 백발, 날카로운 눈매와 엄격한 표정의 외국인이 마치 첩보작전을 수행하듯 극비리에 김포공항에 입국했다. 그는 가명을 쓰고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서울 힐튼 호텔 스위트룸으로 숨어들었다.
그날 밤 힐튼 호텔 밀실에서 벌어진 회동의 주인공이었던 그는 후에 한국경제의 저승사자로 알려진 미셸 캉드쉬 IMF 총재였다. 행여나 IMF 총재가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 시장이 더 큰 충격을 받을까봐 비밀리 입국한 그는 강경식 경제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를 앉혀두고, 한국의 비밀 외환 장부를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한국의 두 대표에게 일방적인 항복을 요구했다.
당신네 나라는 이미 파산 상태요.
그는 한국 경제의 주권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살인적인 고금리, 시장 완전 개방, 기업 구조조정… 그것은 사실상의 경제 신탁통치 문서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한국은 11월 21일 밤, 치욕스러운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그날 캉드쉬는 다시 은밀하게 한국을 빠져나갔다. 협상을 배후에서 지휘하던 캉드쉬는 12월 3일 오전 재입국하여 이번에는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그날 오후 한국 정부는 경제 주권을 내놓는 IMF 지원서에 공식 서명했다.
1997년 12월 3일 임창렬 경제부총리(중앙)와 이경식 한국은행총재(오른쪽)가 세종로 정부청사에서 캉드쉬 IMF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IMF긴급자금지원을 받기 위한 의향서에 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한국의 위기를 월가 기회로 삼은 혈맹
많은 이들은 1997년 12월 3일,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하던 날을 치욕의 시작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그보다 한 달 앞선 11월 초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와 강경식 경제팀은 곳간(외환보유고)이 비어가는 것을 알면서도, IMF행만은 피하고 싶었다. IMF에 가는 순간 고금리와 구조조정으로 민생이 파탄 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비밀 특사들을 파견했다. 목적지는 우리의 혈맹 미국과 가장 가까운 이웃 일본이었다.
도와주십시오. 일시적인 유동성 위기일 뿐입니다. 달러를 조금만 빌려주면 금방 갚겠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일 만큼 차가웠다. 믿었던 일본은 미국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당시 일본도 은행들의 대규모 부실을 처리하느라 국내 사정이 더 시급한 시기이기도 했다. 더 절망적인 것은 미국의 태도였다. 당시 클린턴 행정부와 월가의 대변자였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한국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불과 2년 전 멕시코의 페소화 위기에 대해서는 무제한 지원을 약속해 멕시코를 구했던 미국이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다른 기준을 내세웠다. 냉전이 끝난 시대, 미국에게 한국은 더 이상 무조건 지켜줘야 할 최전방 초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한국의 위기를 월가의 기회로 봤다.
한국을 도울 생각 없다. IMF로 가라.
미국은 한국의 자본 시장을 완전히 개방시킬 절호의 찬스라고 판단했다. 한국 관료들이 워싱턴의 복도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며 흘렸던 식은땀과 모멸감, 그것이 1997년 위기의 진짜 서막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기대를 했었던 혈맹 미국이었다. 그러나 우방은 없었다. 오직 국익을 위한 계산기만 존재했다.
한겨울에 돌반지 들고 나왔던 서민들의 처절한 몸부림
풍전등화의 순간에 한국 정부는 무기력하기만 했다. IMF 구제금융을 반대했던 강경식 부총리가 사의를 표명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19일 개각을 단행해서 임창렬 통상산업부 장관을 신임 경제부총리로 임명했다. 임 부총리는 취임 직후 기자회견에서 IMF에 안 가고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해서, 오히려 혼란을 더 키우기도 했다. 결국 취임한 지 이틀 만인 11월 21일 IMF 지원 신청을 발표하기 전까지에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구제금융을 받기로 했음에도 시장은 한국을 믿지 않았다. 환율은 12월 중순 달러당 2000원에 육박했고, 기업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 겨울은 춥기만 했다. 평생을 바쳐 일군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를 맞고, 가장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은행 창구에서는 달러가 없어 수입 신용장 개설이 거절당했고, 원자재를 들여오지 못한 공장은 멈춰 섰다. 추운 겨울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그대로 길거리에 나앉았고, 얼마나 더 떨어질 곳이 남았는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휘몰아쳤다. 사람들은 장롱 깊숙이 넣어둔 아이의 돌반지와 결혼 예물을 꺼내 들고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그것은 애국심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러다 나라가 정말 망해서 내 삶이 송두리째 파괴될지 모른다 는 공포에 질린 서민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외환위기 타개를 위한 범국민적인 金모으기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1998년 1월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국야쿠르트 빌딩에서 전국 주부교실 중앙회 소속 회원들이 각 가정에서 가지고 나온 금붙이를 접수시키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 시기 미국 정부는 한국 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리면 월가의 이익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 마지막까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결국 크리스마스이브, 미국 정부가 이제 한국 길들이기가 끝났다 고 판단한 듯 월가의 금융기관들과 함께 자금 지원을 승인하고 나서야 환율은 진정되었다. 대가는 참혹했다. 멀쩡했던 한국 기업들이 헐값으로 매각되었다. 매각되지 않은 기업들도 사상 최저 가격으로 떨어진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을 통해 외국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다시 약소국의 설움 강요하는 미국
그로부터 28년이 지난 2025년.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부유해졌다. 경상수지 흑자 1000억 달러라는 수치는 과거라면 상상도 못 할 풍요다. 그러나 환율은 1470원이라는 재앙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는 1997년의 트라우마가 낳은 2025년판 약소국의 비애 가 숨겨져 있다. 다시, 혈맹이라는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매년 200억 달러(약 28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을 미국에 투자하고, 그 이익금을 미국과 나누겠다는 일방적인 협정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관세를 인상해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산업을 마비시키겠다는 협박과 함께 내민, 마치 항복문서와 같은 협정문에 마지못해 동의한 이후 한국의 외환시장은 더욱 취약해졌다. 200억 달러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한국 기업들이 감당해야 하는 민간 투자비용까지 합치면 총액이 얼마가 될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적대국이라는 중국과는 오히려 대등한 협상을 벌이고 있고, 강대국인 유럽연합과는 적절한 수준에서 관세협상을 타결했음을 감안하면, 한국에 대한 대우는 혈맹이라는 수식어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과거에는 미국과 경제와 관련한 논의를 할 때는 국무부가 우호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이번에 국무부는 협상 내내 침묵을 지켰다. 상대적으로 만만한 캐나다, 멕시코, 일본, 한국에 대해서만 압박을 가하고 있는 미국의 자세는 우리로서는 납득할 수준을 넘어섰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이 부당한 요구를 침묵 속에 감내하고 있다. 1997년 11월, 워싱턴에서 문전박대 당했던 그 서러운 기억의 두려움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위기를 종식시킨 그 해 크리스마스의 선물을 기억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여 다시 위기가 닥친다면, 그래도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한 가닥 희망의 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관세 협상 당시에도 외환시장의 불안감을 완화해 줄 통화 스와프를 간곡히 요청했으나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약소국의 비애를 다시금 강요하는 미국의 고자세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이 9월 19일 워싱턴 D.C. 백악관 타원형 사무실(오벌 오피스)에서 도널드 J.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2025.9.19.EPA 연합뉴스
피땀 흘려 쌓은 방파제 뒤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국민들
1997년의 국가 부도 사태 이후, 대한민국은 다시는 같은 굴욕을 당하지 않겠다 며 뼈를 깎는 심정으로 시스템을 뜯어고쳤다. 재정경제부의 독단을 막기 위해 금융 감독 기능을 떼어내 금융위원회를 만들었고, 정부가 돈줄을 쥐고 흔들지 못하도록 한국은행을 독립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는 달러가 없어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겠다며 세계 최고 수준의 외환보유고를 피땀 흘려 쌓았고, 한국투자공사를 세워 막대한 외환을 운용중이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외환도 정부의 외환보유고를 넘어설 정도로 커졌다. 제도로만 보면 우리는 완벽한 방파제를 구축한 듯했다.
그러나 2025년 오늘, 그 견고해 보이던 방파제 뒤에서 서민들은 다시 1997년의 공포에 떨고 있다. 금고에 달러가 쌓여 있으면 무엇하는가. 환율 1470원이 지속되면서 수입 물가는 폭등하고, 외화 대출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상황이 이토록 엄중한데, 경제를 책임지는 관료들의 태도는 절망스러울 정도로 태평하다. 환율이 1470원에 고착화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정부가 내놓은 실질적인 대책은 전무하다. 기껏해야 시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는 앵무새 같은 발언뿐이다. 한 달이 지나서야 수출대기업과 증권사, 심지어 국민연금까지 찾아다니며 협조를 요청하고 있지만, 외환시장은 요지부동이다. 외환시장은 다시 한국 정부를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면 외환시장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그러는 사이 서민들의 삶은 1997년보다 더 팍팍해졌다. 시스템은 선진국이 되었는데, 왜 위기감은 그대로인가? 고환율이 유지되면 될수록 이는 물가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서민 경제에 큰 충격을 줄 것이다. 다시는 외환위기의 굴욕을 겪지 않겠다고 피눈물을 쏟으며 시도했던 제도 개혁은 과연 성과가 있는 것일까 ?
시스템 위 군림하며 28년 전 행태 반복하는 경제 관료들
안타깝게도 경제 관료들은 1997년 선배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환율이 치솟고 민생이 비명을 지르는데도, 그들은 닫힌 방 안에서 자기들만의 논리에 갇혀 있다. 외환보유고가 충분하니 문제없다 일시적인 현상이다 수출 대기업 실적이 좋으니 기다려라. 이 말들은 1997년 11월,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펀더멘털은 튼튼하다 고 국민을 속였던 당시 경제팀의 궤변과 소름 끼치도록 똑같다.
금융위를 만들고 한은을 독립시켰지만, 관료들은 여전히 정보를 독점하고 시장과의 소통을 거부한다. 한국은행은 이자율을 무리하게 내려, 외국과의 예대금리차를 장기간 유지하고 있어 외환시장 불안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지만,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환율은 마치 자신들의 일이 아닌 양 여전히 금리를 낮추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그들에게 1470원은 관리해야 할 지표 일 뿐이지만, 서민들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흉기 다. 이 간극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관료들의 엘리트주의적 오만함, 그리고 위기가 닥치면 책임은 회피하고 국민에게 고통 분담(금 모으기)만을 강요하는 그 낡은 습성이, 수천 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다. 서민들의 고통을 방치하면서 한국투자공사와 국민연금과 수출대기업과 서학개미가 외환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정상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시스템이 없어서 위기를 맞은 게 아니다. 그 시스템 위에 군림하는 관료들의 변하지 않는 영혼이 우리를 다시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우리는 1997년을 겪으며 뼈저리게 배웠다. 위기는 설마 하는 순간에 찾아오고, 혈맹이라 믿었던 국가들이 냉혹하게 등을 돌릴 때 폭발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 관료들이 문제없다 고 큰소리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