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노사 갈등이 드러낸 노동조합의 두 갈래 길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필자가 지난 4월 초, 시민언론 민들레에 초기업노조 삼성전자지부(이하 삼성전자 노조)의 임금 요구와 관련한 칼럼( 재벌 대기업 초과이윤 에 하청 노동자 몫은 없나”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410)을 쓴 이후 삼성전자 노동조합의 임금교섭을 둘러싼 사회적 관심이 뜨겁다. 삼성전자 노사는 2026년 임금교섭에서 성과급 산정 기준과 지급액 상한 문제 등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5월 총파업 강행을 언급하면서 천문학적 이윤 분배 논의는 삼성전자 노사 간 문제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첨예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필자는 삼성전자 노조의 요구를 보면서 자본주의 사회 노동조합의 양면성을 언급하고자 한다.
반도체 산업 전체 노동자 배제한 채 정규직 몫만 키우려 해
삼성전자 노동조합의 성과급 배분 요구에서 사회적 쟁점은 ‘노동조합의 요구가 어디까지 정당한가’라는 질문이다. 노동자·노동조합이 자신이 만든 성과에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글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임금은 자본이 일방적으로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노동자가 생산한 부가가치의 분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 요구가 전체 노동자의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는가, 아니면 특정 기업 내부 정규직 노동자의 몫을 더 키우는 방식으로만 제기되고 있는가에 있다.
지난 5월 8일 노동전문 매체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최승호 삼성전자 노조위원장은 삼성전자 사내하청·협력사 노동자의 임금 문제는 사측, 즉 자본에게 물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천문학적인 영업이익 중 사내하청·협력사 노동자의 몫에 대한 삼성전자 노조의 입장과 관점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삼성전자라는 재벌 대기업의 생산과 이윤은 수많은 사내하청·협력업체 노동자의 노동에 기반해 형성된다. 그렇다면 전체 반도체 산업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 안전을 책임져야 할 1차적 주체는 당연히 삼성전자 자본이다. 이 책임을 노조에게 먼저 묻는 방식은 자칫 자본의 책임을 희석시킬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삼성전자 대표교섭위원인 김형로 부사장(오른쪽 사진)과 최승호 초기업노조 삼성전자지부 위원장(왼쪽 사진)이 13일 새벽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중앙노동위원회에서 2026년 임금협약 체결을 위한 2차 사후조정이 결렬된 후 협상장을 각각 떠나고 있다. 2026.5.13
노조는 내부자의 이익집단인가, 정치적·사회적 주체인가
그럼에도 아쉬운 지점은 따로 있다. 삼성전자 노조가 정말 전체 반도체 산업 노동자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면 지금의 임금교섭 요구 내용은 달랐을 것이다.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만의 성과급 몫을 둘러싼 교섭을 넘어 ‘반도체 산업 생태계 전체의 부가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배분되어야 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성과급 배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현재 사회적 쟁점의 중심에는 노동조합에 색안경을 낀 보수언론의 선동을 고려하더라도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가 얼마를 더 받을 것인가’라는 질문만 선명하게 남아 있다.
노동조합에 대한 고전적 논의는 이 양면성을 오래전부터 지적해 왔다. 미국의 노동연구자인 프리먼(Freeman)과 메도프(Medoff)는 노동조합이 한편으로는 노동공급을 독점함으로써 조합원에게 독점적 지대를 가져다줄 수 있다고 보았다. 특정 기업, 특정 직종, 특정 숙련노동자 노동조합은 자신들의 교섭력을 이용해 더 높은 임금과 혜택을 확보할 수 있다. 이때 노동조합은 전체 노동자의 이익을 향한 조직이 아니라, 제한된 내부자의 이익집단으로 기능할 수 있다. 현재 삼성전자 노동조합의 얘기이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역할이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국의 노동연구자 하이만(Hyman)이 말했듯 노동조합은 단순한 임금교섭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계급, 시장, 사회 사이에서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조직하는 정치적·사회적 주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노동조합은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이익집단이 될 수도 있고,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이 될 수도 있다.
위로금 일부를 사회연대기금으로 낸 한국와이퍼분회의 경우
한국 사회에는 삼성전자 노조와는 다른 노동조합이 존재한다. 금속노조 시흥안산지역지회 한국와이퍼분회가 그 사례이다. 2018년에 결성된 한국와이퍼분회는 이미 2016년 통상임금 승소를 통해 지급받은 미지급 통상임금 중 5700만 원을 안산시 취약노동자 지원을 위한 사회연대기금으로 기부한 바 있다. 통상임금 승소 이전인 2015년에는 안산·시흥지역 미조직·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노동공제회인 ‘좋은 이웃’ 결성에 적극 결합하기도 했다. 나아가 2023년 8월 회사 청산과 집단해고의 충격 속에서도 한국와이퍼 조합원은 지급받은 퇴직금과 위로금에서 1인당 1000만 원을 갹출해 사회적 고용기금, 뚜벅이재단을 만들었다.
한국와이퍼 해고 노동자는 드라마 『미생』의 대사처럼 ‘회사 안은 전쟁터이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말을 지금 온몸으로 겪고 있다. 회사 안에서는 폭언과 모욕, 산업안전 문제, 고용불안이 반복되었지만 노동조합을 결성해 일자리를 지켜냈다. 하지만 집단해고 뒤에는 더 낮은 임금, 불안정한 일자리, 경력 단절, 사회적 고립을 마주해야 했다. 최근 집단해고 3년을 돌아본 조사에서도 한국와이퍼 노동자들은 재취업을 했더라도 이전보다 낮은 임금과 높은 노동강도, 산업안전 체계부재, 현장 노동자 멸시가 일상인 일자리에 취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한국와이퍼분회의 투쟁은 기존 정리해고 투쟁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공장 사수, 단식, 거리 투쟁, 일본 원정 투쟁 등 어찌 보면 극한적인 투쟁 양상은 유사했다. 하지만 이들은 패배 이후를 생각했다. 질 수밖에 없는 투쟁이었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더라도 싸움의 근거와 다시 시작할 있는 보루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한국와이퍼 분회장의 언급은 한국와이퍼 집단해고 반대 투쟁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들에게 노동조합은 단지 해고를 막기 위한 방패만이 아니었다. 고용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해고 이후 흩어진 노동자들이 기대고 모일 수 있는 조직적 토대를 남겨 다시 시작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뚜벅이재단이다.
2024년 6월 28일 안산시 단원구 와동 삼일로 449 3층에서 열린 뚜벅이재단 개소식에서 우원식 국회의장 등 내외빈이 떡케익 절단식을 하고 있다. 안산뉴스(http://www.ansannews.co.kr)
삼성전자 자본의 단기 이윤 극대화, 노조의 단기 임금 극대화
똑같은 노동조합인데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필자는 노동조합이 직면하는 자본의 경영형태와 관련된다는 점을 얘기하고 싶다.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인 2000년대 들어 한국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행태가 두드러졌다. 한국 자본주의 자본은 장기적 생산 기반이나 사회적·공적 책임보다 단기 수익 극대화, 주주가치 제고, 고수익 부문 집중을 우선시 해왔다. 이 과정에서 한국와이퍼 모회사인 덴소자본처럼 자본은 돈이 되는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부문은 과감히 버렸다.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SK하이닉스에 뒤처졌던 이유는 6년 전 고대역폭메모리가 당장은 돈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삼성전자 경영진의 냉혹한 회계적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고대역폭메모리 사업은 2020년 중단되었고 그 결과는 독자들이 지금까지 보고 있다.
‘관리의 삼성’이라는 표현도 이런 점에서 보면 재해석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오랫동안 인사 조직을 촘촘히 관리하면서 노동력을 선별해 왔고 40대 중반에 이른 불필요 노동자는 사실상 권고사직 형태로 해고해 왔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일해 왔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노동자의 한계도 드러난다. 삼성전자 자본이 단기 이윤 극대화의 논리로 움직였다면, 삼성전자 정규직 노동자의 요구 역시 단기 임금 극대화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자본은 ‘돈 되는 사업에 집중하겠다’고 말하고, 삼성전자 노동자는 ‘있을 때 더 많이 받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주체는 다르지만 사고는 유사하다. 이것이 노동자·노동조합이 자본을 닮아가는 순간이다. 노동조합이 자본의 언어를 빌려 자기 몫만 주장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사회적 연대의 언어가 아니다.
삼성전자는 누구 것이고, 그 성과는 어떻게 만들어졌나”라는 질문
1865년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 평의회에서 노동조합이 임금과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에 머무르는 한 그것은 결과에 대한 투쟁일 뿐이라고 보았다. 물론 결과에 대한 투쟁도 중요하다. 임금 인상, 성과급 확대, 노동조건 개선은 노동자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내는 원인에 개입하는 일이다. 누가 생산을 통제하는가, 누가 투자와 이윤, 임금 몫을 결정하는가, 누가 협력업체의 부품 단가와 노동조건을 결정하는가, 누가 위험을 외주화하고, 누가 성과를 독점하는가의 문제이다. 지역사회와 노동자 대표가 이사회에 참여하는 독일의 감독이사회에서부터 스웨덴의 임노동기금 설치 논쟁은 이러한 지점의 고민을 반영한 노동조합 요구의 결과였다.
삼성전자 노조의 임금 요구안에서 아쉬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만들어진 부가가치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만 묻고, 그 부가가치가 어떤 구조에서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배제되고 희생되는지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명예교수가 제기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지금 삼성전자 노조를 둘러싼 논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성과급 몫을 둘러싼 싸움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도체 산업의 공급망, 협력업체 단가 구조, 장시간 노동, 산업안전, 고용조정, 재벌 대기업 지배구조의 문제를 함께 묻지 않는다면 삼성전자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는 재벌 대기업 내 정규직의 분배투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 노조가 택해야 할 길은?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한국 사회 노동조합에는 두 얼굴이 있다. 하나는 자기 조합원의 몫을 극대화하는 노동조합이다. 그것은 정당하고 필요하지만, 그 안에 갇히면 협소한 내부자 집단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집단해고라는 노동자 고통을 지역사회 노동자 연대의 토대로 전환한 한국와이퍼분회이다. 뚜벅이재단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패배 속에서도 조직을 남겼고, 해고 이후에도 노동자의 삶을 붙들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만들고자 했으며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 노조의 성과급 요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명확하다. 노동조합이 성과의 더 큰 몫을 요구하는 조직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그 성과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바꾸고 전체 노동자의 이해를 반영해 달라고 요구하는 조직이 될 것인가. 한국 사회 노동조합의 미래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