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㊶] 가온찍기(中), 올바로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 맞붙은 땅이 하늘을 휘감아 돌고, 땅에 맞붙은 하늘이 땅을 휘감아 돌아간다. ‘ᄆᆞᆷ’이요, ‘웋’이다. 위아래가 한꼴로 오르내리는 ‘ᄀᆞᆷ(玄:§)’이다. 하늘땅이 한 둥글레요, 땅하늘이 한 둥글레다. 하늘에 든 땅이요, 땅에 든 하늘이다. 하늘은 비었고 땅은 모은 ‘몯’이다. 모두 모아 모둔 몸으로 ‘몯’이다. 다석은 지구(地球)를 ‘몯돌’이라 했다. 이 몯돌 속에(中) 불숨(核)이 들어 돈다. 그런 까닭으로 몯돌 겉에는 곰팡 난 것들이 산알로 자라서 푸른 숨을 쉰다. 본디 있는 그대로다. 온새미로다.
그런데 이 온새미로(하나)를 쪼개고 갈라서 하늘땅이 따로따로다. 하늘땅∞땅하늘이 아니라 하늘과 땅, 땅과 하늘이란다. ‘~과, ~와’를 넣어서 갈라친다. 사람도 너나가 아닌, 너와 나로 갈라쳐서 서로 죽이는 꼴이다. 서로는 홀로(하나)가 아니다. ‘서로서·로서로(相卽相入)’해야 홀로에 서로가 꽃핀다.
쪼개져 나눠진 하나는 ‘ᄒᆞᆫ’을 잃는다. 고픔이 파고든 사람 속도 뒤범벅으로 싸움질이다. 저조차 저를 쪼갰으니 ‘제나’가 판친다. 제나가 휘감는 안팎은 시커먼 어둠 속이다. 이쪽에 맞선 저쪽이 칼을 내리치고, 저쪽에 맞선 이쪽이 총을 들이댄다. 이쪽저쪽, 쪽꼴(相對)로 나뉜 것들은 서로를 죽인다. 죽이기를 쉬지 않는다.
붓다그리스도는 본디 ‘있다시 온(如來)’으로 늘 오가는 참올(眞理)을 세웠다. 늘 오간다. 오가는 자리란 오는 이도 없고 가는 이도 없는 자리다. 제자리다. 그런데 오간다. 그새 그뿐이다. 다석 류영모는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 오가며 저를 다 비우고 비워서 참(眞)을 이뤘고, 가득 비어 찬 빈탕에 소용돌이 일으켜 올(理) 하나를 붙잡았다. 그렇게 붙잡은 올 하나로 ‘한숨(一氣)’을 크게 쉬었다. 말씀에 숨비소리 말숨이 텄고, 말숨에 숨비소리 말슴이 섰다. 그런 숨비소리에 휘감긴 이들은 귓구멍으로 파고든 소용돌이에 휘감겨 제소리를 냈다. 함석헌이 그랬고, 김교신이 그랬으며, 김흥호, 이정호, 김정호, 송기득, 류달영, 박영호가 그랬다. 어디 그뿐이랴. ‘성서조선’ 길벗들은 물론이요, 동광원을 연 이현필을 비롯해 그곳에 모여든 여러 여성 언님들이 다 그랬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이가 남긴 소리에 휘감긴다.
가온찍기는 그이가 남긴 말씀-말숨-말슴”이 숨을 터 말아 올리는 소용돌이다. 그이는 말한다. 가온찍기 한복판에 ‘나’라는 점을 끝끝내 찍으라고. 그래야 가온찌기/가온지기라고. 가온찌기는 ‘없이 있는 나’로 늘 되돌리는 참이요, 올이다. 그 자리는 본디 ‘없이 계시는 님’의 자리다. 가온찍기는 ‘나=님’이 한꼴 되는 일이다. 그래야 나남없이 오롯하다. 느닷없는 허튼짓이다. 그러니 그 가온데는 참으로 일나는 자리다. 본디 있는 그대로를 되살리는 큰 일이다. 일을 내야 한다. 있는 그대로 ‘모신 하나님(侍天主)’이 깨어나도록 일내야 한다. 알았으니, 이제 일났다! 다석이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보아도 결국은 하나밖에 없다.”라고 하지 않았나!
[다석의 한글철학]에 가져다 쓴 노자 늙은이 풀이는 다석 류영모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져왔기에 띄어쓰기, 하늘아(), 이어쓰기를 그대로 두었다. 또한 이 글에 가져다 쓴 다석어록”은 1993년 홍익재에서 펴낸 『씨ᄋᆞᆯ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이 온통이다. 여기서 가져왔다.
열쇳말: 가온찍기(ᄀᆞᆫ) - 얼나 - 하늘아 - 커극(太極) - 줏대
그림1) 양산 비로암 탱화인 ‘칠성탱화’다. 1904년, 면에 채색, 153×170cm,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4호, 통도사. 민화와 불화가 뒤섞인 칠성도는 사람 목숨과 처지를 맡은 북두칠성을 검님(神)으로 나타낸 그림이다. 칠성신이 쥔 지물이나 구름 소용돌이는 글에서 그리고 있는 하늘이 내리는 사랑에 땅이 받아 올리는 사랑” 소용돌이를 떠올린다. 특히 화면 가온데 앉은 이는 흔들리지 않는 줏대이자 ‘속곧(忠)’을 엿보인다.
#1. 가온찍기(ᄀᆞᆫ): 땅하늘에 숨
맞울림
다석은 한글 글자꼴에서 하늘땅∞땅하늘이 휘감고 돌아가는 길을 읽어냈다. 한글 첫소리인 기윽(ㄱ)은 하늘 숨 바탈이 땅으로 내려오는 글꼴이며, 니은(ㄴ)은 땅 산알이 하늘로 머리 쳐들고 오르는 글꼴이다. 다석은 가고 가고 영원히 가고, 오고 오고 영원히 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가온찍기야말로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라고 했다. 이는 글꼴 모양새를 넘어, 우주 잘몬이 한꼴로 맞울리며 그리워하는 꼴이다. 사람 힘으로 이뤄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잡고 돌아가며 어우러지는 ‘커극(太極)’이 펼쳐낸 춤사위랄까. 가온찍기는 바로 이 하늘 내리는 사랑에 땅 받아 올리는 사랑으로 맞,어울림”을 이루는 소용돌이다. 크고 큰 소용돌이 한복판은 텅 비어 고요한 ‘숨빛’이다. 땅하늘이 붙어서 맞울리는 그 가온에 ‘있꼴’ 세우는 일이야말로 사람이 내야 하는 가장 큰 알맞이(哲學) 사건이다.
속 하나
가온찍기 이루는 꼭지는 ‘하늘아()’에 있다. ‘하늘아’는 쉬지 않는 ‘빛숨’이다. 빛숨에 숨빛이 난다. 옛한글 ‘하늘아’는 하늘 숨을 빗대어 만들었다. 이 점을 기윽니은이 돌아가는 ‘돎(卍)’ 가온데 곧 땅하늘이 돌아가는 가온(中)에 콕 찍어야 한다. 다석은 나의 정신은 내가 깨어나는 순간순간 나의 마음 한복판에 긋()을 찍는다. 긋()이다. 이 한 긋(點)이 나다.”라고 했다. 이것은 넓고 넓은 우주 속에 ‘나’라는 ‘있꼴(存在)’을 올바로 세우는 ‘님꼴(神聖)’ 선언이다. 그러므로 이 ‘긋’은 종이에 찍히는 자국 따위가 아니다. 내 몸이라는 땅에, 내 얼이라는 하늘이 열리어 사귀는 ‘모신 하나님(侍天主)’으로 깨어나는 일냄이다. 나가 가온찍기다. 가온찍기가 긋이다.”라는 말은 헛말이 아니다. 가온을 찍은 나는 비로소 참나로 숨을 돌린다. 그러면 ‘몸’이 ‘ᄆᆞᆷ’이 된다. 안팎 없는 하나로 땅하늘 바로 세우니 삶이 온통 한 벼리로 일어선다.
끝없
가온찍기는 때에 올라타는 ‘불숨’이다. 우리는 지난날에 매이고, 올 날을 걱정한다. 언제나 ‘이제’를 놓치며 살아간다. ‘이제살이’는 늘 지금 그대로 ‘난꼴(現存)’을 비추지만 눈길은 이 꼴에 꽂히지 않는다. 가온찍기는 가고 오고 오가는 한복판 ‘지금 여기’를 탁 찍고 들어가 숨돌리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참올(眞理)을 깨닫는 찰나다. 쏜 살에 올라타는 일이다. 쏜 살이다. 쏜살같아야 한다. 멈추지 않는 늘길로 산숨을 짓고 일으키는 가온에 서는 일이다. 이 찰나를 보라. 가온찌기로 살아가는 오늘살이는 늘로 이어져 하늘땅을 잇는다. 이제 모신 하나님이 바로 나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바퀴 축이 뒤집어진다. 새 축이 열린다. 그 자리가 하늘나라다. 그 자리가 니르바나다. 다석은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점(點)의 가온찍기다. 그것은 연속되는 것이 아니다.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다.”라고. 또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긴 세상이라도 ‘이제’이다. 가온찍기이다.”라면서 이 상대 세계서 축(軸)과 같은 것이 나다. 한아님이 보내신 얼의 나다.”라고 했다.
줏대
가온찍기는 한 번 찍고 마는 일이 아니다. 나날이 깨어서 나날로 가온찌기 살아야 한다. 속알 불숨이 몯돌 지구를 살아가게 하듯이 말이다. 쉬지 않아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 바로 그때를 이어서 잇고 이어야 한다. 아주 치열하게 어수룩해야 이쪽저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사는 나날은 언제나 남고 줄고 더하고 덜하며, 나 너 우리를 갈라치기 한다. 갈라친 자리마다 저를 높이고 저를 세우고 저를 기린다. 우쭐거리는 꼴이다. 그러니 가온뎃자리에 바로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석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꼴을 ‘속곧’이라 했다. 다석이 말하길 충(忠)은 마음(心)의 가운(中)데를 잡는 것이요, 정(貞)은 한아님께로 곧장(곧이) 서는 것이다.”라고 했다. 속알을 곧이 곧장 곧게 ‘고디(貞)’로 서는 알짬 줏대다. 가온찍기는 세찬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거센 폭풍우에도 고요한 태풍 눈처럼 고른 마음을 지킨다. ‘알음앓이’로 열맺는 속알은 낮힘이 아주 세다. 마음을 든든히 떠받치는 밑둥이다.
움쑥불쑥
가온찍기는 살아 움직이는 숨결이다. 다석 알맞이에서 가온은 ‘숨돎’이 짓고 일어나는 첫비롯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쑥’, 땅에서 솟구치는 ‘움쑥’이 가온데로 어울려 두루 됨짓(造化)을 이루는 커극(太極)이다. 움쑥에 불쑥이요, 불쑥에 움쑥이다. 그 가온에 찍어야 참나로 숨 쉰다. 숨통은 거룩한 숨인 ‘얼숨’이 드나든다. 참(眞)으로 올(理) 바른 것이 참올(眞理)이다. 사람은 시원하고 통쾌한 정신줄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 정신줄이 하늘에 닿는 올이다. 올에 얼숨이 있고 가온이 있다. 이 가온찍기 올숨으로 뚫린 우리는 ‘제나’ 껍질을 깨고, 우주로 하나 되는 ‘온통’이 된다. 가온은 잘몬이 비롯하는 곳이자 잘몬이 돌아가 쉴 곳이다. 내 마음속 가온을 찍는 찰나, 우리는 비로소 우주만큼 커지는 몸으로 아름다워 지리라. 그래서 다석은 마음을 꼭꼭 잡아서 그 바탕을 기름이 하늘을 섬기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림2) 우리가 흔히 ‘이콘(Icon)’이라고 부르는 나무판 위에 그려진 성화 중 가장 오래된 이집트 시나이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 소장된 ‘전능하신 그리스도(Christ Pantocrator)’다. 6세기경(비잔틴 제국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그려졌다. 뜨거운 밀랍에 안료를 섞어 그리는 ‘엔코스틱(Encaustic, 밀랍화)’ 기법으로 그렸는데 8~9세기 성상 파괴 시기에도 시나이산이 고립된 지역이라 덕분에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예수 얼굴 왼쪽 오른쪽이 다르다. ‘검님 바탈(神性)’과 ‘사람 바탈(人性)’을 한 얼굴에 담아낸 것으로 풀이된다. 이후 수많은 예수 이콘의 표준이 되었다.
#2. 얼나: 가온에 솟는 참나
산알
우리는 흔히 몸뚱이와 고픔(欲)은 저절로여서 바로 그게 ‘나’라고 여기며 산다. 다석은 이를 ‘좀나(小我)’라 했고, 제자 박영호는 ‘제나’로 고쳐 불렀다. ‘좀나’는 저를 쪼깬 쪽꼴(相對)이요, 저만 아는 놈이니 제나다. 좀나를 깨야 ‘큰나(大我)’다. 큰나는 참 ‘밑꼴(本體)’이요, 하늘이 내린 홀씨(獨生子)다. 제나는 스스로 싸우는 외고집이며, 칼을 품고 나선 억지다. 가온찍기는 바로 이 제나라는 외고집 ‘갇옷(囚衣)’을 벗는 일이다. 갇옷을 벗지 않고서는 뛰넘어 선 자리에 설 수 없다. 넘어야 너머가 제자리다. 제나를 벗고 넘어야 비로소 환하게 드러나는 ‘얼나’다. 다석은 그래서 ‘솟나’라고 했다. 썩어 없어질 몸뚱이를 이겨내고 위로, 속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산알로 ‘늘길’을 타야 하기 때문이다. 제나가 한 번 죽여야만 얼나가 비로소 숨을 쉰다. 속이 뒤집혀 거듭난다. 다석은 거짓 나인 자아(自我)로는 죽고 참나인 신으로 솟나자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ᄋᆞ
가온에 찍은 ‘하늘아’라는 점은 씨알이다. 씨알이 산알이다. 이 씨알이 터져서 솟나는 이가 얼나다. 늙은이(老子) 9월에 일을 이루고, 이름이 나게 돼선, 몸을 빼, 믈러나는 것이 하늘 가는 길.”이라 했다. 글쓴이는 그것을 풀면서 깨는 것, 이것이 하나거든. 한(天) 나(吾)가 하나지. 하늘 솟은 나, 그 으뜸 첫 사람으로 살아야 참삶의 내가 똑발라.”라고 했다. 여기서 ‘한 나’는 숫자 1이 아니라 ‘커다란 나’, ‘하나인 나’로 ‘한ᄋᆞ’를 뜻한다. 가온에 하늘 점을 찍고 그 점과 내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땅에 속한 짐승 꼴을 벗어나 하늘에 속한 ‘얼꼴’로 거듭난다. 이 ‘한ᄋᆞ’야말로 우주 산알로 난 씨알이며, 모든 어지러움을 다스리는 님이다. 다석은 하늘과 내가 하나이다. 한(天) 나(我)가 하나이다.”라고 했다.
하늘길
얼나는 좁은 몸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얼나는 안팎 없는 한울(우주), 즉 ‘빈탕한데’로 뚫린 길을 오가는 ‘없꼴(無形)’이다. 늙은이 4월에 길은 뚤렷 ᄒᆞㅣ, 씨우오라”라고 했다. 그것은 마음속 옴(가온)으로 솟는 빟 참나”다. 여기서 ‘빟’는 빈탕이요, 가온찍기요, 커극(太極)이다. 가온이 뚫리어 열리면, 우리 마음은 빈탕처럼 맑고 시원해진다. 이 텅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이 하느님 얼이다. 얼나는 이 ‘빈탕’이라는 하늘길을 타고 오르고 또 내리는 ‘없꼴’이다. 가멸고 높고 반짝이는 낮은 언덕이 아니라, ‘없이 계신 님’이라는 높오름으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뫼를 올랐다가 굴러떨어지는 죄 짐이 없다. 오롯한 얼이다. 그렇다고 날아오른 자리가 저 우주는 아니다. 바로 이 자리다. 여기 이 자리! ‘없꼴’로 바로 선 지금이다! 신앙은 올라가는 것이다. 위로 자꾸 올라가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다석은 외쳤다.
늘길
얼나는 흐리멍덩한 ‘헛꼴(幻相)’이 아니다. 알밤처럼 단단하게 여문 ‘늘꼴(實體)’이다. 늘꼴은 늘을 타고 가면서 산알로 바뀌고 씨알로 뒤바뀌는 바탕 꼴이다. 안 바뀌어 굳은 게 아닌, 바뀌며 살아가는 산꼴(生物)이다. 다석은 이를 ‘야믊(妙)’이라 했다. 늙은이 1월에 ‘묘(妙)’를 풀어 그리 말했다. 늘 ᄒᆞ고ᄌᆞᆸ 없에 그 야믊이 뵈고, 늘 ᄒᆞ고ᄌᆞᆸ 있어 그 도라감이 뵈와라.”라고 했다. ‘야믊’은 저절로 뵈니 보이는 꼴이다.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제나가 일으키는 고픔을 끊어낼 때, 우리 속은 알짬(精)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렇게 야물 대로 야물어 터진 산알이 바로 얼나다. 이 얼나는 쏜살같이 지나가는 때에 휘둘리지 않는다. 이제 여기로 이어도는 길인 ‘늘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죽음조차 어쩌지 못하는 산알 알맹이가 내 속에서 빛나고 있다. 다석이 참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것은 죽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일없
얼나 자리는 ‘나’라는 이름조차 ‘일없’는 자리다. 한 마디로 일없다. 일없는 자리가 얼나다. 늙은이는 63월에 ᄒᆞᆷ없 ᄒᆞᆷ. 일없 일. 맛없 맛.”이라 했다. ‘함없’에 함이 있고, ‘일없’에 일이 있고, ‘맛없’에 맛이 있다. 그래야 저절로다. 또 4월에는 나는 기 누구 아ᄃᆞᆯ인줄 몰라.”라고 했다. 풀면 없이 있는 그이가 나는 누구 아들인지 몰라”다. 얼나는 하느님 씨알(홀씨)이자 ‘없꼴님’이고, 그 스스로 하느님에로 솟아난 꼴이다. 일을 이루고 나면 깨끗이 잊고 몸을 빼서 물러나는 것이 하늘길 가는 모양새다. 내가 했다는 생각조차 지워버리고, 오직 ‘없이 계신 님’ 쓰임에 그쳐야 한다. 이름도 꼴도 없이, 텅 빈 하늘처럼 빈탕으로 있으면서 세상에 깃드는 것, 그것이 바로 가온찍기가 다다른 신바람이요, 맨꼭대기다. 다석은 참으로 하는 것은 하는 것이 없다. 함이 없는 함이라야 참이다.”라고 했다.
그림3) 별이 숨을 거두면서 마지막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허블 우주망원경으로 포착됐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과 유럽우주국(ESA)은 2015년 7월 31일 허블 우주망원경이 포착한 ‘행성상 성운’ NGC 6565의 모습을 공개했다. 행성상 성운은 늙은 적색 거성이 붕괴하기 직전에 엄청난 크기로 팽창하면서 내뿜은 가스가 이온화돼 빛나는 것으로, 이름과는 달리 행성과는 무관하다.
#3. 하늘아 : 한웋님 씨알
비로소
다석 류영모는 한글 홀소리(가운뎃소리)가 하늘땅사람(天地人)을 본뜬 것임을 힘주었다. 세종이 그리 만들었고 ‘훈민정음해례본’에도 그리 밝혔다. 그중에서도 점 하나로 나타내는 ‘하늘아’는 바로 하늘 숨을 뜻한다. 이는 글자 한 획이 아니라, 온 우주를 품고 있는 아주 작지만 가장 큰 씨알이다. 늙은이는 1월에 하늘 땅이 비롯고,”라고 했다. 비롯할 시(始)를 ‘비롯고’라 하였다. ‘비롯고’에는 어떤 뜻이 들어 있을까? 비는 빔(虛), 롯(로)은 땅 웋 흐르는 흘(流), 롯고(ㅅ고)는 땅 아래에서 솟고 위에서 내리는 ‘솟남(生)’이다. 하늘땅은 비었으나 쉬지 않고 흐르며 나날이 솟난다. 우리말 ‘비로소’는 여기서 나왔다. ‘비’는 모든 씨알이 솟나는 첫 뿌리다. 아니, 온갖 것들의 밑바탈(本性)이다. 이를만 ᄒᆞᆫ 이름이 늘이름 아니오라”라고 했듯이, 이를 수 없는 ‘길’이 세상에 제 꼴을 드러낼 때 찍히는 첫 자취가 바로 ‘하늘아’다. 다석은 영원한 생명이 시간 속으로 터져나온 한 순간이 이 긋이다.”라고 했다. 비로소다. 너나도 비로솟이니, ‘비’가 너나를 이루는 밑이요, 뿌리요, 바탈이다.
빟
가온찍기를 이루는 아주 종요로운 꼭지는 ‘빈탕한데’ 가온에 하늘아를 콕 박아 찍는 것이다. 글로도 그렇고 말로도 그렇다. 그런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요 무슨 뜻일까? ‘빈탕한데’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 있는 줄 알아야 그 ‘가온(中)’이 뵈지 않겠는가? 속눈을 떠 마음 우주를 그려보라. 넓게 넓게, 끝없이, 가없이, 크게 크게 더 크게, 까마득히 드넓은 우주에 반짝이는 별들을 그려보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빛들로 시원시원하게 펼쳐진 이 끝없는 우주가 살아있음을 느껴보라. 그 마음 우주가 툭 터져서, 몸 안팎을 다 열고 한가지로 숨 쉬는 이 놀라운 빛숨(본디부터 늘 있어 온 숨), 환빛(한 번도 꺼지지 않은 빛), 숨빛(나고 낳고 되기로 깜빡이는 숨)을 느껴보라. 다석은 이를 가리켜 ‘빟’라 하였다. ‘빟’는 빔이요 빈탕이며, 그 빈탕 한가온데가 숨 돌리는 가온찍기다. 이 한 긋, 한 점이 ‘없극(無極)’에 불쑥 움직여 움쑥 고요한 커극(太極)이다. 다석은 커극이 도는 마음을 ‘ᄆᆞᆷ’이라 했다. 율려(律呂)로 솟는 ‘려(呂)’와 한꼴이다. 한 가온에 숨돌리고 있는 하늘아를 보라!
하늘아
‘하늘아’는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나날로 ‘속알’ 채우는 단단한 알갱이다. ‘묘(妙)’를 풀어 ‘야믊’이라 했다. ‘묘’는 야물어 가는 ‘그새’다. 그새 야물고 여문다. ‘그새’는 볼 수 없는 사이다. ‘그새’는 하늘아 ᄆᆞᆷ 가온에 찍혀서 영글어 가는 ‘꼴짓(狀態)’이다. 고픔이라는 껍데기를 벗겨내면 뽀얀 쌀알 같은 ‘알짬(精)’이 남는데, 이 알짬 숨이 ‘하늘아’다. 다석은 그러므로 곧이 곧장 오르고 또 올라 내 속에 있는 곧이(神貞)를 살려내어 내 속에 있는 ‘·’, 내 속에 가장 옹근 속알(蕊)이 있는 것을 자각하여 깨닫고 나오는 ‘·’가 가장 소중하다.”라고 했다. 이 점 하나가 야무지게 박혀 있을 때 사람은 비로소 헛된 꾐에 흔들리지 않는 ‘속곧’이 바로 선다. 다석은 지저분한 것이 도무지 없는 가운데의 가운데, 속의 속을 충(忠)이라고 한다.”고 했다. 가온마음(忠)에 곧이 선 날벼락 ‘ㅣ’가 마음(心)에 번개로 내리칠 때 터지는 숨이다. 하늘아를 받아서 옛이응 글꼴이 태어났다.
숨돎
한글 만듦새에서 ‘하늘아’는 빛(陽) 그늘(陰)로 내리오르는 터가 된다. 다석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윽(ㄱ)과 땅에서 솟구치는 니은(ㄴ) 사이, 그 가온에 ‘하늘아’를 두어 하늘땅사람이 하나로 뚫리는 길을 열었다. 이는 우리 몸 안에 ‘숨돎’이 일어나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늘 숨(天氣)을 받아들이고 땅 숨(地氣)을 밀어 올리는 그 숨짓에 ‘하늘아’가 있다. 우리가 이 짓을 알아차리고 숨 쉴 때, 그것은 나날살이 다스림을 뛰넘어 하늘땅으로 곧장 이어지는 ‘말숨’이자 ‘얼숨’이 된다. 다석은 말숨(말씀)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숨 쉼은 영원을 사는 것이다.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요, 말숨이 곧 한아님이기도 하다. 말숨(말씀) 쉬는 것이 한아님을 믿는 것이요, 한아님을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님
‘하늘아’는 우리 안에 모신 하느님 얼굴이다. 늙은이 4월에 맑안 ᄒᆞ이, 아마 있지 ᄅᆞ.”라고 하였다. 글쓴이는 그 말을 풀면서 하늘 달그림자로 뜬 물그림자는 깊이가 없다네. 하나로, 바닥없이 뚫린 밑을 건너 ‘없극(無極)’으로 돌아가는 그림자라네. 그러니 그림자가 어디 있고 달이 또한 어디 있나? 저 둥근 달빛은 해그늘의 실체일 뿐 그 또한 보이지 않는다네. 없이 있는 님 그림자가 달빛으로 오셨으니 저 달빛의 물그림자는 또 어디에 있나?”라고 했다. 그 빛이 우리 마음 가온에 떨어져 맺힌 자리가 바로 ‘하늘아’다. 다석은 나는 없이 있는 하나의 점이요, 긋이다.”라고 했다. 이 점을 찍는 짓은 속에 하늘 뜻을 바로 세우겠다”라는 세찬 다짐이며, ‘시천주(侍天主)’를 펼치는 일이다. ‘하늘아’는 꼴도 이름도 없지만, 모든 꼴과 이름을 내고 낳는 바탕이지 않은가. 이 거룩한 점 하나를 마음 가온에 정성껏 모실 때, 우리는 비로소 제나의 굴레를 벗고 ‘늘길’로 올라타게 된다.
그림4)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강서대묘’다. 정방형 천장석에 황룡이 그려져 있다. 천장석 네 모서리에 연꽃이 그려져 있다. 천장석을 받치고 있는 삼각 고임돌 네 옆면에는 날개과 꼬리를 휘날리는 서조 등이 그려져 있고, 그 삼각 고임돌 아랫면에는 화려하게 핀 연꽃과 인동이 그려져 있다. ‘빔에 도는 숨’으로 ‘커극’을 꿍꿍할 수 있는 세계관이 여기 있다. 기윽니은이 휘돌아 오르며 하늘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4. 커극: 빔에 도는 숨
움
다석은 우주 본바탕인 ‘없극(無極)’까지 가야 알맞이 끝이라 했다. 눈길 딱 맞추고 걷는 길이겠으나, ‘없극’은 때도 아니고 곳도 아니고 끝에 다다른 마지막도 아니다. 어디 있는 데가 아니다. ‘맨꼭대기’에 붙은 ‘맨’이 그 자리다! 지금 여기를 뛰넘어야 뵈는 자리요, 서슬 퍼런 긋이요, 빛으로 뻥 뚫린 ‘ᄆᆞᆷ’이다. 늙은이가 ‘이(夷)’라 한 것을 다석은 ‘맨’으로 풀었다. 53월에 쓴 대도심이(大道甚夷)”를 큰길은 넘으도 맨이지만,”이라 했다. ‘맨’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바탕이나, 그 자리는 움쑥에 고요 불쑥에 움직, 그렇게 일렁이는 자리다. 한 마디로 궁궁을을(弓弓乙乙)이다. 맨은 궁궁이니 ‘없극’이요, 그 자리가 움직∞고요로 오르내리며 을을하니 ‘커극(太極)’이다. ‘없극’ 맨자리에 ‘커극’이 일렁인다. 그렇다고 불쑥 움직여 움쑥 고요로 돌아가는 그 자리가 나뉜 것은 아니다. 하나다. 다석은 허무(虛無)는 무극(無極)이요, 고유(固有)는 태극(太極)이다. 태극 무극은 하나라, 하나는 신(神)이다. 유(有)의 태극을 생각하면 무(無)의 무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다.”라고 했다. ‘없극’이 일렁여 ‘커극’일 뿐 ‘커극’은 결코 ‘없극’에서 쪼개지지 않는다. ‘없극’ 가온에 하늘아를 찍어 궁궁을을로 숨돌리는 그것이 ‘커극’이다. 아주 크게 빙빙 돌아가는 속 빈 굴대(回轉軸)랄까! 몸에 ‘ᄆᆞᆷ’이 열렸다. 비로소 몸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된 ‘동이열전(東夷列傳)’은 이렇다.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후한(後漢)시대 허신(許愼, 58년 무렵~147년 무렵)이 펴낸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이(夷)는 평야. 종대종궁. 동방지인야.(平也. 从大从弓. 東方之人也.)”로 적었다. 이때 평(平)은 ‘고름’(平平)보다는 ‘바로잡음’(平定)의 뜻에 가깝다. 풀면 어지러움을 바로잡는다. 큼을 따르고 활을 따른다. 동쪽 사람이다.” 그런 뜻이다.
허신은 주(注)를 덧붙였다. 무릇 사람은 그가 사는 땅의 성질을 닮는다. 오직 동이만이 큼을 따랐으니 큰사람(大人)이다. 동이 풍속은 어질고, 어진이가 오래 살며,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다.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 큰 그림은 사람 꼴을 본땄다. 이(夷) 옛 글씨는 대(大)와 같다. 즉 하(夏)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다.”(葢在坤地頗有順理之性. 惟東夷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 大象人形而夷篆從大. 則與夏不殊. 夏者,中國之人也.)
위 글에서 ‘중국’은 황하 유역을 가리킬 뿐 나라이름이 아니다. 중국, 경사야(中國, 京師也)”라 했듯이 수도를 말하기도 하고, 또 중원을 차지한 나라를 뜻하기도 했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라는 뜻은 하나라가 중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주(周)나라부터는 황하(黃河)에서 ‘하’, 낙양(洛陽)에서 ‘낙’을 딴 ‘하락’(河洛) 지역을 중원의 중심으로 보았다. 신해혁명 뒤 1912년에 한, 만, 몽, 장, 회족 다섯 민족을 하나로 묶어 ‘중화’(中華)라 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은 처음으로 나라이름이 되었다.
빛숨
커극(太極)은 굳어 죽은 그림꼴(圖形) 따위가 아니다. ☯ 이런 그림은 그저 그림일 따름이다. 커극은 한 마디로 ‘숨돎(氣運)’이다. 산 것들은 모두 숨을 쉰다. 숨을 쉬면서 살아간다. 삶은 곧 숨돌리는 일이다. 몯돌(地球)도 숨 쉰다. 해도 달도 수많은 별도 다 숨 쉰다. 우주 빈탕은 온통 반짝이는 숨빛이요, 빛숨이다. 빛숨에 숨이요, 숨빛에 숨이다. 온통 숨이다. 이 숨이 기(氣)다. 나타나 뵈니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있다. 나타나 뵈지 않아 볼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있없’ 한꼴로 돌아가는 숨이 ‘커극’이다. 늙은이는 4월에 기잎음이여, 잘몬의 마루 같고나. 그 날칼옴 무디고, 그 얼킴 플리고, 그 빛에 타브ᅟᅥᆫ지고, 그 티끌에 한데드오라. 맑안 ᄒᆞ이, 아마 있지 ᄅᆞ.”라고 하면서 나는 기 누구 아ᄃᆞᆯ인줄 몰라. 하웋님 계 먼저 그ㅓ려짐.”이라 하였다(작은 글씨는 뺌). 하웋님 계 먼저 그려지는 바로 그곳, 그 자리에 오롯이 찍어야 한다. 가온찍기! 그 자리가 ‘커극’ 자리다. 깊은 마음 속, 속에 속으로 파고들어 하늘아를 찍어야 큰 숨이 돌아간다. 하늘 숨 땅 숨이 한꼴로 사람 속에 숨을 돌린다. 다석은 이를 ‘빟’라 했다. ‘빟님’이시다. 다석은 참빗은 생명의 빛이요, 성령(숨)의 빛이다. 곧 숨빛이다. 빛과 빚과 빗은 다같은 말이며 다 다른 말이다. 빛에서 빚이 나오고 빚에서 빗이 나온다. 빗이 있는데 빚을 덜게 되고 빚을 덜게 될 때 빛이 비친다.”라고 했다. 막힌 산알 길이 환히 뚫려서 환빛으로 밝게 돌아간다.
바탈
커극이 움쑥불쑥하며 휘돌아가는 바탈(性)은 한글 글자꼴 기윽(ㄱ) 니은(ㄴ) 한꼴 맺음에서 아주 밝게 드러난다. 하늘 숨(一氣) 돌아내리는 기윽에 땅 숨(一氣) 돌아 오르는 니은이 가온을 그리며 동그랗게 휘감길 때, 그 휘돎과 됨짓(造化) 속에서 온갖 산알이 되살아난다. 이는 맞숨다섯돎(二氣五行) 알짬이 하나로 야물어(妙合) 땅하늘 위아래를 밀썰며 내고 낳는 겪이다. 커극은 돌다가 멈추고 울렁이다가 그치는 바탈이 아니다. 끊임없이 내고 낳는 바탈이요, 바뀌고 뒤바뀌면서 되고 이루는 산알 불숨이다. 이 불숨은 꺼지지 않고 줄어들지 않으며 그치지 않는다. 커극이 내고 낳고 되고 이루는 싱싱한 숨빛으로 별들은 나날을 이어간다. 너도나도 우리 모두도 그렇다. 온갖 잘몬들이 그렇고 온갖 산 것들이 다 그렇다. 다석은 이렇게 말했다. 생각은 우리의 바탈(性)이다. 생각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하늘에 다다른다. 생각처럼 감사한 것은 없다. 생각이라는 바탈(性)을 태우려면 미움을 놓아야 하고, 마음이 놓이려면 몸이 성해야 한다. 바탈은 생각이 밑천이 되어 자기의 정신을 불사르는 예술의 세계이다. 몸성해 참되고, 마음놓여 착하고, 바탈(性) 태워 아름답다. 몸 성히, 맘 놓이, 바탈 태워가 되어야 한다. 나무의 불을 사르듯이 자기의 정신이 활활 불타올라야 한다.”라고.
소용돌이
억지 부리는 사람들이 불러내고 쏟아내고 가로채는 ‘고픔’과 ‘시픔(싶음)’은 커극 흐름을 틀어막고 끊어 막고 죽여 막는다. 헤살을 놓아 못 돌아가게 해친다. 커극은 돌돌 돌아가는 밝돌(妙門)이어서 그 움직임에 까닭이 없다. 그것은 오롯이 저절로다. 저절로에 무슨 까닭 따위가 있겠는가? 까마득히 돌아가는 지금 여기 늘길이 바로 밝돌이요, ‘있없’ 하나 한꼴로 감아 돌아가면서 내고 낳는 길이 또한 밝돌이다. 커극에 가온이 제대로 움직여 돌아가면, 내 뜻대로 하려는 억지는 사라지고 집집 우주 올이 바로 선다. 다석은 이는 내 뜻이 없어지고(無意), 내 고집이 없어지고(無固), 나라는 것이 없어지고(無我), 반드시가 없어진(無必) 세계다. 진리와 나가 하나가 되는 세계다.”라고 했다. 가온에 참(眞)이 올바로다. 이를 참올(眞理)이라 한다. 속에 속으로 숨돌리는 한 가온 자리로 속눈을 떠보라. 텅 비어 가득한 참 하나로 용오름이 크게 돌아가는 올이 보이는가. 숨이 보이는가. 올에 숨이 싱싱하고, 숨에 올이 밝으니 올숨(理氣)이 한 소용돌이 아닌가.
이제
커극은 앞뒤 없는 때를 ‘이제 여기’라는 한 점으로 휘감아서 올리고 내리는 바늘 끝 힘이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서슬 때를 잡아타서 늘로 이어지게 하는 늘길이 커극에서 샘솟는다. 가온에 커극 굴대로 뚫어 세운 사람은 결코 때에 쫓기지 않는다. 언제나 이제 여기요, 언제나 서슬 때요, 언제나 늘길이다. 다석은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 사이에서 ‘이제 여기’라는 것이 접촉하고 있을 뿐이다. 지나가는 그 한 점 그것이 ‘이제 여기’인 것이다. [...] 그러니까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긴 세상이라도 ‘이제’이다.”라고 했다. 매 찰나 그새 없이 돌아가는 커극 굴대 속은 늘 새롭고 늘 빛나기 때문이다. 빈탕은 반짝반짝 번쩍번쩍 빛나는 빛숨으로 홀황(惚恍)이다. 늙은이 노자는 21월(章)에 컴ᄒᆞ고, 환ᄒᆞᆫ데. 그 ᄀᆞᆫᄃᆞㅣ 그ㅓ림이 있. 환ᄒᆞ고, 컴ᄒᆞᆫ데. 그 ᄀᆞᆫᄃᆞㅣ 몬이 있.”이라 했다. 큰 속알의 얼골은, 오직 길, 밭삭 따름.”이라면서. 가온데 그림이 있고, 가온데 몬이 있고, 가온데 알짬이 있고, 가온데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이 떠나가지 않으니 ‘뭇비롯(衆甫)’을 본다. 커극은 본디 비었으나 품지 않은 게 없고 눈에 안 보이나 다스리지 않는 게 없는, 없이 계시는 손길이다.
그림5) 고구려 고분벽화 가운데 ‘강서중묘’ 앞방 천장 그림이다. 한 가운데에 연꽃이 피어 있다. 옛사람들이 꿍궁한 하늘과 죽은 뒤 돌아갈 세계를 살필 수 있다. 그런데 글쓴이는 이 그림에서 옛사람이 마음에 새겼던 줏대와 꼿꼿한 고디를 엿본다. 줏대나 고디는 이렇듯 브들므릇한 것이다.
#5. 줏대: 꼿꼿한 고디
올바로
우리는 늘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놓고 흔들린다. 이쪽을 잡으면 더 남을까, 저쪽을 잡으면 덜 남을까, 게다가 내 편이냐 네 편이냐를 따지면서 마음은 갈지자(之)로 굽이친다. 한마디로 ‘치우침’이다. ‘줏대’는 이쪽저쪽 가르지 않고 흔들림을 바로잡는 얼 기둥이다. 이쪽저쪽 가르지 않으니 ‘똑바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 곧이 곧장으로 날 선 줏대는 ‘똑바로’조차 뛰넘어야 한다. 그러면 올바로다. 굽어 곧아도 ‘올바로’요, 똑바로 곧아도 ‘올바로’다. 올이 올발라야 ‘고디(貞)’다. 올은 브들므릇하다. 다석은 정(貞)은 곧이 곧장 똑바로 서는 것이다. 곧이는 언제나 바로 정직하게 서서 곧이 곧장 나 가야 한다. 하늘을 향하여 똑바로 나아가는 것이 곧이(貞)다.”라고 했다.
줄
다석에게 줏대는 ‘곧이/고디(貞)’다. 말씨와 씨말은 비단실로 꿰어 엮어서 그 참올(眞理)을 틔워야 한다. 참올 올은 올발라서 올이다. 다스려 올바른 것이 올이다. 진리란 참으로 올바른 것이다. 그래서 ‘참올’이다. 올은 또 우리말로 실이요, 줄이다. 사람은 날듯이 자유로운 시원하고 통쾌한 정신줄을 잡아야 한다. 그 정신줄이 하늘 올이다. 다석은 올을 잡으라 했다. 다석은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정신의 줄(絲) 곧 얼(靈)줄이 늘 늘어져 있다. (중략) 이 한 얼줄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라고 했다. 올줄이 얼줄이고 ‘곧이/고디’다. 한웋님 고디다! 올 잡고 참올 틔워 하늘 이어 받은 바탈(本性), 첫바탈, 밑올속눈(本來面目)이 뵈어야 한다. 바탈 꿰뚫어 뵈는 것이 시원시원한 빈탕이요, ‘얼나’다. 하나를 내는 비로소다. 다석은 한웋님의 고디는 우리 때문 비르샤 우리로 하여금 늘 삶에 들어감을 얻게 하소서”라 했고, 하나, 이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는 온전하다. 모든 것이 하나를 얻자는 것”이라고 했다(류영모 지음, 박영호 풀이, ‘다석 류영모의 얼의 노래’, 두레, 2004).
속곧
줏대는 속에 트인 ‘속곧’과 맞닿아 있다. 마음(心) 한 가온(中)에 바로 서 있는 것이 ‘속곧’이다. 하늘땅 맞붙은 자리에 마음 하나가 올곧게 휘돌아 솟구쳐 뚫려야 온갖 것이 알아진다. 줏대가 없으면 마음은 ‘하고픔’ 쓰레기 더미에 묻혀 어지러워진다. 가온에 줏대 세운 사람은 속알이 꽉 차서 단단하다. 어떤 꾀임에도 나 나다 곧게 솟나다”라고 외칠 수 있는 제 임자다. 다석은 참나가 우주의 중심이요, 나의 임자다. 나(自我)의 주인이란 나를 지배하고 책임질 수 있는 자유인이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제 임자로 살아야 참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다석이 꿈꾼 씨알의 꼴이다.
일름
다석은 사람 바탈이란 ‘오르는 것’에 있다고 보았다. 사람에게 누구나 천명(天命)이 있다”라고 한 까닭은 하늘 일름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늘이 일러준 목숨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짓은 높은 곳을 바라는 ‘고픔’일 뿐이다. 하늘 일름은 그런 고픔 따위가 아니다. 다석은 높은 산에는 부귀를 가지고는 못 오른다. 우리의 육체를 벗고 죄 짐을 벗고 정신이 되어 영이 되어야 오를 수 있다. 이것이 형이상학이다. 오르고 또 오르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그것이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천명(天命)이다.”라고 했다. 몯돌 지구(地球)를 이겨 먹으라고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산 것들을 죄다 억누르라고 온 것도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쳐서 죽이라고 보내온 것은 더더욱 아니다. 스스로 보내고 저절로 온 사람은 산알을 따라 얼 목숨 깨우는 일이 첫째다. 싯다르타가 얼 목숨 깨우쳐 붓다로 거듭나고, 예수가 얼 목숨 깨우쳐 그리스도로 거듭난 일을 따져보라. 붓다그리스도는 하늘 일름이 낸 까닭을, 아니 저 스스로 온 까닭을 크게 깨우쳤다.
이
줏대는 쏜살같이 흐르는 때에 ‘이제 여기’를 지키는 힘이다. 가온찍기가 찰나의 점이라면, 줏대는 그 점을 늘로 이어주는 줄이다. 앞서 말했듯이 늙은이는 9월에 일을 이루고, 이름이 나게 돼선, 몸을 빼, 믈러나는 것이 하늘 가는 길.”이라 했다(작은 글씨는 뺌). 줏대 있는 사람은 이름에 매달리지 않고, 때가 되면 훌훌 털고 물러날 줄 안다. 다석은 이름 없는 것이 나의 본 바탕이다. 나란 영원한 생명이 폭발하여 나타나는 참나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긋(참나) 찾아 자각한 인생은 이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했다. 이름도 꼴도 없이 ‘없이 계신 님’ 그림자로 살면서도, 그 속알만은 서슬 퍼런 줏대로 빛나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가온을 찍고 줏대를 세워 ‘참나’로 여문 씻어난 이(聖人)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