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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영화 ‘왕사남’이 미처 보여주지 못한 권력의 초상

영화 ‘왕사남’이 미처 보여주지 못한 권력의 초상
[사회혁신]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조선 왕조는 적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여겼지만, 조선의 왕 27명 중에서 이 원칙에 따라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임금은 단 7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현종과 숙종을 제외한 문종, 인종, 경종은 요절했고, 단종과 연산군은 쫓겨났어요. 요절의 원인으로는 극심한 왕세자 교육과 스트레스, 구중궁궐의 폐쇄적인 환경과 취약한 면역력, 왕권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신하들의 끊임없는 압박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 왕조 왕위계승의 다양한 방식 그 다음으로는 어진 이를 고른다 는 택현(擇賢) 이라는 방식이 있었어요. 충녕대군의 왕위계승이 첫 사례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능력만 있으면 맏아들이 아니어도 왕이 될 수 있다 는 전례를 남겼습니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할 때, 그를 따르던 훈구 공신들도 어린 왕보다 능력이 뛰어난 수양대군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일종의 변형된 ‘택현론’을 내세웠습니다. 제9대 성종이 즉위한 과정 역시 택현의 명분이 활용된 사례인데요. 세조의 둘째 아들예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했을 당시, 왕위 계승 서열상으로는 예종의 친아들인 제안대군이나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이 앞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정희왕후는 이들을 제치고 둘째였던 자산군을 낙점했습니다. 이때 내세운 명분이 바로 세조대왕께서 기상과 자질을 칭찬하셨다”는 택현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을 때 형제간의 왕위 계승도 있었는데요. 태종, 명종, 영조가 이런 방식으로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직계 혈통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는, ‘촌수가 가장 가깝고 항렬이 맞는 종친’을 고르는 친친(親親)으로 왕이 된 선조와 철종이 있지요. 마지막으로 폭군을 몰아내는 정변을 통한 권력 찬탈과 공신들의 옹립이라는 반정(反正)이 있었지요. 중종과 인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누가 먼저 상대를 죽이느냐의 싸움 1418년 세종 즉위 이후 1441년 세손이 태어날 때까지, 1417년생 수양대군은 조선 왕위계승 서열의 잠재적 2순위였어요. 문종이 1421년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위계승 서열의 잠재적 2순위였던 수양대군이었지만 24세가 되던 1441년 단종이 태어나면서, 그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가슴 속의 야망을 꺼뜨리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세조 어진 초본.(얼굴 부분 확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더구나 왕실 초기부터 왕권과 신권의 주도권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특히 중신들은 끊임없이 왕이 되지 못한 종친들을 의심하고 역모로 몰았어요. 만약에 세조가 계유정난을 먼저 일으키지 않았다면 김종서가 그를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는 황표정사를 통해 왕권을 무력화시키고 전권을 휘둘렀어요. 비록 단종이 6대라지만 조선 건국 1392년에서 겨우 60년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왕조가 무너질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계유정난’도 그렇지만 조선 왕실 역사에서 가장 냉혹한 순간 중 하나가 벌어졌는데요, 당시 조선 왕조의 최고 어른이었던 양녕대군과 효녕대군이 단종의 처형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선 것입니다. 특히 양녕은 주저하는 세조에게 가장 집요하게 단종을 죽이라고 독촉했어요. 양녕은 계유정난 이전부터 수양대군의 가장 든든한 왕실 내 지지자였습니다. ‘강한 자가 권력을 잡아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논리로 세조 정권과 운명공동체였어요. 세조보다 더 적극적으로 단종을 죽이라 했던 세종의 형님들 대군들이 표면적으로는 ‘국가의 안정’을 외쳤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신들과 가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철저한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1457년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자, 노산군이 살아 있는 한, 천하의 야심가와 역적들이 그를 핑계로 계속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어요.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사직의 대계’와 ‘불가피한 법 집행’이었습니다. 양녕은 세조에게 종친의 정이나 숙부로서의 죄책감에 얽매이지 말 것을 주문했습니다. 나라의 군주라면 가문의 정보다 ‘조선이라는 국가의 안녕’을 먼저 생각해야 하므로, 노산군을 법대로 처형하는 것이 사직을 지키는 진정한 대의라고 주장했지요. 세조는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끝내 죽였다는 ‘도덕적 비난’을 받을까 정치적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때 백부인 양녕이 내가 악역을 맡을 테니 너는 대의를 따르라”며 총대를 멘 셈이지요. 세조가 역사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윤허하지 않는다 며 사양하는 모양새를 취하자, 양녕대군이 앞장서서 백관을 이끌고 엎드려 대세를 형성해 준 것입니다. 불교에 심취해 정치와 거리를 두었던 효녕대군은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백관과 종친들이 단종의 처형을 주청할 때 언제나 이름을 함께 올렸어요. 이는 거대한 권력의 흐름에서 살아남기 위한 소극적 동조이자 생존 전략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울 동작구 소재 양녕대군 묘역. 국가유산 포털 명나라에서 찾은 정난(靖難)의 사례와 명분 수양대군이 왕위를 꿈꾸었던 배경에는 명나라에 단종의 책봉에 대한 고명사은사로 다녀온 것도 배경이 되었을 것인데요. 그는 명나라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조선 출신 환관 가운데 자신의 세력을 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명나라의 사신으로 조선에 와서, 수양대군의 양위와 단종복위운동을 목격하였으나 철저히 수양대군의 편을 들었어요. 그래서 명나라 측의 의심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정통성을 인정받았습니다. 당시 명 황제였던 경태제는, 정통제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정통제가 1449년 몽골 친정을 떠났다가 포로가 되는 ‘토목의 변’이 벌어지자 황제에 등극했어요. 그는 1449년에 정통제가 돌아오자, 그에게 황위를 넘겨주지 않았고 태상황으로 몰아내 유폐시켰습니다. 그러다가 1457년에 정통제가 경태제를 몰아내고 황제로 복귀하여, 천순제가 되었는데요. 그런 복잡한 사정 때문에, 세조의 왕위찬탈이 쉽게 넘어갔습니다. 더구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것을 ‘반란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정난이라고 했는데요. 이는 바로 명의 영락제가 자신의 조카였던 제 2대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오를 때 사용했던 ‘정난의 변’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합니다. 건문제가 관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다섯 번왕을 제거하였지요. 이에 위협을 느낀 연왕 주체가 거병하여 1402년 건문제를 내쫓고 황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명나라 3대 황제 영락제 배신자의 아이콘으로 출세 가도 달렸던 신숙주 영화 에는 신숙주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육신의 단죄, 단종의 노산군 강등과 영월 유배 그리고 살해에 이르는 과정에 신숙주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어요. 뿐만 아니라 사육신의 가족들 가운데 여성들은 공신들에게 노비로 배분되었는데, 신숙주는 친구 성삼문의 여동생인 성성금(成性今) 을 받았어요. 그리고 금성대군의 거사가 발각되자, 양녕과 효녕대군과 함께 단종의 처형을 주장했지요. 1442년 세종 24년에 집현전 학사였던 그는 박팽년, 성삼문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하면서 이어서 완성했던 「삼각산연구(聯句)」가 있는데요. 이때 신숙주는 발돋움해서 미칠 수 있는 것은 조금 어여쁘나, 치켜 들어 굽힐 줄 모르는 것이 대단히 싫도다(小憐跂而及 大厭昂不俯) 라고 썼는데요. 이를 통해 굽힐 줄 모르는 것을 싫어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것은 천성인 듯 싶다 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뛰어난 학자이며 관료였지만 신숙주는 배신자로 국민적 지탄을 받아 왔지요. 그러다 보니 과장된 이야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그가 노산군의 아내 정순왕후를 노비로 달라고 했다는 설이 있는데요. 이는 사실 윤사로가 했던 말이 와전된 것입니다. 그는 정순왕후의 아버지 송현수의 딸을 공신에게 준다면 받고 싶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신숙주를 미워하다 보니, 그가 하지도 않은 말까지 퍼져버린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신숙주 초상 왕조를 다지기 위한 과정이었나, 비윤리적 권력욕일 뿐이었나 역사적으로 권력을 둘러싼 투쟁은 세계 어디서나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왕조는 탄생부터가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족들을 처참하게 제거하고 시작되었습니다. 역성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들도 잘못하면 역성혁명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왕조가 장기 지속되려면 안정된 왕권계승과 유능한 국왕 및 충직한 관료가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자의 난과 형제계승을 통해 왕이 된 태종은 택현의 방식으로 세종에게 왕위를 넘겼고 이어 적장자계승으로 문종에게 넘어갔지만, 문종이 일찍 죽었을 때 능력이 입증된 동생에게 형제계승도 가능했는데요. 그렇게 되었다면 조선왕조의 역사는 피를 부르지 않고 좀 더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대비도 외척도 없는 어린 세자에게 왕위를 넘셔 비극을 초래한 것이지요. 거기에는 어린 왕을 추대하고 재상으로 국정을 주도하겠다는 고명대신의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국왕의 명령을 내세워 수양대군과 같이 위협적인 종친을 제거해 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았지요. 물론 유능한 국정운영 능력을 가진 세조가 기반을 확실하게 다졌기 때문에, 조선왕조가 오래 유지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윤리와 도덕의 측면에서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요. 부당한 권력찬탈을 인정하지 않는 DNA, 의 성공으로 양녕대군을 비롯한 종친과 신숙주를 비롯한 관료들은 오히려 세조보다 더욱 잔혹한 보복정치를 부추겼지요. 단종만이 아니라 누나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 정종, 동복형제들인 안평과 금성대군, 단종을 키운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가 낳은 이복동생들, 자신의 친구이자 단종의 장인 송헌수를 죽였습니다. 심지어 이미 사망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까지 폐서인으로 강등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성종 이후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세조의 권력 찬탈 과정에서 공을 세우고 권력을 농단하던 훈구세력들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역공을 당해 여러 차례의 사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아울러 세조의 후손들로 왕권이 계승되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복권과 명예회복에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지요. 그로 인한 국력의 소모와 참혹한 죽음이 반복되면서, 국가적 역량이 많이 쇠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힘을 통해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은 부당한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 뿌리 깊게 남아 있었어요. 수많은 야사와 설화 및 민간신앙이 만들어진 배경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박정희, 전두환의 쿠데타를 통한 권력찬탈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국민들의 DNA에 새겨져 있어요. 영화 의 성공도 그 지점을 상상력으로 그려내 성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주진오 현재사 formc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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