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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죄수도 사람 외치며 감옥 들어간 엘리자베스 프라이

죄수도 사람 외치며 감옥 들어간 엘리자베스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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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인들은 감옥을 이렇게 생각했다.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차피 쓸모없는 존재들이니 가둬두면 그만이다. 그러니 당연히 먹는 것도 형편없고, 씻는 것도 없고, 자는 것도 맨바닥이었다. 그 당연함에 아니, 잠깐만요 하고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프라이(Elizabeth Fry, 1780~1845)다. 여자였고, 종교인이었고, 열한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였다. 세상이 당신이 뭔데요? 라고 물으면 그녀는 그냥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엘리자베스 프라이(위키피디아) 유복한 집 딸이 감옥 문을 두드리다 엘리자베스 거니(Elizabeth Gurney)는 1780년 5월 21일 영국 노리치(Norwich)의 부유한 퀘이커교도 집안에서 열두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존 거니(1750~1809)는 은행업과 섬유업으로 큰돈을 번 사람이었고, 어머니 캐서린 거니(1754~1792)는 훗날 바클레이즈 은행을 세운 집안 출신이었다. 쉽게 말해,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집 딸은 은수저를 갖고 심심해하지 않았다. 열두 살에 어머니를 잃고 슬픔에 젖어 지내다가, 열여덟 살 되던 1798년 미국 출신 퀘이커 설교자 윌리엄 세이버리(William Savery, 1750~1804)의 강연을 듣고 가슴속에 불이 붙었다.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한다 는 말이 그냥 강연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당장 동네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800년, 스무 살의 엘리자베스는 차 무역상이자 퀘이커 교도인 조지프 프라이(Joseph Fry, 1777~1861)와 결혼했다. 그렇게 엘리자베스 프라이가 되었다. 이후 열한 자녀를 낳았으니 아이들에게 이름 짓는 것만으로도 바빴을 법한데,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프라이가 뉴게이트 감옥 수감자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위키피디아) 뉴게이트 감옥, 지옥문을 열다 진짜 전환점은 1813년이었다. 미국 퀘이커 활동가 스티븐 그렐렛(Stephen Grellet, 1773~1855)이 찾아와 런던 뉴게이트 감옥의 여성 수용 구역을 방문해 달라고 부탁했다. 프라이는 갔다. 그곳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수백 명의 여성과 그 자녀들이 한데 뒤섞여 맨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옷도 없고, 침구도 없고, 씻을 물도 없었다. 재판을 기다리는 미결수와 이미 형을 선고받은 수형자가 같은 방에 있었고, 어른과 아이가 뒤엉켜 있었다. 남성 교도관들이 여성 수감자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프라이는 그날로 따뜻한 옷감과 짚을 들고 들어갔다. 교도관들은 저 여자들은 야만인이라 위험하다 고 말렸지만, 그녀는 혼자 들어갔다. 그리고 돌아왔다. 살아서. 1816년부터 그녀는 본격적으로 뉴게이트 감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었고, 여성수감자들에게 바느질과 뜨개질을 가르쳤다. 중요한 것은 그 방식이었다. 그녀는 규칙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수감자들을 모아 놓고 어떤 규칙이 필요하겠습니까? 투표로 정합시다 라고 했다. 1810년대에,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투표를 시킨 것이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프라이.(Elizabeth Fry | Quaker, Prisoner Reform & Social Reformer | Britannica) 처벌이 아니라 변화, 가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 만들기 프라이의 핵심 사상은 단순했다. 사람은 바뀔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자는 타고난 것이라 생각했다. 감옥은 벌주는 곳이지 고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프라이는 달랐다. 죄를 지은 것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은 별개라고 봤다. 1817년, 그녀는 뉴게이트 여성죄수 개선협회(Association for the Reformation of the Female Prisoners in Newgate) 를 세웠다. 이 단체는 1821년 영국 여성죄수 개선협회(British Ladies Society for Promoting the Reformation of Female Prisoners) 로 확대됐다. 여성들이 주축이 된 사회 변혁조직의 초기형태였다. 그 결실이 1823년 교도소법(Gaols Act 1823)이었다. 이 법은 감옥에서 남녀를 분리하고, 여성수감자는 반드시 여성교도관이 담당하도록 규정했다. 프라이가 직접 1818년 하원위원회에서 증언한 결과였다. 19세기 영국의회에 여성이 증언하러 나타난 것 자체가 사건이었다. 그녀의 영향력은 국경을 넘었다. 1840년에는 간호사 교육기관을 세웠는데, 교육받은 간호사들이 훗날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1856)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과 함께 일했다. 영국 의학 잡지는 1897년 프라이를 두고 간호의 어머니 라고 부를 정도였다. 나이팅게일의 그늘에 가려 있지만, 그 불빛의 원천은 프라이였다. 빅토리아 여왕(1819~1901)은 그녀의 활동을 지지하며 돈을 기부했고,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795~1861)는 1842년 영국 공식방문 중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뉴게이트 감옥으로 프라이를 찾아갔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1777~1825)와 니콜라이 1세(1796~1855)도 그녀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1845년 10월 12일, 그녀는 영국 남부 휴양지 램스게이트에서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에 천여 명이 모였고, 항구 해안경비대는 조기를 게양했다. 군주의 죽음에만 조기를 다는 관례를 깬 것이었다. 2002년부터 2017년까지 영국 5파운드 지폐에 그녀의 얼굴이 새겨졌다.   2002년부터 2017년까지 영국 5파운드 지폐에 그녀의 얼굴이 새겨졌다.(김성수 시민기자) 그래서 한국은? 자, 이제 불편한 이야기를 해보자. 2024년 기준 한국의 교정시설에는 하루 평균 5만 6000여 명이 수용돼 있다. 문제는 정원이 그만큼 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주여자교도소의 경우 6명 정원 방에 11명이 생활한다. 일인당 공간이 약 0.5평. 사람이 누우면 팔다리를 못 편다. 관 속 같다는 말이 수감자들 사이에 일상어가 됐다. 헌법재판소는 2016년 이미 일인당 1.27㎡도 안 되는 환경을 위헌이라고 판결했지만, 상황은 오히려 나빠졌다. 독일과 일본은 1인당 7㎡ 이상을 보장한다. 한국 기준은 2.58㎡다. 그나마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더 뼈아픈 것은 교화 의 문제다. 감옥이 빽빽하면 교육도, 상담도, 직업훈련도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공간이 없으면 사람이 변할 여지도 없다. 2024년 기준 여성수형자의 51.9%가 사기·횡령죄다. 경제적 약자가 몰리는 구조적 문제가 있는데, 사회로 돌아가 다시 설 발판을 만들어 줄 기반이 없으니 재범의 악순환은 끊기지 않는다. 프라이가 했던 일을 떠올려 보자. 그녀는 수감자들에게 바느질과 뜨개질을 가르쳐 출소 후 스스로 돈을 벌게 했다. 규칙을 강요하는 대신 스스로 정하게 했다.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변화가 목적이었다. 그것이 1820년대 영국에서 통했다. 2020년대 한국에서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그녀도 비판을 받았다. 영국 귀족들은 죄수들에게 왜 친절하냐, 그러면 범죄가 늘지 않겠느냐 고 했다. 그것이 지금 한국에서도 반복되는 논리다. 죄수들이 무슨 인권이냐 는 말이 인터넷 댓글에 여전히 넘쳐난다. 19세기 영국 귀족과 21세기 한국 댓글러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프라이가 싸웠던 문제, 즉 여성수감자가 남성교도관에 의해 착취당하는 문제는 한국에서 완전히 해결됐다고 볼 수 없다. 여성수감자 처우에 관한 제도적 장치는 있지만, 그것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투명한 감시체계는 여전히 부실하다.   엘리자베스 프라이의 삶을 묘사한 수예.(Elizabeth Fry: Prisons - Quaker Tapestry) 천 명이 아니라 한 명이 바꾼 역사 엘리자베스 프라이가 처음 뉴게이트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정치인이 아니었고, 법률가가 아니었고, 기자도 아니었다. 그냥 저기 사람들이 저러면 안 되겠다 고 생각한 퀘이커교도 어머니였다. 그 마음 하나가 법을 바꾸고, 대륙을 건너고, 170년 뒤 지폐에 얼굴을 새겼다. 한국에는 지금 프라이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교도소 담장 안을 들여다보고, 수감자를 숫자가 아닌 사람으로 보고, 처벌 대신 변화를 말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나타났을 때 죄수 편이냐 는 비난 대신 귀를 기울이는 사회. 감옥은 사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그 거울이 지금 어떤 모습을 비추고 있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엘리자베스 프라이 조각상 앞에서 김성수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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