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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20년 연준의장 지낸 앨런 그린스펀 100세로 타계

20년 연준의장 지낸 앨런 그린스펀 100세로 타계
[사람들]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이 22일(현지시간)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게티 이미지  양당 출신 대통령들 아래에서 미국 경제의 틀을 짜는 데 기여했지만 항상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한 거인 앨런 그린스펀이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영국 BBC가 그의 아내이자 NBC뉴스 기자 안드레아 미첼의 성명을 인용해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첼은 1987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을 지낸 고인이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눈을 감았다고 NBC가 보도한 성명을 통해 밝혔다. AP 통신은 고인이 이날 워싱턴 DC의 자택에서 운명했다고 전했다.  그린스펀은 20년 가까이 대통령직 다음으로 중요한 직책이란 평가를 받는 Fed 의장을 역임하며 미국 경제를 보호하고 달러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1951∼1970년 재임)에 이어 역대 두 번째 긴 임기를 소화했다. 로널드 레이건,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네 대통령과 호흡을 맞췄다.  그의 재임 기간을 대안정기 (Great Moderation)라 부른다. 반면 그가 시장의 자율조정 능력을 맹신하다시피 해 규제를 헐겁게 하는 바람에 2007∼2008년 금융위기와 대침체(Great Recession)를 초래하게 됐다는 비판이 동시에 나온다. 물론 쉬운 신용에 대한 지나친 의존 때문에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 을 부추겼다는 비판도 빠뜨릴 수 없다. 미국 금융계의 신 으로 불린 그린스펀은 재임 기간 모든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언론과 금융시장은 그의 몇 안 되는 공개 발언에 집중했고, 그의 사무실에는 단순히 책임은 이 자리에서 시작된다 (the buck starts here)는 표지석만 자리를 지켰다.  연준은 그린스펀의 정책과 경제 사고가 이 기관과 경제학 전반, 그리고 국가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고 밝혔다. 성명을 통해 그는 통화정책 결정에 엄격한 분석 규율을 가져왔고, 연방준비제도의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로 남아 있는 신뢰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고 밝혔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통화정책의 마에스트로(거장 지휘자) 이라며  연준 의장으로서 그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계 인사가 돼 거대하고 복잡한 미국 경제라는 기계가 최선의 상태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연주되도록 조율해나갔다 고 언급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도 그의 재임 기간 대부분은 번영의 시기와 맞물려 있었으며, 냉전 이후 승리를 거둔 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고 높이 평가했다. 그린스펀은 인터뷰를 마다했고 늘 모호하게 얘기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지만, 연준의 통화정책 소통 방식을 바꿔 통화정책 안정성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통화정책 결정 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금리 결정 후 공개적으로 정책 결정문(성명)을 내놓기 시작한 것은 그린스펀 재임 시기인 1994년이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 연준은 통화정책 변경 결과를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았고, 월가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공개시장운영 업무를 통해 정책 변화를 추정할 뿐이었다. 그린스펀 체제의 연준은 몇 차례 금융시장 혼란을 발 빠른 대응으로 관리하며 시장 안전판 역할을 해 오늘날 연준 풋 이란 용어를 낳게 했다. 증시가 폭락하거나 금융시장에 위기 조짐이 올 때마다 연준이 기준금리 인하나 강도 높은 유동성 공급 정책을 펼쳐 시장을 구제해줬고, 이 때문에 그린스펀 풋 (Greenspan Put)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그를 처음 정부 내 직책으로 이끌었다. 베트만 게티 이미지 그는 1926년 3월 6일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가구점에서 일하던 그의 어머니가 홀로 아들을 길러냈다. 어린 시절 수학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클라리넷을 공부했다. 그는 전설적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 스탠 게츠와 한 밴드에서 연주한 후 헨리 제롬 밴드와 함께 전국 투어를 할 정도로 빼어난 기량을 인정받았다. 연주하며 떠도는 생활은 그에게 미국 비즈니스의 작동 방식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귀중한 통찰을 제공했다. 동료 뮤지션들이 저녁마다 마리화나를 피우는 동안, 그린스판은 경제 문제에 골몰하며 밴드의 회계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열아홉에 뉴욕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해 자유시장의 사도가 되었고, 결국 경제 컨설턴트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 뒤 JP 모건 이사회 멤버로 활동했다. 인플레이션 규제에 기여 1952년, 우파 작가이자 사회철학자인 아인 랜드(Ayn Rand, 본명 알리사 지노비예브나 로젠바움)를 만났으며, 그녀의 견해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녀는 그린스펀이 어둡고 침울한 정장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장의사 라고 놀려댔다. 젊은 경제학자 그린스펀은 사회 전체의 이익을 배제하고 자신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때 가장 효율적으로 사회가 굴러간다는 그녀의 믿음을 지지했다. 1966년에 쓴 글을 보면 그는 복지국가 를 정부가 생산적 구성원들의 부를 몰수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고 선언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1987년 앨런 그린스펀을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으로 지명하고 있다. 크로니클 컬렉션 게티 이미지 아이젠하워 집권기의 경기 침체를 성공적으로 예측한 그린스펀은 1968년 리처드 닉슨의 대선 캠페인에 자문을 제공해 성과를 냈다. 그는 그 뒤 경제자문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그린스펀은 나중에 닉슨을 안타깝게도 편집증적이고, 인간혐오적이며, 냉소적 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성공한 경제학자로 닉슨의 후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제럴드 포드는 그린스펀에게 경제자문위원회에서 계속 일할 것을 요청했고, 1980년대 초 로널드 레이건은 그를 미국 국가연금 제도 개혁에 관한 조사를 이끌도록 했다. 1987년 8월, 레이건은 그를 Fed 의장으로 승진시켰고, 이후 20년 동안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발휘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황금기 그는 취임 두 달 만에 수심 깊은 곳(deep end)에 던져졌다. 1987년 10월 주가가 한꺼번에 30% 이상(블랙 먼데이 하루에 22.6%나) 폭락한 주식시장 붕괴를 그린스펀은수습해 많은 찬사를 받았다. 기초 경제에 대한 그의 신뢰 발언은 긴장을 진정시켰고, 저렴한 신용 촉진은 은행들의 생존에 기여했다. 과감한 유동성 공급 확약이 시장이 신속하게 평온을 되찾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린스펀은 조지 H.W. 부시에 의해 Fed 의장 후보로 재지명되었으나, 부시 대통령은 이후 경제 회복 부진으로 자신의 재선 가능성이 좌절되었다고 그린스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놀랍게도 민주당 대통령 빌 클린턴도 가장 냉철한 통화주의자들에게 자리를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그의 결정은 보상받았고, 그린스펀의 지도 아래 1990년대 후반 황금기가 찾아왔다.  거장의 통제력 이 가장 완벽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8년 러시아 금융위기와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파산 사태 당시 깜짝 금리 인하로 대응하며 글로벌 신용경색 확산을 막았다. 그린스펀은 이후 회고록에서 클린턴의 장기 경제 성장에 대한 일관되고 규율 있는 집중 을 칭찬했지만, 일부 공화당 행정부가 공공 지출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고 불평했다. 1997년 한국의 금융위기 당시에도 그린스펀은 로버트 루빈 당시 재무장관과 함께 막후에서 위기 전염 방어를 위해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에 대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패키지 발표 이후에도 위기가 수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미 당국은 한국 정부와 협의해 IMF 구제금융의 조기 지원을 결정했다. 아울러 미국과 주요 선진국 금융회사들이 보유한 한국 기업 및 금융기관 대상 단기 대출의 만기를 연장해줄 것을 유도하기로 결정했다. 뉴욕 연은은 1997년 12월 24일 월가 주요 은행과 회의를 소집해 한국의 단기 외채 만기 연장에 동의했고, 이후 연준은 몇달 간 단기 위주였던 대출 만기를 중기로 전환하는 작업을 감독했다. 이 같은 단기 외채 만기 연장 및 재구조화는 1997년 말 한국이 국가 부도 위기를 넘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방법은 시장이 위기가 닥칠 때마다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나중에 양적 완화 라 불린 이러한 격변에는 1980년대 저축대부조합 위기, 첫 걸프 전쟁, 멕시코 페소 위기, 그리고 그가 은퇴한 직후인 2008년 전 세계 신용 위기가 포함된다.   앨런 그린스펀은 1970년대 후반 TV 스타 바바라 월터스와 사귀었다. 게티 이미지 그린스펀은 일하는 시간 말고는 테니스에 열심이었다. 실력도 있었다. 다소 회색빛 얼굴의 은행가였다. 캐나다 화가와의 첫 결혼은 일 년도 채 가지 않았으며, 그린스펀은 TV 스타 바바라 월터스와 교제한 후 1997년 NBC 기자 안드레아 미첼과 결혼했다. 같은 해, 동남아시아  호랑이 경제 의 극적인 몰락이 그를 다시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미국 금리를 인하함으로써 그는 상황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표명했고, 이는 분명 세계 경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거품과 붕괴 많은 닷컴 기업들이 투자자들의 과대평가에 부응하지 못하고 2000년 3월에 문을 닫았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린스펀은 시장이 비이성적 과열 (irrational exuberance)을 보였다고 말했다. Fed는 금리를 인상했다가 소비자들이 지출을 대폭 줄인 후 빠르게 금리를 인하했다. 하지만 그린스펀은 닷컴 버블이 처음 성장할 수 있게 한 저금리 문화에 책임을 돌렸다. 노벨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도 비평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시장의 열기를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린 것이 아니라 거품이 터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나서 엉망진창을 치우려고 했다 고 볼멘 소리를 했다.    그린스펀은 9·11 테러 이후 금리를 대폭 인하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사담 후세인을 권력에서 끌어내리라고 촉구했다. AFP 자료사진 게티 이미지  9·11 테러 이후 그는 미국 경제를 지지하기 위해 금리를 대폭 인하했고, 조지 W. 부시에게 사담 후세인이 세계 에너지 시장에 혼란을 일으킬 경우에 대비해 축출할 것을 촉구했다. 2006년, 전례 없는 다섯 번째 임기를 마친 그린스펀은 Fed 의장 직에서 물러났다. 일 년 뒤 Fed가 예측하지 못했던 미국 주택시장의 침체가 찾아왔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는 은행들을 무너뜨렸고,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글로벌 경제 침체를 촉발했다. 비평가들은 9·11 이후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이 주택 가격 급등과 은행들의 과도한 주택담보대출 매도를 부추겼다고 말했다. 또 은행 규제와 파생상품 같은 복잡한 금융 상품을 이용해 대출을 보장하는 관행에 대한 그의 반감이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평가도 있었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이후 의회에서 증언하는 그린스펀 게티 이미지 2008년 10월, 그린스펀은 자유시장을 지나치게 신뢰했고 서브프라임 대출의 위험성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는 금융 산업이 항상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자율 규제 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의회 증언대에 서 은행들이 자신의 자유시장과 규제 반대 견해가 틀렸음을 증명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결함을 발견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구적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실에 매우 괴로웠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린스펀의 비판자들은 거품 성장 억제에는 작은 조치만 취하고 사후 정리에는 큰 조치를 취하는 비대칭적인 대응이 오히려 더 많은 위험 감수를 부추겼다고 비판한다 고 소개했다. NYT는 그의 전기 작가인 세버스천 맬러비는 금융안정에 더 큰 비중을 두지 못했다는 점이 그린스펀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실수였고, 그것은 그가 굳이 저지르지 않아도 됐을 실수였다고 결론지었다 고 보도했다. 그린스펀은 현대 미국 경제를 가장 크게 형성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라고 BBC는 짚었다. 20년 동안 여러 대통령들과 많은 평범한 미국인들이 그를 금융 전문가이자 어려운 시기를 견디는 부적 같은 존재로 여겼다.   그린스펀은 2023년까지도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목소리를 내왔다. 게티 이미지 그는 이런 공로를 인정 받아 워싱턴에서 대통령 자유 메달을 목에 걸었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받았다. 90대 후반까지도 경제 자문가이자 미디어 평론가로 주목받았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첫 행정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포퓰리스트 방식을 생활 수준 향상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고통의 외침 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을 가리키는 브렉시트를 최악의 결과 라고 불렀다. 그는 2023년 바이든 행정부가 금리를 너무 빠르게 올리고 있다고 텔레비전에 나와 경고했다. 지난 3월 100회 생일을 보냈다. 올림픽 선수 같은 냉철함으로 그린스펀은 국내총생산(GDP)이 단 한 번만 위축된 미국 경제를 오랜 기간 이끌었던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비판자들에게는 그의 명성이 규제에 대한 철학적 반감과 두 차례의 큰 시장 붕괴 때문에 손상되었던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임병선 에디터 byeongseon1610@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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