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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다석의 한글철학 ㊻ ] 깨달은 이 낳은 숨빛 얼개

[다석의 한글철학 ㊻ ] 깨달은 이 낳은 숨빛 얼개
[칼럼]
지금까지 써 온 다석의 한글철학”을 뒤이어, 이제부터는 다석철학 인물지도”를 통해 ‘다석 류영모’라는 한 깨달은 사람을 낳은 숨빛 만다라를 그리고자 한다. 이 새 연재글은 다석 주변 인물들(빛)이 어떻게 다석 안에서 생각불꽃으로 다시 타올랐는지를 따라가는 길이다.   그림 1) 화장찰해도(華藏刹海圖). 조선 1896년 무렵 그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봉화·법현·긍엽 3명이 제작했다. 경북 예천군 용문사 소장. 비로자나불 정토인 연화장세계를 그린 그림이다.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한 깨달음에 이른 이는 이런 세계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법신불 비로자나불이 가운데,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바람바퀴(風輪)가 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서로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1. 왜 인물지도인가 한 사람은 홀로 오지 않는다. 한 생각도 홀로 피지 않는다. 한 깨달음도 빈탕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씨가 트려면 흙이 있어야 하고, 물이 있어야 하고, 햇빛과 바람과 어둠이 함께 있어야 한다. 씨는 제 속힘으로 껍질을 깨지만, 그 껍질을 깨게 하는 것은 온 누리 숨짓이다. 깨달음도 그렇다. 한 사람 속알에서 터지는 듯 보이나, 그 속알 깊은 곳에는 시대의 긴장, 스승의 눈빛, 벗의 물음, 경전의 오래된 숨, 말글의 뿌리, 몸으로 닦은 수행, 나라 잃은 겨레의 숨막힘이 함께 돈다. 다석 류영모라는 한 깨달은 이도 그렇게 왔다. 그는 외로운 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산은 홀로 솟은 봉우리가 아니다. 깊은 산맥이다. 그 산맥에는 세종의 정음이 있고, 민세의 다사리가 있고, 단재의 역사 불칼이 있고, 오산의 청년 불씨가 있고, 예수의 말숨이 있고, 붓다의 빈탕이 있고, 노자와 장자의 허공이 있고, 맹자의 하늘바탈이 있고, 톨스토이와 간디의 맨몸 삶이 있고, 함석헌의 씨알 역사가 있고, 동광원의 청빈과 무등산의 고요가 있다. 그 많은 빛이 다석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와 부딪치고, 감기고, 사라지고, 다시 솟았다. 그리하여 다석의 말숨이 되었다. 한글철학이 되었다. 몸맘얼 수행이 되었다. 참·없·얼나·씨알의 길이 되었다. 이 연재는 그 숨빛 길을 그리려 한다. 깨달음의 발생도를 그리려 한다. 빛의 변환을 보려 한다. 누가 누구를 만났는가보다, 어떤 빛이 어떤 몸에서 다시 타올랐는가를 묻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연재 첫 물음은 이렇다. 다석이라는 한 깨달은 이는 어떤 숨빛들로 빚어졌는가. 그리고 두 번째 물음은 이렇다. 그 숨빛은 오늘 우리 안에서 어떻게 다시 깨어날 수 있는가. #2. 가온 명제 - 깨달음은 생각불꽃이다 다석 깨달음은 한 사람 머리에서 나온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가 한 사람 안에서 불붙은 사건이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긴장태가 있었다. 나라가 무너지고, 말이 막히고, 제도를 빼앗기고, 청년들이 제국 도시를 떠돌던 시대였다. 그 시대는 느슨하지 않았다. 사람 숨을 조였다. 숨이 조이면, 어떤 이는 꺾이고 어떤 이는 더 깊이 숨 쉰다. 다석은 아주 깊이 숨 쉰 사람이었다. 그는 시대 폭압을 피하지 않았다. 그 압력을 생각불꽃으로 바꾸었다. 그 불꽃에는 여러 기름이 있었다. 예수 산상수훈, 붓다 무아(無我), 노자 허(虛), 공맹(孔孟) 하늘줄, 중용 가온씀, 훈민정음 글꼴, 민세 우리말 수 헤아림, 톨스토이 금욕, 간디 진리 거듭남, 오산학교 민족교육, 동광원 청빈(淸貧), 무등산 적막, 수학과 물리학의 엄밀한 질서가 그 안에 있었다. 이것들이 다석 안에서 그대로 보존된 게 아니다. 그대로 옮겨진 것도 아니다. 다석은 받은 것을 다시 태웠다. 다시 앓았다. 다시 말로 만들었다. 다시 몸으로 살았다. 그렇게 예수는 다석에게서 말숨이 되었고, 붓다는 제나 죽임과 얼나 솟남이 되었고, 노자 허(虛)는 빈탕한데가 되었고, 세종 정음은 한글 뜻글철학이 되었고, 민세 다사리는 씨알 민주주의 말뿌리와 닿았다. 이 연재 중심 명제는 여기에 있다. 다석 류영모 깨달음은 식민지 조선의 긴장태 속에서 세계 영성·민족운동·한글·우리말·수학·물리학·몸수행·제자 전승의 빛이 한 사람 안으로 응축되어 터진 생각불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물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떤 빛인가. 이 빛은 어느 시대 어둠 속에서 타올랐는가. 이 빛은 다석 안에서 어떤 말숨으로 다시 태어났는가. 그리고 오늘 씨알에게 무엇을 묻는가.   그림 2) 금강계 만다라(Vajradhatu Mandala)가 그려져 있는 티베트 불교 탕카다. 탕카는 부처와 여러 영향력 있는 라마들, 그리고 다른 신들과 보살들 삶을 보여주는 중요한 교육 도구다. 그 중 하나는 아비달마 가르침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생명 수레바퀴다. 만다라(曼陀羅)라는 낱말 자체는 ‘원(圓, circle)’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만달라(Maṇḍala)를 음을 따라 번역한 것이다. 그것은 우주 씨알이다. #3. 만다라 가운데 - 참·없·얼나·씨알 만다라 한가운데에는 이름 하나를 세우지 않는다. 다석이라는 이름도 잠시 내려놓는다. 그 이름보다 깊은 자리가 있다. 참. 없. 얼나. 씨알. 이 네 겹이 다석 만다라 가운데다. ‘참’은 다석이 붙잡은 한 벼리다. 참은 책장 속에 든 지식이 아니다. 참은 살아 증언해야 하는 것이다. 다석은 나는 참나라는 하나의 증인”이라고 했다. 증인은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고, 서 있는 사람이다. 자기 삶으로 보이는 사람이다. ‘없’은 빈탕이다. 텅 비어 가득한 자리다. 나는 없에 가자는 것이다. 없는 데까지 가야 크다.” 다석이 외친 이 말은 허무(虛無)로 떨어지는 말이 아니다. 붙잡은 것을 놓고, 이름 붙인 것을 놓고, 내가 가졌다고 여긴 참까지 놓아, 마침내 큰 빈탕으로 가자는 말이다. 커극(太極)에서 없극(無極)으로 가는 길이다. ‘얼나’는 제나를 벗고 솟는 속나다. 몸나, 이름나, 욕심나, 겉나를 지나 깊은 속에서 솟는 나다. 그이가 ‘큰나(大我)’다. 다석은 제나를 죽이라고 했다. 없애라는 말이 아니다. 거짓 중심을 깨라는 말이다. 그래야 얼나가 솟는다. ‘씨알’은 깨달음이 역사 속으로 내려온 알갱이다. 하늘을 품은 작은 씨다. 얼나는 혼자 높아지는 길이 아니다. 씨알로 내려와야 한다. 사람들 속에서, 고통 속에서, 민주주의 속에서, 밥과 노동과 말과 돌봄 속에서 다시 살아야 한다. 참은 하늘 벼리다. 없은 빈탕 자리다. 얼나는 속에서 솟는 불꽃이다. 씨알은 세상 속에 심기는 생명 알갱이다. 이 네 겹 중심을 놓고 보아야 인물들이 제자리를 얻는다. 누군가는 참을 비추고, 누군가는 없을 열고, 누군가는 얼나를 깨우고, 누군가는 씨알을 역사로 밀고 간다. 이때 인물지도는 평면 그림이 아니고 숨 쉬는 만다라가 된다. #4. 아홉 길 - 숨빛 도는 자리 이 만다라는 아홉 길로 돈다. 아홉 방위(方位)라 해도 좋고, 아홉 숨길이라 해도 좋다. 길마다 빛깔이 다르고, 그 빛들은 모두 가운데의 참·없·얼나·씨알로 들어간다. 첫째 길 - 말글이 하늘 여는 자리 이 길에는 세종과 민세 안재홍이 선다. 세종은 소리를 글꼴로 본 사람이다. 하늘땅사람 숨을 정음(正音)으로 세운 사람이다. 한글은 세종에게서 백성의 말문이었고, 다석에게서 철학의 몸이 되었다. 닿소리와 홀소리, 점과 줄과 사람의 꼴은 다석 안에서 다시 생각불꽃이 되었다. 세종 정음은 다석 한글철학의 첫 해다. 민세는 우리말 깊은 데서 정치의 씨를 캐낸 사람이다. 비, 씨, 몬. 하나, 둘, 셋, 넷, 다섯. 민세는 수를 세는 말에서 우주와 사람과 나라와 다사리의 길을 보았다. 다사리는 다 말하게 하고 다 살리는 길이다. 세종이 말문을 열었다면, 민세는 그 말문이 모두의 정치가 되는 길을 열었다. 다석 한글철학의 하늘 곁에 민세의 다사리 땅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첫 길은 말글 뿌리다. 말이 글이 되고, 글이 철학이 되고, 철학이 정치가 되는 길이다. 둘째 길 - 나라 잃은 숨이 역사 불칼 되는 자리 이 길에는 단재 신채호, 시당 여준, 위당 정인보가 선다. 나라를 잃으면 말도 흔들린다. 역사도 빼앗긴다. 조상도 남의 기록 속으로 끌려간다. 이때 역사를 쓴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얼줄을 붙잡는 일이다. 단재는 역사 불칼을 들었다. 그는 조선을 불쌍한 피해자로만 보지 않았다. 싸우는 주체로 보았다. 아”와 비아”의 싸움 속에서 역사를 다시 세웠다. 시당 여준은 독립운동과 교육의 결기를 품은 사람이다. 위당 정인보는 조선학의 깊은 우물이다. 위당의 조선학은 다석에게 조선의 속말, 속얼, 속학을 다시 보게 하는 자극이었다. 다석은 외래 종교에 기대어 자기 말을 잃지 않았다. 외래 철학의 옷을 입고 자기 얼을 숨기지 않았다. 나라 잃은 시대였기에, 오히려 그는 더 깊이 조선의 말과 글과 얼을 붙잡았다. 이 둘째 길은 민족 숨빛이다. 짓눌린 숨이 깊어져 역사와 조선학의 불꽃이 되는 자리다. 셋째 길 - 학교가 불씨 되는 자리 이 길에는 남강 이승훈, 백이행, 고당 조만식, 춘원 이광수가 선다. 오산학교는 건물이 아니었다. 한 시대의 불씨였다. 나라 잃은 청년들이 배움으로 다시 서려 한 자리였다. 남강은 청년 류영모의 수학·물리·과학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다석을 오산으로 불렀다. 스승과 후원자, 교육가와 청년 교사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 만남은 한쪽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다석은 오산에서 기독교의 불씨도 전했다. 백이행은 오산의 기틀을 놓은 사람이고, 고당 조만식은 물산장려와 무저항 실천의 길을 보인 사람이다. 춘원 이광수는 다석과 함께 톨스토이의 죽음 앞에서 흔들린 사람이다. 두 사람은 같은 충격을 받았으나 길은 달라졌다. 춘원은 문학과 제도의 길로 갔고, 다석은 금욕과 비폭력과 무교회 오늘살이의 길로 갔다. 이 셋째 길은 오산 불씨다. 배움이 신앙이 되고, 신앙이 민족교육이 되고, 청년의 동요가 평생 수행으로 바뀌는 자리다. 넷째 길 - 말씀이 몸 되는 자리 이 길에는 예수 그리스도,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 송두용이 선다. 다석은 어린 나이에 예수를 만났다. 그러나 교회 안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는 예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를 더 맨몸으로 붙잡았다. 산상수훈 예수, 가난한 이 곁 예수, 말씀이 몸이 된 예수. 다석은 제도보다 말숨을 붙잡았다.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는 다석에게 제도 밖 신앙의 문을 열었다. 김교신과 송두용은 성서조선 얼줄을 이어간 사람들이다. 이 길은 교회 건물보다 말씀을, 직분보다 삶을, 교리보다 오늘살이를 앞세운다. 다석에게 집은 대학이었고, 말숨은 예배였으며, 하루는 경전이었다. 이 넷째 길은 예수 길이다. 말씀이 삶이 되고, 신앙이 몸살이가 되는 자리다.   그림 3) 마이스터 에크하르트(Johannes Eckhart, 1260년 추정∼1328년)는 서구 신비주의 안에서 신을 가지려는 마음조차 비워내는 ‘비움과 돌파’의 길을 연 사상가다. 그는 붓다의 ‘공(空)’과 함께 제나를 죽이고 얼나로 솟아나는 사유와 한바탕을 이룬다. 에크하르트가 치열하게 고민한 ‘무(無)로서의 신’은 다석이 말한 ‘없이 계신 님’과 이어진다. 다섯째 길 - 비워서 돌파하는 자리 이 길에는 붓다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선다. 그 곁에 반야심경, 선불교, 1700공안의 깊은 물이 흐른다. 붓다는 제나를 비워 빈탕에 든 이다. 무아는 나를 없애는 허무가 아니라, 거짓나를 비워 참으로 가는 길이다. 다석의 제나 죽임과 얼나 솟남은 여기서 붓다와 만난다. 몸나가 죽어야 얼나가 산다. 빈탕에 들어야 큰 숨이 돈다. 에크하르트는 서구 신비주의 안에서 비움과 돌파를 말했다. 신을 가지려는 마음까지 비우고, 신성 밑자리로 들어가려 했다. 붓다가 공의 길을 열었다면, 에크하르트는 신비 돌파의 길을 열었다. 다석은 이 둘을 따로 세우지 않는다. 공과 비움, 허와 빈탕, 제나 죽임과 얼나 솟남이 한자리에서 서로를 비춘다. 이 다섯째 길은 빈탕과 신비다. 비워서 사라지는 길이 아니라, 비워서 솟는 길이다. 여섯째 길 - 하늘바탈 기운이 하나로 도는 자리 이 길에는 노자, 장자, 공자, 맹자, 장재, 화담 서경덕이 선다. 노자는 허(虛)와 무위(無爲) 길을 열었다. 장자는 드넓은 빈탕 바람을 불어넣었다. 공자는 하늘줄을 사람의 삶 속에 세웠고, 맹자는 그 하늘줄이 사람 속 씨앗으로 이미 들어 있음을 밝혔다. 성선(性善), 사단(四端), 호연지기(浩然之氣). 이것들은 다석에게서 하늘바탈, 참나, 얼나의 길과 만난다. 장재는 기일원(氣一元) 큰 철학을 세웠고, 화담 서경덕은 조선 기철학을 깊게 밀고 갔다. 하느님을 존재자처럼 붙잡지 않고, 없이 계신 님으로, 빈탕한데로, 숨으로 알아차리는 길은 이 동아시아 회통의 깊은 물길과 닿아 있다. 이 여섯째 길은 동아시아 회통이다. 허(虛)와 하늘줄, 빈탕과 기운, 가온과 바탈이 서로 통하는 자리다. 일곱째 길 - 해방이 씨알로 번지는 자리 이 길에는 톨스토이, 간디, 함석헌, 박영호, 김흥호, 송기득이 선다. 톨스토이는 복음의 맨몸이다. 교회보다 예수 삶을 붙잡았고, 금욕과 채식과 비폭력 길을 걸었다. 간디는 진리 거듭남 몸살이다. 물레와 금욕과 비폭력으로 제국 앞에 섰다. 이 두 빛은 다석에게 들어와 한 끼, 해혼, 무교회 오늘살이, 비폭력 몸수행으로 바뀌었다. 함석헌은 다석 얼나를 씨알 역사로 밀고 나간 사람이다. 다석 말숨이 함석헌에게서 민중과 민주주의와 평화 언어로 번져갔다. 박영호는 말숨 증언자다. 흩어질 수 있었던 다석 말씀을 붙들어 전했다. 김흥호는 회통 해석자다. 다석 말숨을 동서양 종교철학 깊은 물길로 밝혔다. 송기득은 다석신학 체계자다. 다석철학을 현대 신학 언어로 세우고 물었다. 이 일곱째 길은 해방과 씨알 전승이다. 들어온 빛과 나아간 빛이 서로 휘감기는 자리다. 얼나가 씨알이 되고, 말숨이 어록이 되고, 깨달음이 역사로 번지는 자리다. 여덟째 길 - 깨달음이 밥상 돌봄 되는 자리 이 길에는 이현필과 동광원, 임락경, 김정호가 선다. 이현필은 청빈 현현(顯現)이다. 동광원은 말숨이 밥상으로 내려간 자리다. 고아와 환자를 돌보고, 청빈과 기도와 노동으로 하루를 세운 공동체다. 다석은 동광원과 깊이 이어졌고, 용흥사를 사서 기증했으며, 진달네 교회라는 현판도 써주었다. 임락경은 몸으로 이어진 제자다. 다석의 한 끼와 몸수행과 생명농업을 현장에서 이어갔다. 김정호는 무등산의 고요 속에서 다석과 만난 철학자다. 다석은 무등산 산양목장에 머물며 『중용』을 한글로 옮겼고, 그 결실이 『가온씀』으로 남았다. 이 여덟째 길은 현장 영성이다. 철학이 밥이 되고, 기도가 노동이 되고, 빈탕이 돌봄이 되는 자리다.   그림 4) 세종이 1446년에 지은 훈민정음 목판본이다. 간송미술관, 국보 70호. 이 사진은 복간본이다. 다석과 학산 이정호는 ‘훈민정음’ 꼴과 소리를 따져서 공부했다. 학산은 뒤에 훈민정음의 구조원리-그 역학적 연구 (아세아문화사, 1975)로 펴냈다. 아홉째 길 - 회통이 새 지도로 열리는 자리 이 길에는 학산 이정호, 단애 윤세복, 카를 융이 선다. 학산 이정호는 주역과 정역 대가다. 그는 다석과 함께 훈민정음 꼴과 소리, 하늘과 땅 이치를 살폈다. 다석 한글철학에서 학산은 곁가지가 아니다. 세종 정음(正音)을 우주론적 글꼴로 다시 읽는 데 함께 선 길벗이다. 단애 윤세복은 대종교 큰 어른이다. 삼신일체(三神一體), 귀일(歸一), 한민족 고유의 하늘사상은 다석의 하나 사상과 서로 비춘다. 다석은 기독교 안에 갇히지 않았다. 한민족 고유의 정신 뿌리와 세계 종교와 동아시아 우주론을 함께 보았다. 융은 심층 거울이다. 겉나를 넘어 깊은 자기로 가는 개성화 길은 다석의 참나와 얼나를 비추는 현대 심리학 거울이 될 수 있다. 다석의 통합은 이론 체계보다 먼저 몸맘얼 수행이었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 그 세 줄이 다석식 통합의 우리말 지도다. 이 아홉째 길은 학문 확장과 사상 대화다. 옛글과 새 학문, 동아시아와 서구, 종교와 심리학이 다시 하나 벼리로 꿰이는 자리다. #5. 아홉 길눈 — 한 인물 읽는 법 이 연재는 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아홉 개 길눈을 켠다. 길눈은 길을 보는 눈이다. 길눈이 없으면 인물은 정보가 되고, 길눈이 켜지면 인물은 빛이 된다. 첫째, 시대 숨막힘을 본다. 그 사람이 어느 어둠 속에 있었는지 본다. 망국, 식민, 전쟁, 종교 위기, 문명 갈림길, 가난, 제도, 폭력, 추방, 침묵. 그 압력이 어떻게 한 사람 숨을 깊게 했는지 본다. 둘째, 수월성 한 낱말을 잡는다. 세종은 정음 태양, 민세는 다사리 말뿌리, 단재는 역사 불칼, 톨스토이는 복음 맨몸, 간디는 진리 거듭남 몸살이, 함석헌은 씨알 역사화, 이현필은 청빈 현현. 한 낱말이 잡히면 한 사람 빛깔이 보인다. 셋째, 만남 결을 가린다. 몸으로 만난 만남, 책으로 만난 만남, 생각으로 만난 만남, 말뿌리로 만난 만남, 제자와 공동체를 통한 뒤이음 만남이 있다. 모든 만남은 다르게 빛난다. 넷째, 빛 성질을 본다. 언어 빛, 민족 빛, 경전 빛, 무교회 빛, 빈탕 빛, 비폭력 빛, 수학과 물리학 빛, 몸수행 빛, 공동체 실천 빛. 빛의 성질을 보아야 그 사람이 만다라의 어느 길에 서는지 알 수 있다. 다섯째, 다석 안 변환을 본다. 받은 것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본다. 톨스토이 금욕은 다석에게서 한 끼와 해혼이 된다. 노자의 허(虛)는 빈탕한데가 된다. 예수 말씀은 말숨이 된다. 붓다 무아(無我)는 제나 죽임과 얼나 솟남이 된다. 세종 정음은 한글 뜻글철학이 된다. 민세 다사리는 씨알 민주주의 말뿌리와 닿는다. 여섯째, 몸맘얼 수행 자리를 본다. 몸성히, 맘놓이, 바탈태우. 어느 인물은 몸을 세우고, 어느 인물은 마음을 비우고, 어느 인물은 받은 바탈을 태워 세상을 밝힌다. 어떤 이는 이 셋을 꿰어 의 길을 비춘다. 일곱째, 다석어로 다시 부른다. 예수는 말씀이 몸이 된 이다. 붓다는 제나를 비워 빈탕에 든 이다. 세종은 하늘소리를 글꼴로 연 이다. 민세는 다 말하고 다 살리는 다사리의 이다. 간디는 진리를 몸으로 거듭난 이다. 함석헌은 씨알을 역사 속으로 밀어 넣은 이다. 다석어로 다시 부르면, 인물은 박제가 아니라 말숨이 된다. 여덟째, 오늘 씨알 물음을 놓는다. 이 빛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AI 문명 앞에서, 인류세의 불안 속에서, 전쟁과 혐오와 민주주의 위기 속에서 이 인물은 무엇을 묻는가. 나는 내 몸맘얼에서 이 빛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아홉째, 만다라 좌표에 찍는다. 홀로 수행과 사회 실천 사이, 민족 주체와 세계 보편 사이, 언어·사유와 몸·삶 사이에서 그 인물을 본다. 중심의 참·없·얼나·씨알과 얼마나 가까운지, 어떤 빛깔인지, 어떤 선으로 다석과 이어지는지 본다. 그렇게 한 점 한 점 찍다 보면, 인물지도는 살아 있는 깨달음 별자리가 될 터이다.   그림5) 다석 류영모(왼쪽)과 학산 이정호(오른쪽)다. 다석은 1890년에 태어났고, 학산은 1913년에 났으니 다석이 23살 위다. 그렇다고 다석이 스승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다석은 학산과 더불어 ‘훈민정음’을 공부하고 주역 을 살폈다. 서로 더불어 공부를 나눈 셈이다. 물론 다석이 예순 여섯이었으니(1956년), 마흔 셋의 학산에게 일러줄 게 더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나이가 많다고 스승이 아니고, 나이가 젊다고 제자가 아니다. 다석은 그리 생각하였다. #6. 앞으로 펼쳐질 길 이제 길이 열린다. 처음에는 말글 뿌리로 간다. 세종을 만난다. 정음 태양을 본다. 이어 민세 안재홍을 만난다. 우리말 수 헤아림과 다사리 말뿌리를 본다. 그런 다음 민족 숨빛으로 들어간다. 단재, 시당, 위당을 만난다. 이어 오산 불씨를 지나 예수 길, 빈탕과 신비, 동아시아 회통, 해방과 씨알 전승, 현장 영성, 학문 확장과 사상 대화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 길은 대략 이렇게 펼쳐진다. 01) 다석철학 인물지도: 숨빛 얼개와 구조 02) 다석: 제소리로 깬 사람 03) 세종: 정음 태양 04) 민세 안재홍: 다사리 말뿌리 05) 단재 신채호와 시당 여준: 민족 숨빛 06) 위당 정인보: 조선학 깊은 우물 07) 남강 이승훈: 오산 불씨 08) 백이행: 민족교육 기틀 09) 고당 조만식: 무저항 몸 10) 춘원 이광수: 톨스토이 충격의 갈림길 11)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몸이 된 길 12) 우치무라 간조: 무교회 문 13) 김교신과 송두용: 성서조선 얼줄 14) 붓다: 제나를 비워 빈탕에 든 이 15)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비 돌파 빈자리 16) 노자와 장자: 빈탕한데 길 17) 공자와 맹자: 하늘바탈 길 18) 장재와 화담 서경덕: 기와 하나 철학 19) 톨스토이: 복음의 맨몸 20) 간디: 진리저항의 몸살 21) 함석헌: 씨알 역사화 22) 박영호: 말숨 증언자 23) 김흥호: 회통 해석자 24) 송기득: 다석신학 체계자 25) 이현필과 동광원: 청빈 현장 26) 임락경: 생명농업 몸살이 27) 김정호와 무등산: 가온씀 자리 28) 학산 이정호: 정역과 한글철학 길벗 29) 단애 윤세복: 대종교와 귀일(歸一) 길 30) 카를 융: 참나와 개성화 거울 31) 다석의 수학·물리학·메트로 32) 몸성히·맘놓이·바탈태우: 다석 수행 만다라 33) 다석철학 인물지도에서 씨알 만다라로 이 순서는 걷다 보면 길이 조금씩 바뀔 수 있다. 그러나 큰 흐름은 또렷하다. 말글에서 시작해, 민족과 교육과 종교와 수행과 실천과 학문을 지나, 다시 오늘 씨알에게 돌아오는 길이다.   그림 6) 1956년 6월 6일, 다석 나시고 사신 지 2만 2천 일 된 날 기념사진이다. 한마디로 환갑 기념사진. 다석 생신은 3월 13일이다. 다석이 기념하는 걸 싫어해 날을 피했으나, 제자들이 원해서 3개월 지난 6월 6일에 이 사진을 남겼다. 아랫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애제자 함석헌이다. #7. 지금, 왜 이 만다라인가 우리는 AI 문명 한복판에 있다. 묻기도 전에 답이 오고, 생각하기도 전에 문장이 온다. 말은 넘치는데 제소리는 드물다. 정보는 많은데 깨우침은 적다. 빠른 답은 깊은 앓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다석은 알맞이를 말했다. 알음앓이로 알음알이를 깨쳐 알맞이하는 길. 크게 앓아야 맘에 알밴다. 알이 알알이 열맺는다. 이 연재가 가려는 곳도 거기다. 인물들을 많이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인물들의 빛으로 오늘의 내 몸맘얼을 비춰보는 것. 다석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다석을 다시 사는 것. 한 깨달은 사람을 낳은 숨빛 만다라. 그 만다라는 아직 다 그려지지 않았다. 이제 하나씩 점을 찍고, 선을 긋고, 빛결을 살필 것이다. 가운데에는 참·없·얼나·씨알이 있다. 둘레에는 아홉 길이 돈다. 그 길마다 사람이 서 있고, 사람마다 빛이 있다. 그 빛마다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 있다. 첫 문은 말글에서 열린다. 세종 정음에서, 민세 다사리에서. 말문이 열리고, 말숨이 트이고, 씨알 길이 시작된다.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gjg6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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