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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박정희 독재정권 탄생 길 터준 초대 선관위원장

박정희 독재정권 탄생 길 터준 초대 선관위원장
[뉴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받아 들었다. 사광욱(史光郁, 1909~1983) 항목을 읽으며 한 가지 장면에서 손이 멈췄다. 1950년 1월 6일 국회프락치 사건 제11회 공판에서 재판장 사광욱이 법정에서 한 말이다. 소련군이 북한으로 들어온 뒤 공산독재정권을 세웠고…수백만 명의 동포들을 38선 이남으로 내쫓고 방황케 하고 아사시켰다. 피고인들은 이 사실을 아는가? 그리고 이어서. 반면에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해 하등의 영토적 야심 없이 태극기와 애국가를 틀림없이 숭상하는 마음으로 존중했다. 그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에 경제적·군사적·정신적 원조를 해주면서도 어떤 야심이 없다. 이것은 재판장의 법정심리 발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강연이었다. 그것도 극우 반공강연. 그리고 이 강연을 들은 피고인들은 전원 유죄를 선고받았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친일의 씨앗, 평안북도 철산에서 사광욱은 1909년 10월 7일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병철은 독실한 예수교 장로회 신자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집안이 처음에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강우규(1855~1920) 의사가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을 조선인을 진정으로 유쾌하게 한 일로 기록했다. 그런데 이 아버지가 1931년과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철산면 면협의원에 선출되며 점차 친일로 기울었다. 아들 사광욱도 그 길을 따랐다. 1940년 10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일제강점기 경성지방법원 판사로 재직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후미무라(史村) 미쓰이쿠. 형 사경욱도 같은 해 합격해 조선총독부 검사가 됐다. 형제가 나란히 일제의 사법 권력에 참여하고,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해방 후에는 재빠르게 변신해 미군정청 경성지방법원 판사가 됐다. 세계사 속의 동류, 변신의 달인 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궤적을 걸은 인물이 떠오른다.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민주주의의 이론가로 명성을 쌓았다가, 나치가 집권하자 즉각 나치 법이론의 대표 이데올로그로 변신했다. 슈미트의 변신은 지적 변화가 아니라 생존과 권력접근을 위한 선택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Emilio Eduardo Massera, 1925~2010)는 군사 쿠데타 후 민간인을 탄압하는 군부체제에서 핵심역할을 하다가, 나중에 민주화 이후 자신을 피해자인 척 연기하며 빠져나오려 했다. 결국 2010년 재판을 받고 유죄를 선고받기 직전 사망했다. 사광욱의 변신 목록은 이렇다. 친일 판사 → 친미 판사 → 5·16 쿠데타 협력자 → 박정희 대통령 탄생의 법률조력자 → 부정선거를 막으려 한 선관위원장. 그리고 마지막에는 유신에 의해 쫓겨난 피해자.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74년 생애 안에 들어 있다. 에밀리오 에두아르도 마세라, 1975년.(위키피디아)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 6.5%를 범죄자로 만든 재판 사광욱의 반헌법 행위 정점은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 재판이다. 당시 제헌국회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동시 철수를 유엔에 진언한 소장파 의원 13명이 이승만(1875~1965) 정권에 의해 남로당 간첩으로 몰렸다. 제헌의원 전체의 6.5%에 달하는 숫자였다. 사광욱은 이 사건의 재판장을 맡았다. 공판기록은 주한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영문으로 번역해 보존했다. 언론학회장과 방송통신위원장을 지낸 언론학자 김정기는 헨더슨과의 인연 덕에 이 기록을 바탕으로 연구했는데 이 재판을 정치적 색깔 심리 로 규정한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사광욱은 피고인들의 고문 호소를 완전히 묵살했다. 노일환 의원이 법정에서 나는 헌병대에 거짓자백 했습니다. 내 건강이 고문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해도 사광욱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둘째, 검찰이 제출한 암호문서 를 검증도 없이 증거로 채택했다. 셋째, 변호인이 신청한 증인을 단 한 명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법정에서 미국 예찬 강연을 했다. 피해자 신성균 의원의 아들 신현국은 이렇게 정리했다. 사광욱은 예단으로 가득 찬 심리를 진행했다. 결과는 13명 전원유죄. 최고 10년부터 최하 3년까지 실형이었다.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항소를 준비하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풀려난 뒤 서용길 의원만 제외하고 12명이 납북됐거나 월북했다. 이에 따라 진실 규명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2025년 4월 15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 으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다른 유족들이 진행한 재심은 오는 12일 서울지법에서 첫 심리가 열린다.   국회프락치 사건’의 중요한 증인이 된 정재한에 관해 보도한 동아일보 1949년 7월28일자 지면. 왼쪽은 정재한의 사진이다. 경찰이 파주까지 미행해 신체를 수색한 끝에 국부에서 암호문서를 찾아냈다고 한다. 정재한은 변호인들의 거듭된 요구에도 끝까지 법정에 나오지 않았고, 1949년 9월3일 별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뒤 ‘국회 프락치’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월 6일 서둘러 사형 집행됐다. 동아일보 지면 갈무리 1961년 5·16, 군복 입은 권력에 협력해 동료를 잘랐다 5·16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대법원 감독관을 임명해 사법부를 통제했다. 감독관 홍필용 대령은 대법원판사 사광욱에게 자문을 구했고, 사광욱은 적극 협력했다. 군사정권이 228명의 판사를 재임명할 때 사광욱은 재임용 명단을 심사하고 감수했다. 군부가 사법부를 숙청할 때 내부의 협력자 노릇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살아남아 대법원판사로 재임용됐다.   1963년 1월 사광욱의 초대 선거관리위원장 취임 기자회견 1963년, 박정희의 후보등록을 눈감아주다 사광욱의 반헌법 행위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다. 박정희(1917~1979)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재직 중 공화당에 입당하고 대통령후보 지명을 받았다. 이는 당시 헌법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의 정당가입 금지조항을 위반한 명백한 절차상의 잘못이었다. 야당은 박정희의 후보등록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초대 위원장 사광욱이 이끄는 중앙선관위는 박 의장이 공화당에 입당한 것이 9월 4일이며 총재직 취임동의서는 9월 5일자로 되어 있으므로 9월 3일에 개정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고 회답했다. 공화당 입당과 후보지명이 8월 30일과 31일에 이루어졌는데, 위반 사실이 드러나자 9월 3일 법을 개정해 소급적용한 것을 합법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독재정권 탄생의 법률조력자가 됐다. 그런데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1964년 대통령 박정희가 선관위를 연두 순시하겠다고 통보했을 때 사광욱은 행정부의 장이 헌법상 독립기관을 방문할 수 없다 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그를 선관위 독립성을 지킨 영웅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한 단면만 본 것이다.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고는, 대통령이 방문하겠다고 하자 원칙을 들어 거절한 것이다. 이 일관성 없는 태도가 사광욱이라는 인물의 초상이다. 1967년 6·8 부정선거 막으려 했지만 결국... 1967년 6·8 부정선거 당시 선관위원장 사광욱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공한을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에게 보냈다. 박정희가 대통령 자격으로 여당 후보 지원유세를 하겠다고 하자 강하게 반대했다. 이 반대로 박정희는 일시 계획을 취소하기도 했다. 그런데 공화당 추천 선관위원 김치열이 가부간의 결정을 하자 고 설득해 긴급회의를 열었고, 무기명 비밀투표로 5 대 4가 나왔다. 세 명이 소신을 바꿨다. 결과는 대통령은 공화당 총재 자격으로 유세할 수 있다 . 사광욱의 입장은 뒤집혔다. 1967년 12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사광욱은 탁자를 치며 울분을 토했다. 6·8 선거는 공명이 아니었다. 화성의 개표 부정 소식을 듣고는 통곡했다. 그러나 그 울분은 선거 전에, 후보등록 단계에서 원칙을 세웠어야 했다.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국회위원 총선거에서 공화당 당원들의 투표소 난입과 기물 탈취 등 대규모 불법, 탈법 행위가 전국적으로 저질렀다고 보도한 언론 기사들. 동아일보 연합뉴스 재인용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역사학자들이 독일 나치 부역 법관들을 다룰 때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있다. 변신은 가능하다. 그러나 변신이 과거의 잘못을 지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사광욱은 말년에 부정선거를 막으려 했고, 국가배상법 위헌판결에 찬성의견을 냈고, 그 결과 유신 때 쫓겨났다. 그러나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 판결이, 1961년 쿠데타 협력이, 1963년 박정희 후보등록 눈감아주기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1949년 국회프락치 사건을 떠올렸다. 국회의원 13명을 남로당 간첩으로 처벌한 최초의 공안 조작 판결이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을 결정해버렸다 는 『반헌법행위자열전』의 평가가 머리를 맴돌았다. 제도권 내에서 전쟁을 막고 평화적 대화를 추구하는 세력을 소멸시킨 그 판결이 한국현대사 70년을 흐르고 흘러 2024년 12월 3일 밤에도 이어진 것이 아닐까.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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