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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잇의 전환이야기】조선소 전동화, 바다 위가 아니라 도크 안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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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산업에 있어 전동화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는 전기추진 선박을 떠올린다. 배터리, 수소연료전지, 암모니아 엔진. 그러나 현실에서는 더 근본적인 조건이 빠져 있다. 전동화는 아직 바다 위가 아니라, 도크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전력의 경계가 없는 산업 대형 조선소는 하나의 도시와 같다. 블록 제작, 절단과 용접, 도장, 크레인 운영, 시운전까지 모든 핵심 공정이 도시급 전력에 의존한다. 문제는 이 거대한 에너지 흐름 속에서 누가, 어떤 공정에서, 얼마나 전력을 소비하는지 정밀하게 추적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조선소 배전망은 수십 년간 증설과 개조를 반복하며 복잡하게 얽혀왔다. 강재가 블록으로 절단되고, 용접·도장·조립을 거치는 과정은 단일 라인이 아니라 수십에서 수백 개의 작업 그룹이 같은 용접대, 같은 동력선, 같은 배전망을 공유하는 형태로 돌아간다. 전력은 복수의 회선을 통해 공급되지만, 어떤 회선에 어떤 장비가 연결되어 있고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파악이 어렵다. 사용량을 개별 주체로 분리할 수 있는 계측 장비는 거의 설치되어 있지 않다.   왜 아무도 전력 분리를 시도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기술 부족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시도할 수 없었다. 첫째, 생산 동선 자체가 분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조선은 자동차처럼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제품이 흘러가는 산업이 아니다. 작업이 끝날 때마다 장소가 바뀌고, 같은 공간에서 조선사 소속 인력과 협력사 인력이 번갈아 작업한다. 블록 제작, 도장, 탑재와 같은 작업은 동일한 공간에서 서로 다른 주체가 교차로 수행한다. 공정 단위나 공간 단위로 전력을 따로 계량해 특정 업체나 특정 공정만을 분리 측정하는 것은, 현재의 생산 구조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둘째, 전력 비용의 구조 자체가 변화를 막아왔다. 대형 야드의 전력 비용은 조선소 운영비의 일부로 통합 처리되어 왔다. 수백 개 협력업체가 동일한 배전망을 사용하지만, 개별 사용량에 따라 비용을 정산하는 체계는 갖춰져 있지 않다. 전력은 공정 효율의 변수가 아니라 고정비 항목으로 취급되었고, 사용량은 관리 대상이 아니라 운영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이 구조에서 전력 분리를 시도한다는 것은 협력사 비용 분담 체계 전체의 재설계를 의미한다. 단순히 계량기를 설치하는 문제가 아니라, 야드와 협력사 간 계약 관계와 비용 배분의 근본적인 변경을 수반하는 일이다. 셋째, 선투자를 감수할 동력이 없었다. 스마트 계측 시스템 구축, 배전망 재설계, 에너지 관리 시스템 도입에는 상당한 초기 투자가 필요하다. 반면 그 이익인 탄소 규제 대응력 향상, ESG 평가 개선, 금융 비용 절감은 장기적이고 간접적이다. 비용은 지금 발생하지만 효과는 수년 뒤에 나타나는 구조에서, 전력관리는 전략 자산 이 아니라 원가 항목 으로 인식되어 왔다. 일부 야드에서 특정 라인에 스마트 계량기를 시범 설치하거나, 야드 내 협력사별 전력 사용량을 분리 관리하는 사례가 존재하기는 한다. 이는 현장 실무자들이 제한된 예산과 구조적 제약 속에서 어렵게 만들어낸 시도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조차 전사적 투자 결정 없이는 구조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대다수 대형 야드에서 전력 분리와 탄소 회계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규제가 전동화의 동력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인식이 바뀔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오고 있다. 공급망 전체의 배출 책임을 묻는 Scope 3 공시가 제품의 건조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을 평가하는 LCA(Life Cycle Assessment, 전생애주기평가) 기준과 맞물리며, 탄소 규제의 단위를 조선소 전체에서 선박 한 척 으로 세분화하는 경향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야드 전체의 배출 합계라는 모호한 수치를 넘어, 개별 호선의 제조 단계에서 발생한 탄소 집약도까지 정밀하게 증명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만약 조선소가 이 선박은 제조 과정에서 총 몇 MWh를 사용했고, 해당 전력의 탄소 계수는 얼마였다 고 명확히 제시할 수 있다면, 이는 단순한 공정 데이터를 넘어 선박의 친환경성을 입증하는 압도적인 수주 경쟁력이 된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지금 한국 조선업은 호황기다. 수주 잔고는 3년치를 넘기고, 가동률은 100%를 상회한다. 그러나 이 호황이 오히려 위험의 시점이기도 하다. 탄소 공시 의무가 현실화되는 시점 - KSSB의 Scope 3 의무 공시에 부여된 유예기간은 3년이다 - 에 야드는 생산 일정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에 놓인다. 두 압력이 동시에 만나면, 생산도 규제도 대응하지 못하는 교착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아직 생산 이외의 것에 눈을 돌릴 여력이 남아 있는 지금, 전력 인프라의 재설계를 끼워 넣을 수 있다. 이 시기를 놓치고 생산 피크에 진입한 뒤에는, 배전망을 건드릴 빈틈 자체가 사라진다.   전동화의 진짜 출발점: 전력의 추적과 분리 조선소 전동화의 출발점은 장비 교체가 아니다. 전력의 경계를 만드는 일이다. 조선소 전동화의 출발점은 장비 교체가 아니다. 전력의 경계를 만드는 일이다. 공정별 실시간 모니터링, 협력사 전력 사용의 구조적 분리, kWh 기반 탄소 회계 체계, 이 세 가지가 갖춰질 때 조선소는 단순 제조 공장을 넘어 자체 에너지 흐름을 관리하는 통합 에너지 관리 체제로 전환된다. 거대한 야드를 한꺼번에 멈출 필요는 없다. 공정별로 여유가 있는 곳부터 순차적으로 전력의 경계를 긋기 시작하면 된다. 조선소는 이미 막대한 부하를 가진 단일 계통(Grid)안에 묶여 있기에 내부 에너지 흐름을 한곳에서 통제할 수 있는 잠재적 기반을 갖추고 있다. 복잡한 생산 동선과는 별개로, 전력망에 정밀한 계측의 마디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조선소는 그 자체로 효율적인 에너지 통제가 가능해진다. 부족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전력을 추적하고 전환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실질적인 의지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이 생긴다. 현재 한국 조선 3사가 내세우는 AI, 디지털 트윈, 자동화 로봇 기반의 스마트 야드 는 데이터 기반의 실시간 생산 관리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야드 안에서 전력이 어떻게 흐르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 상태에서 스마트 야드가 가능한가? 공정별 전력 사용 패턴을 모니터링할 수 있어야 자동화 설비의 부하 관리가 가능하고, 수요를 예측해야 에너지 연계와 피크 제어가 현실화된다. 전력 데이터라는 토대 위에서만 스마트 야드의 기술적 실체가 완성되는 것이다. 나아가 전동화는 제조 단계의 탄소 투명성 문제다. 한국 조선소의 친환경 선박 설계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배출한 탄소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친환경 선박을 비친환경적으로 만들었다 는 모순에 빠진다. 제조 단계의 탄소 투명성이 선박의 시장 가치를 좌우하게 될 시대에, 전력을 추적하지 못하는 야드는 자신이 만든 기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조선만의 과제가 아니다 — 그러나 조선은 뒤처져 있다 에너지 흐름을 추적하고 탄소를 설명해야 하는 과제는 조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철강과 석유화학도 같은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이 산업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포스코는 제철소 전 공정에 걸친 에너지 관리 시스템을 운영하며 공정별 탄소 배출을 추적하고 있고, 석유화학 플랜트 역시 설비 단위의 에너지 계량과 실시간 모니터링을 도입한 사례가 늘고 있다. 생산 구조의 복잡성으로 따지면 연속 공정 기반의 철강이나 석화가 조선보다 단순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전력의 경계가 없는 구조에서는 탈탄소를 계산할 수 없다 는 명제는 산업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다른 산업이 이미 그 경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동안, 조선은 아직 출발선에 서 있다.   결론 전동화는 선박 추진 방식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소의 에너지 운영 체계를 재정의하는 일이 시작이다. 전력을 추적하고 설명할 수 있는 구조가 먼저인 이유는 단순하다. 탄소를 계산하려면 전력의 경계가 필요하고, 스마트 야드를 실현하려면 전력 데이터가 필요하다. 전동화는 이 모든 것의 공통 기반이다. 한국 조선 3사는 스마트 야드, 자동화, 친환경 선박을 미래 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 전략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믿는다면, 그 실현의 첫 번째 조건이 무엇인지도 분명해진다. 도크 안의 전력 흐름을 들여다보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전동화는 바다 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도크 안, 배전반 앞, 전력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그 순간에서 시작된다. ☞지혜련 연구원은 지혜련 연구원은 에너지 정책 연구기관인 플랜잇(PLANiT)에 소속되어 활동 중이다. 플랜잇은 에너지 전환경로를 식별하는 모델 기반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는 정량적 연구 기관이다. 지 연구원은 CFD 기반 연구를 수행해 온 조선• 해운 분야 연구자로, ESG 실무 경험도 보유하고 있다. 2006년 한국과학기술원(KORDI, 현 KRISO)에서 연구를 시작했으며, 2008년부터 대우조선해양 선박해양연구팀에서 15년간 CFD를 활용한 선박 기술 연구를 수행해왔다. 2022년부터 ESG 실무를 담당했으며, 현재는 해운• 조선산업의 탈탄소 전략, LCA 기반 온실가스 감축 평가, 국제 규제 대응 등을 주제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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