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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우리는 노래를 만들었고, 김민기는 시대를 만들었다”

우리는 노래를 만들었고, 김민기는 시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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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전야인 1971년은 한편에선 청년 학생의 에너지가 폭발하고 다른 한편에선 정권의 억압이 압착기처럼 사회를 짓누를 때였다. 그해 4월 온갖 부정 불법에도 근소한 차이로 3선에 겨우 성공한 박정희는 이참에 아예 직선제를 없애고 영구집권할 속내를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그 길을 가로막는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우선 거슬리는 것은 청년들의 개방성과 자유정신이었다. 여기에 강력한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노래였다. 노래는 통제와 억압을 비웃고 거부하면서, 게릴라처럼 어디에나 출몰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청개구리 홀이 그해 말 문을 닫게 된 것은 이와 무관할 수 없었다. 대학생들 서넛만 모여도 ‘짭새’(정보 형사)들이 기웃거리는 시대에 명동 한복판에서 젊은이 200여 명이 매일 북적거리는 꼴을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명동을 뒷덜미에서 넘겨보는 남산 기슭의 중앙정보부로서는 여간 신경이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1970년 문을 연 서울 명동 YWCA 청개구리 홀은  청춘들의 해방구였다. 압제속에서 문을 닫았지만 새로운 노래운동의 불씨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사진출처:네이버블로그 (추억의 편린들 ) 청개구리 홀은 그해 7월 문을 닫았다. 운영 주체인 서울YWCA는 ‘적자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수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면 몰라도 청년운동을 전면에 내세운 단체가 ‘운영 적자 때문’에 청년문화의 명소를 폐쇄한다니, 소가 웃을 일이었다. 홀은 연일 젊은이들로 차고 넘쳤다. YWCA로서는 문 닫을 이유보다 확장 해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그러나 서울YWCA 이사진은 이 손바닥만 한 젊은이들의 숨 쉴 곳을 없앴다. 아니 없애야 했다. 그러나 청개구리 홀이 사라진다고 해서, 이미 젊은이들 가슴에 지핀 새로운 노래 운동의 불씨마저 꺼진 건 아니었다. 억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말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게 많아지는 법. 노래 운동이라는 화톳불은 발에 밟히면서 사방으로 불씨를 날려 보냈고, 곳곳에 새로운 불길을 피워냈다.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포크가 명동의 음악다방을 중심으로 퍼졌고, 한 편에서는 민요를 현대적 감성에 맞게 되살리고 창작해 보급하는 민요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며, 다른 한 편에서는 시대의 질곡에 허덕이는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권력의 억압에 음악적으로 맞서는 ‘프로테스트 포크’ 운동이 활발해졌다. 청개구리의 포크 가수들은 지향하는 바에 따라 이 세 갈래로 나뉘어 각자의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김민기만큼은 세 갈래의 흐름 모두에 발을 들이고, 각 장르를 선도하는 이들과 음악적 교류를 지속했다. 송창식 이장희 조영남 등 대중적 포크 가수들과도 긴밀하게 지내고, 서유석 한돌 등 민요 쪽 가수들과도 함께 일을 했으며, 방의경 등 저항 계열의 포크 가수들과도 협업했다. 당시 이미 양희은에게 ‘석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구석’에 박혀 있기만 했던 김민기였다. 그러나 그는 노래에 관한 한 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손 안 대는 데가 없었다. 노래에 진심인 가객들 가운데 가깝게 지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실 김민기는 노래에 관한 한 상업성 강한 감성적인 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 자신이 눈물이나 질질 짜는 사랑 타령에 대해 진저리를 치곤 했다. 그러나 그건 상업적인 노래를 자신은 부르지 않겠다는 것이지, 노래 자체를 싫어하거나 그런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미워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는 김추자의 열렬한 팬이었고,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과는 막역했으며, 이장희와는 형 동생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청개구리홀은 문을 닫았지만 노래운동은 더 활발해젰다.김민기를 포함한  통기타 가수는 물론 록, 재 즈 할 것 없이 젊은 가수들이 참여해 청평에서 대규모 페스티벌을 열었다. 사진출처: 사사작가 남성원 세상사는이야기 야외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김민기.기타에 마이크를 대고 있는 양희은, 서서 기타 반주를 하는 이용복의 모습이 정겹다. 사진 오른쪽은 이백천PD. 2019.10.20. 한겨레신문 청개구리 홀이 문을 닫자마자 청개구리 문화를 이끌던 통기타 가수들은 DBS 이백천, CBS 김진성, TBC 신광철 피디 등 민영방송국의 지원과 서울YWCA의 후원으로, 서울 근교 청평 안전유원지에서 대규모 페스티벌을 기획했다. 1969년 8월 15일부터 사흘간 뉴욕 근교의 한 농장에서 열려,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본뜬 것이었다. 청평페스티벌은 우드스톡과 록, 포크, 재즈, 블루스 등 모든 팝 장르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가스들을 다 끌어모았다. 완전한 잡탕이었지만, 숫자만큼은 무려 100여 명이나 됐다. 김민기는 이런 행사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해 ‘검은 지프차’ ‘강변에서’ 등의 노래를 불렀다.   학전 20주년 기념공연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김민기의 친국들에 출연한  동료이자 선배인 세시봉 멤버들의 공연 모습.. 왼쪽부터 송창식 이장희 윤형주 조영남  김세환.  사진: 학전 제공  40년이 지난 2011년 3월 30일 동숭동 학전 소극장에서는 학전 창립 20주년을 기념하는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5-김민기의 오래된 친구들’이 열렸다. 그의 친구로 호명돼 무대에 오른 이들은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포크 음악으로 한국 대중음악계를 사로잡던 이들이었다. 감성 포크 분야를 이끌던 당대의 ‘아이돌’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그가 누구보다 따랐던 이는 송창식이었다. 김민기의 노래 ‘친구’ 악보를 보고 또 노래를 듣고는 김민기가 먼저 노래했다면, 나는 노래할 생각도 안 했을 것”이라는 이다. 그는 윤형주, 이익균과 트리오로 활동하던 중 이익균이 입대하면서, 1968년 2월 윤형주와 듀엣 트윈폴리오를 구성해, 당대의 청춘 스타가 되었다. 트윈폴리오 시절 대표곡 ‘하얀 손수건’은 그리스 가수 나나무스꾸리의 노래를 번안한 것이고 ‘낙엽’은 미국 에벌리 브라더스의 ‘렛 잇 비 미’를 번안한 노래였다. 1969년 말 싱글로 활동하기 시작한 송창식은 데뷔 초기 몇 편의 자작곡을 노래했지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가 번안곡을 버리고 자작곡 가수로 전환한 것은 1970년 김민기가 그의 연습실로 찾아와 건넨 ‘친구’ 악보를 보고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서울예고를 수석으로 입학했다가 중도에 자퇴한 그는 가창이면 가창, 작곡이면 작곡, 기타면 기타 등 노래에 관한 한 어떤 분야에서든 최고라고 자부하던 터였다. 부인이 작곡을 전공했던 터였니, 한쪽이 노랫말을 쓰면 다른 쪽이 선율을 입히기만 하면 됐다. 그가 싱어송라이터로 가요무대를 평정한 것은 1974년 ‘피리 부는 사나이’였다. 1975년 ‘왜 불러’로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한국 포크의 정상에 올랐다. 송창식은 암울했던 70년대 중후반 한국 가요사에 빛나는 감성적인 노래로 낙담한 이들을 위로했다. 그는 1978년 겨울 김민기의 부탁을 받고 음악극 을 녹음하는데 자신의 연습실을 내줬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그야말로 ‘작살날’ 일이었지만, 김민기의 일이라면 자신의 영혼까지 털어 내줬다.   송창식은 김민기의 공장의 불꽃을 몰래 녹음해 주는 등 김민기를 아끼고 도왔다. 사진은 김민기 작사, 송창식 작곡으로  제2의 애국가로 불리는 내나라 내겨레가 수록된 송창식 앨범 송창식과 트윈폴리오 멤버였던 윤형주가 처음 선보인 노래는 ‘조개껍질 묶어’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제목 없는 노래였다.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되면서, 후렴으로 등장하는 ‘라라라’가 이름을 대신하게 됐다. 이 노래는 1970년 지어졌는데 음반에 실린 것은 1971년 발매된 윤형주와 김세환의 애창 모음곡에서였다. 자작곡 가수로서 강력한 대중적 감성과 반항적 일탈로 팬들을 사로잡은 이는 이장희였다. 나이로는 김민기보다 3년 선배지만 대중음악계에 발을 디딘 것은 1년 늦었다. 1970년대 초중반 포크록의 전설이 된 그는 누구보다 김민기의 음악과 삶을 바르게 평가하고 존중했다. 그는 훗날 김민기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렇게 존경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우리는 노래를 만들었지만, 김민기는 시대를 만들었다.”   이장희는 김민기를 누구 보다도 잘 이해했고, 평가했다. 이장희의 삶터인 울릉천국에서 이장희의 옛동료들과 김민가가 기념사진을 찍고있다. 2011.3.14  경북일보  이장희는 1971년 DJ 이종환의 추천으로 무대에 등장했고, 노래 ‘겨울 이야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최인호가 습작으로 썼던 소설의 한 대목을 그대로 통기타 반주에 맞춰 낭송하는, 이른바 ‘토크 송’이었다. 무려 5분 가까이 서정적인 반주와 애잔한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당시 가요계는 물론 원작자 최인호까지도 놀라게 했다. 최인호는 이 노래를 듣고는 한 일간지에 연재하던 여주인공의 이름을 노래 속의 ‘경아’로 바꿨다. 정성조가 음악감독을 맡아 소설 (감독 이장호)을 영화화할 때 이장희도 그 곁에 있었다. 과 함께 최인호, 정성조, 이장호, 이장희 등 네 서울고 동문은 당대의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이장희는 1972~1975년 ‘그 애와 나랑은’ ‘비의 나그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그건 너’, ‘한 잔의 추억’ 등 히트송을 쏟아냈다. 그 자신이 당시 최고의 흥행 상품이 되어 1972년과 1973년에만 3집까지 출시했다. 그러나 1975년 그의 노래들이 대부분 금지곡으로 묶이고, 그는 연예협회에서 제명 처분을 당했으며, 이듬해에는 대마초 파동 속에서 신중현 윤형주 이종용 윤형주 등과 구속됐다. 그는 정치권력이 쥐락펴락하는 무대를 아예 떠나 버렸다. 이후 이장희는 작곡가 혹은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등 히트곡을 쓰기도 했지만. 패션 사업가로 길을 완전히 틀어버렸다. 1989년엔 미국으로 건너가 방송국을 운영해 성공하기도 했다. 2004년 귀국해 울릉도에 정착했다. ‘김민기의 오래된 친구들’ 콘서트에서 이장희는 대표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낭독했다. 민기는 노래하는 친구 중 막내입니다. 말도 없고 수줍은 민기의 노랫말과 노래는 전무후무한 스타일로 독보적입니다. 독보적이란 말이 딱입니다. 어찌해 아침이슬 같은 가사를 쓰고 그런 멜로디를 쓰는지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 제겐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민기가 다시 기타를 들고 ‘형, 이 노래 들어봐’라고 하며 다가오기를. 민기야 죽지 마라.” 이장희는 그날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불렀다. 모두 마흔 살의 김민기를 위한 헌사처럼 들리는 노래였다. 이장희가 살고 있는 울릉도 ‘울릉천국’에는 아트센터가 있고, 그곳에는 김민기의 노래 ‘아침이슬’ 친필 악보가 전시돼 있다. 이장희는 ‘김민기의 오래된 친구들’ 콘서트가 열리기 전 찾아온 김민기와 함께 북면 천부초등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에게 기타와 앰프 등 악기를 기증했다. 아트센터 광장에는 김민기의 친필 사인과 이름이 새겨진 비석도 있다. 울릉도에는 안용복기념관 앞마당에 송창식이 작곡하고, 김민기가 작사한 노래 내 나라 내 겨레 노래비도 있다. 한국 포크를 대표하면서도, 예술가곡을 포함해 한국음악사에서 최고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노래다.   울릉도 안용복 기념관 앞에 마련된 내나라 내겨레 노래비.노래비의 글씨는 김민기가 직접 썼다.네이버 카페. 이 노래는 한국 최초의 연예 전문기자로 꼽히는 정홍택과 이백천의 기획으로 1971년 말 탄생했다. 두 사람은 쎄시봉의 프로그램 기획자이자 진행자로 손발을 맞춰온 사이였다. 이백천은 김민기를 정홍택에게 소개하기에 앞서 이런 제안을 했다. ‘김민기와 양희은을 주축으로 통기타 그룹을 결성해 전국 대학교 순회공연을 하자!’ 포크 음악을 전국의 대학가로 확산하자는 것이었다. 정홍택의 반응은 불문가지였다. 이백천은 두 사람 이외에 조영남, 송창식, 윤형주, 방의경 등으로 ‘캠퍼스 크루세이더’를 결성했다. 대학가 순회공연에 나서자니 상징적인 곡이 필요했다. 정권의 눈치도 살펴야 했다. 살벌한 시대였으니 ‘애국을 표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취지를 송창식에게 전하자, 얼마지 않아 송창식은 악보 한 장을 건넸다. 작사자는 김민기였다. 순회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다만 이 노래는 1972년 1월 KBS TV가 신년 특집으로 제작한 프로그램 젊음의 행진’에서 송창식, 김민기는 물론 트윈폴리오, 조영남, 김세환, 이장희, 양희은, 정미조 등 출연자들의 떼창으로 불렸다. 이 프로그램, 특히 이 노래가 박정희 가족에게 호평을 받으며, ‘젊음의 행진’은 KBS TV의 정규프로그램으로 편성됐다. 김민기는 단독으로 이 노래를 한 번도 청중 앞에서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다부지면서도 당당한 노랫말과 웅혼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은 훗날 애국가 대신 국가로 쓰자는 제안이 나올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2016년 12월 3일 서울 광화문, 공교롭게도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집회에서 가수 한영애는 헌정사상 최대였다는 시위 군중 앞에서 이 노래를 불러 그 진가를 세상에 알렸다. 이 노래는 조영남의 앨범에 처음 수록됐다. 조영남은 유신정권 말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김민기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나오고 나서 소식이 뚝 끊기더니 김민기가 ‘어디론가 끌려가 맞아 죽었다’라는 소문이 들렸다. 조영남은 그동안 김민기의 ‘행적’과 유신정권의 폭력적인 행태로 볼 때 소문이 필시 사실일 것이라고 믿고, 그날로 당시 유행했던 뮤지컬 의 한 노래에 가사를 붙여 김민기를 애도했다. ‘가버린 내 친구여’로 시작하는 ‘김 군에 관한 추억’이다. 노래는 이렇게 끝난다. 너의 기타 치던 솜씨는 일류였지/ 너의 노래 속엔 뜻이 있었지// 단지 노래를 불러 출세하기가 너무 쑥스러워/ 말없이 가곤 소식 없는 친구여// 가버린 내 친구여 아침이슬처럼”. 영락없는 김민기 이야기다. 송창식은 를 1974년 저의 앨범에 포함했고, 김민기는 1974년 윤지영의 앨범을 제작하면서 이 노래를 포함했다. 그때 제 목소리로 서사적 내래이션을 삽입해 노래의 웅혼한 맛을 살렸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이미 정권의 눈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앨범은 발매될 수 없었다. 정홍택은 이백천이 기타를 잘 치고 곡을 잘 만드는 뛰어난 학생이 있다”라며 김민기를 데리고 왔을 때 김민기의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그(김민기)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건넨 부탁이 있었다. ‘맥주가 마시고 싶다. 돈이 없어서 마실 수가 없으니 맥주 좀 사라.’ 너무나 낮고 애절한 목소리여서 웃지도 못했다. 김민기는 그저 맥주가 마시고 싶을 뿐인, 주머니가 빈 청년이었다.” 김민기는 맥주를 좋아했다. 맥주를 먹으면 밥도 안 먹었다. 술만 마시는 그에게 누군가 곁에서 ‘밥 먹으라’고 성화를 부리면, 맥주를 가리키며 이게 보리밥 아니야?”라고 대꾸하곤 했다. 그가 번안 포크의 대부였던 서유석을 만나던 곳도 주로 생맥주 홀인 ‘명동장’이었다. 그를 만날 때면 자신이 작곡한 노래 악보를 들고 가곤 했는데, ‘한 번 봐달라’는 건 핑계고 선배에게 맥주 한 잔 얻어 마시는 게 더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서유석은 무대에 서려고 하지 않는 김민기 대신 그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서유석도 김민기의 모습에 대해 기억 한 토막을 남겼다. 어느 여름날 ‘아침이슬’과 ‘친구’의 악보를 들고 왔는데 ‘헐렁한 란닝구(러닝 셔츠)에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평생 변하지 않던 김민기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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