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징 이 공정 이 되는 순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양한 주제로 교육을 비평하는 글을 써 온 정용주 천왕초등학교 교장이 우리 교육의 토대를 진단하면서 유네스코가 제기한 교육에 대한 새로운 사회계획에 대해 5회에 걸쳐 생각을 나누는 글을 연재한다(편집자 주).
교권보호와 학폭 대책을 둘러싼 최근의 정책 언어는 유난히 즉시”라는 부사를 사랑하는 듯 보인다. 즉시 분리, 즉시 차단, 즉시 신고, 즉시 조치라는 문장들이 늘어날수록 현장은 더 안전해졌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2023년 7월 18일 이후의 공교육은 사건을 해결”하기보다 위험을 격리”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그 기울기는 교육의 언어라기보다 분쟁의 언어를 닮아 갔다. 이 글은 그 변화의 속도를 탓하려는 글이 아니라, 그 속도를 낳는 정서의 구조를 묻는 글이다.
즉시”는 중립적 부사가 아니다. 즉시”는 시간을 삭제하는 단어이며, 숙의와 관찰과 맥락화를 사치로 만드는 단어이다. 학교는 본래 느린 기관이다. 학교의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아이의 변화를 관찰하고 관계를 조정하며 공동체의 규범을 합의하는 데 필요한 시간의 형식이다. 그 형식이 무너질 때 학교는 빨라지지만, 그 빨라짐은 대개 학습의 효율이 아니라 분쟁의 비용을 줄이기 위한 가속이다. 교사가 더 빨리 문서를 만들고, 학교장이 더 빨리 분리를 결정하고, 교육청이 더 빨리 민원을 배당하는 방식으로 학교의 하루가 재편된다.
서이초 이후 한국 사회가 보여 준 집단적 반응은 단순히 교사를 보호하자는 정서에만 있지 않다. 보호”는 곧바로 처벌”과 결합했고, 회복”은 차단”과 가까워졌다. 이때 공정은 관계를 복원하는 기술이 아니라, 위반을 응징하는 일관성으로 재정의되기 쉽다. 응징이 공정이 되는 순간, 규율은 교육적 장치가 아니라 사회적 불안을 봉합하는 임시 칼날이 된다. ‘가해자에게 합당한 대가를’이라는 문장이 반복될수록, 학교는 교육의 장소이기 전에 ‘정서적 배상’을 수행하는 무대가 된다.
여기서 개념 하나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음의 상호성(negative reciprocity) 이라 불리는 정서-행동의 습관이다. 음의 상호성은 단순한 복수심이 아니라, 위반을 제재함으로써 규범을 지키게 만드는 사회적 자동반사이다. 불공정에 대해 ‘비용을 치르더라도’ 벌을 주려는 성향은 공동체를 지키는 장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균형을 잃는 순간, 사회는 신뢰로 굴러가기보다 처벌 가능성으로 굴러가게 된다. 학교 규율이 과열되는 조건은 대체로 바로 여기에 있다. 위반의 제재는 빨라지고, 관계의 복원은 느려지고, 그 느림은 가해자 편들기”로 오해되기 쉬운 분위기가 형성된다.
정책의 분절성은 이 정서 구조 위에서 발생한다. 학교폭력 학생을 분리하는 법, 악성민원을 막는 장치, 교권침해를 엄벌하는 제도는 각기 해법”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학교의 하루는 분리·차단·보호가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매번 증명한다. 폭력은 대개 정서·관계·가정·지역의 균열과 결합되어 있고, 민원은 불신의 사회적 습관과 결합되어 있으며, 교권침해는 교사의 권위가 ‘전문성’이 아니라 ‘취약성’으로 읽히는 문화와 결합되어 있다. 조각난 정책은 조각난 현실을 더 잘게 부수는 방식으로만 효율”을 얻는다.
그럼에도 법과 제도는 빠르게 달려왔다. 생활지도 권한을 명시하고 절차를 정교화하는 방향은 교사가 아무것도 못 한다”는 비명을 멈추게 하는 데 일정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학교를 ‘교육기관’이기보다 ‘절차기관’으로 재정의하는 효과도 낳는다. 문서의 문장은 길어지고, 수업의 문장은 짧아진다. 제도가 교사를 보호할수록 교사는 설명과 기록의 부담을 더 짊어지는 역설이 생긴다. 실제로 교육활동 침해에 대한 엄정 대응, 기관책임형 민원 대응, 악성민원의 관할청 이첩 같은 설계는 ‘개인’이 아닌 ‘기관’이 책임을 지도록 옮겨 놓지만, 그 과정에서 학교는 더 많이 ‘절차를 수행’하는 조직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 변화는 통계의 등락보다 학교의 감각을 바꾼다. 교실은 ‘학습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분쟁의 잠재 공간’으로 재편된다. 말다툼이 발생했을 때 교사는 교육적 대화를 설계하기 전에 이 사안이 기록될 사건인가”를 먼저 판단하게 된다. 학생은 갈등의 결과를 ‘관계의 재조정’이 아니라 ‘처벌의 확정’으로 기대하게 된다. 학부모는 상담을 ‘공동 양육의 협의’가 아니라 ‘절차적 책임의 귀속’으로 이해하기 쉬워진다. 이런 감각의 변화가 누적될수록, 학교는 서로를 신뢰하는 기관이 아니라 서로를 대비하는 기관이 된다.
이때 교육내전”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게 된다. 가족 단위의 불안이 학교로 전이되고, 학교는 그 불안을 ‘규율의 확정’으로 상환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아이를 둘러싼 경쟁적 서사는 사소한 갈등도 ‘경로의 위협’으로 읽히게 만든다. 그러면 회복은 느리고 처벌은 빨라진다. 가정은 학교에 ‘확정된 결론’을 요구하고, 학교는 ‘확정해 줄 능력’을 문서와 절차에서 찾는다. 결국 갈등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갈등을 종결하는 칼날이 교육의 핵심 장치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2024년과 2025년의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는 이 긴장을 사건이 줄었는가/늘었는가”의 도식으로만 읽기 어렵게 만든다. 예컨대 2025년 1차 조사에서 피해응답률이 2.5%로 제시되었다는 보도는 ‘안전의 체감’이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신호로 읽힌다. 중요한 점은 숫자의 상승 자체만이 아니라, 학교폭력이 여전히 학교의 시간을 잠식하며 안전”을 성취와 동일시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안전이 곧 성적과 생활기록의 안정으로 번역될 때, 학교폭력은 ‘관계의 붕괴’가 아니라 ‘경로의 위협’으로 읽힌다. 그러면 음의 상호성은 더 쉽게 작동하고, 규율은 더 빠르게 과열된다.
즉시 분리”의 제도화는 이 맥락에서 양면적이다. 폭행 등 중대한 사안에서 학생을 교원과 즉각 분리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은 현장에겐 필요한 칸막이이다. 교사가 다치지 않는 교실은 그 자체로 공공의 선이다. 그러나 즉각 분리는 동시에 학교가 문제를 다루는 기본 어휘를 ‘관계 조정’에서 ‘위험 격리’로 밀어붙이는 신호이기도 하다. 법은 분리를 빠르게 하지만, 복귀의 기술을 자동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이때 학교는 응급실”만 늘리고 재활”은 방치하는 구조로 기울기 쉽다.
학부모 차단”의 흐름도 같은 맥락이다. 민원 창구를 대표번호와 온라인으로 통합하고, 악성민원을 학교에서 관할청으로 이첩해 기관이 책임지는 방식은 교사를 보호하는 데 현실적 의미가 있다. 다만 이것이 학교를 ‘대화의 공간’이 아니라 ‘접촉을 관리하는 공간’으로 재배열할 때, 관계의 복원은 더 어려워진다. 차단은 분쟁을 줄일 수 있지만, 신뢰를 만들지는 않는다. 특히 학생맞춤통합지원처럼 반복 접촉과 공동 설계를 요구하는 체계는, 차단이 습관이 되는 순간 ‘행정적 분류’로 퇴행하기 쉽다.
이 지점에서, 교육부의 2026년 민주시민교육 추진계획이 갖는 ‘완전무결함’이 보인다. 이 계획은 민주시민교육을 헌법 가치와 연결하고, 토의·토론 수업이 교실에서 성립하기 위한 교수학습 원칙을 정립·법제화하겠다는 방향을 세운다. 또한 헌법교육·선거교육을 범부처 협력으로 확장하고, 교원 역량 개발과 선도학교 운영을 통해 우수 모델을 발굴·확산하겠다고 밝힌다. 더 나아가 별도의 추진계획 수립, 교육부 내 전담 조직 설치, 관련 법 제정까지 정책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선언은, ‘민주주의를 교육의 주변 장식이 아니라 운영 원리로 끌어오려는’ 시도로 읽힌다.
그럼에도 이 계획이 던지는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민주주의는 ‘가르치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살아내는 방식’이다. 그런데 오늘의 학교는 살아내는 민주주의의 시간을 잃어가고 있다. 즉시 분리와 즉시 차단의 논리가 학교의 리듬을 지배할수록, 교실에서 토의·토론의 원칙을 세우는 일은 역설적으로 더 어려워진다. 숙의는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은 관계의 안전망 위에서만 생기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교육이 ‘교과’로는 강화되는데, 민주주의가 ‘생활’로는 약화되는 역설이 생길 위험이 있다.
이 역설을 풀어내는 열쇠는 처벌을 줄이자” 같은 구호가 아니다. 처벌이 아니라 관계를 택하자는 윤리적 외침도 충분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설계이다. 분리와 차단이 ‘응급실’이라면, 회복과 학습은 ‘재활’이다. 응급실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응급실만 늘려서는 공동체는 걷지 못한다. 분리 이후의 시간표, 분리 기간의 학습권 보장, 심리·행동 지원의 강도, 교실 복귀를 위한 단계적 합의, 피해 학생과 학급 공동체의 안전 회복을 동시에 다루는 프로토콜이 필요하다. 즉시”가 가져온 시간을 다시 교육적 시간으로 번역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서 유네스코의 행복한 학교 보고서에서의 논의가 단순한 감성 담론이 아니라, 규율과 민주주의를 다시 설계하는 기술로 읽혀야 한다. 유네스코의 행복한 학교 구상은 행복을 개인의 기분이 아니라 관계와 환경의 결과로 보며, 학교 경험을 구성하는 요소를 사람(people)–과정(process)–공간(place)으로 묶어 제시한다. 또한 행복을 구성하는 범주를 교육과정, 비교과, 교수학습, 관계, 학교 경영과 비전 같은 항목으로 제시하면서, ‘규율’이 처벌의 일관성만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인간적으로 평등한 교육적 관계구축”과 상처받은 전문성을 극복하는 새로운 교사 권위”의 결합이다. 평등은 권위의 해체가 아니라 권위의 재정의이다. 새로운 교사 권위는 학생을 누르는 권력이 아니라, 갈등을 다루는 기술과 회복을 설계하는 역량에서 나온다. 교사가 ‘문서로 방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과정을 설계하는 사람’으로 승인될 때, 교권보호는 차단이 아니라 공동책임의 형태로 자리를 잡는다.
과정이라는 차원에서 핵심은 복귀의 제도화”이다. 즉시 분리가 정당화되려면, 즉시 분리만큼 강한 복귀의 설계가 따라붙어야 한다. 복귀는 단순히 교실로 돌아오는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가 다시 신뢰의 리듬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1) 피해 안전의 재확인, (2) 가해 행동의 책임 인식과 행동 대안 훈련, (3) 학교 규칙의 사회적 합의, (4) 교사-학생-가정의 역할 분담, (5) 재발 징후 모니터링이 포함되어야 한다. 응급실과 재활이 분리된 의료가 환자를 걷게 만들지 못하듯, 분리와 회복이 분리된 규율은 공동체를 걷게 만들지 못한다.
공간이라는 차원에서 학교는 ‘감시의 장치’가 아니라 ‘신뢰의 리듬’을 만들어야 한다. 갈등이 생겼을 때 사람들이 도망가지 않고 모일 수 있는 공간, 말이 곧 증거가 아니라 관계의 재료가 되는 공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것은 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문제이다. 교실·복도·상담실·교장실이 모두 ‘분쟁의 경로’가 아니라 ‘회복의 경로’로 연결될 때, 학교는 비로소 교육의 언어를 되찾는다.
나는 우리가 공정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정은 응징의 속도가 아니라, 상처의 복원 가능성이다. 공정은 빠르게 갈라 놓는 절차의 신뢰가 아니라, 다시 공동체로 돌아올 수 있는 복귀의 기술이다. 지금의 학교에 필요한 공정은 빨리 갈라 놓는 공정”이 아니라 다시 함께 살게 하는 공정”이다. 그 공정이 가능하려면, 즉시 분리의 제도화만큼이나 ‘복귀의 제도화’가 함께 달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응징은 공정이 되고 규율은 과열되며, 학교는 끝내 분쟁의 언어를 교육의 언어로 착각하게 될 위험이 커진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2026년 민주시민교육 추진계획의 의미가 완성된다. 헌법 가치와 토의·토론의 원칙을 세우는 일은 교과서에 들어갈 문장만이 아니라, 학교 규율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어야 한다. ‘즉시’가 만든 공백을 ‘재활의 시간’으로 채우는 설계가 뒤따를 때, 민주시민교육은 교실의 주제가 아니라 학교의 체제가 된다. 그때 비로소 응징이 공정이 되는 순간을 지나, 공정이 다시 교육이 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