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올림픽 포스터를 티셔츠에? 무개념 IOC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베를린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문의 청동 기마상과 월계관을 쓴 아리아인을 합성한 대회 공식 포스터를새긴 기념 티셔츠.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나치 선전의 무대로 악용됐다는 평가를 듣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기념하는 티셔츠를 판매해 독일에서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엑스(X) 갈무리 연합뉴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나치 선전의 무대로 악용됐다는 평가를 받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공식 포스터가 들어간 티셔츠를 홈페이지에서 버젓이 판매해 이미 모든 사이즈가 다 팔렸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13일(현지시간) 보도했다. 함께 판매되던 1960년 로마, 1964년 도쿄, 1908년 런던 올림픽 기념 티셔츠는 재고가 남아 있다고 전했다.
전후 청산과 역사 왜곡에 예민할 수 밖에 없는 독일에서 거센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다. 전날 일간 베를리너 모르겐 포스트 등에 따르면 IOC는 공식 온라인 쇼핑몰에서 헤리티지 컬렉션 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과거 대회를 기념하는 티셔츠와 모자 등을 판매하고 있다. 1988 서울올림픽은 물론, 일본 국적으로 조선인이 마라톤 2명, 축구 1명, 농구 4명, 복싱 1명 등 7명이 참가해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남승룡이 동메달을 따내 한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린 베를린올림픽 티셔츠도 팔렸다.
베를린올림픽 티셔츠는 39유로(약 6만 6500원)에 판매됐다. 베를린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문과 월계관을 쓴 남성을 합성했던 대회 공식 포스터가 인쇄돼 있다. 제3제국의 상징과 고대 그리스 월계관을 연결지었다. 나치가 선호했던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프란츠 뷔르벨의 작품으로 파시즘 시대 미학을 담고 있다고 독일 매체들은 해설했다.
베를린올림픽은 아리아인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동시에 나치가 집권한 독일을 평화롭고 개방적인 나라로 위장하는 무대였다는 것이 역사적 평가다. 나치는 대회를 개최하던 시점에 이미 강제 노동수용소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대회 기간 베를린 시내에서 유대인 출입 금지 표지판을 모두 철거했다. 레니 리펜슈탈이 연출한 베를린올림픽 기록 영화 올림피아 는 대표적인 나치 선전물로 꼽힌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관중들이 아돌프 히틀러가 경기장에 도착하자 나치 경례를 하며 환영하고 있다. 알라미
그런데 베를린올림픽을 선전하는 포스터를 새긴 티셔츠를 IOC는 별다른 문제 의식 없이 판매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IOC가 이 대회의 역사적 의미를 가벼이 여긴다는 지적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주간 슈테른은 베를린올림픽 티셔츠를 아무런 언급 없이 판매하는 건 IOC가 그 정치적 의미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보여준다 며 이 티셔츠가 극우 진영에서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베를린 녹색당 스포츠 정책 대변인 클라라 셰들리히는 1936년 올림픽은 나치 정권의 핵심 선전도구였다. IOC가 자기 역사를 충분히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 며 티셔츠 판매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IOC는 베를린에서 49개국 선수 4842명(홈페이지에는 3963명 )이 149개(홈페이지에는 129개 ) 세부종목에서 경쟁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며 베를린올림픽의 역사적 맥락은 스위스 로잔의 올림픽박물관에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독일은 이스라엘 선수단 테러로 얼룩진 1972년 뮌헨올림픽 이후 60여년 만에 올림픽을 개최하려고 최근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독일 통일 50주년인 2040년 대회를 열어 베를린과 뮌헨 대회의 흑역사를 만회하겠다는 포부였다. 또 나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베를린올림픽 대회 개최 100주년이 되는 2036년 대회 유치는 나서지 않기로 했다.
본래 제6회 올림픽 개최지였던 독일은 1912년부터 올림픽 준비에 들어가 6만 명을 수용하는 주경기장을 완공하고 1913년 6월 8일에 개장 기념 퍼레이드까지 펼쳤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대회는 취소되고 말았다.
그 뒤 독일은 전쟁 당사국으로 올림픽에 초청받지 못했으며, 전쟁의 상흔이 아문 1931년에야 바르셀로나 IOC 총회에서 베를린을 다시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올림픽을 아리안 혈통의 우월함을 돋보이게 만들려고 직접 대회 총재를 맡았다.
근대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채화한 후 베를린까지 봉송해 개회식 때 성화대에 점화하는 의식을 가졌다. 성화 봉송에 7개국 3300명의 주자가 참가했다. 올림픽 최초로 라디오 중계와 텔레비전 방송까지 한 것도 이 대회였다.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했던 히틀러의 계획대로 흑인들에 대한 차별의 분위기가 올림픽에 넘쳐났으나 미국의 제시 오언스가 100·200·400m 계주와 멀리뛰기에서 우승해 4관왕이 되었고, 아치 윌리엄스는 400m, 존 우드러프는 800m, 코넬리우스 존슨은 높이뛰기에서 각각 금메달을 따내는 등 미국 흑인들이 육상에서만 12개의 금메달을 휩쓸었다. 히틀러가 오언스와의 악수를 거부하고 독일인 우승자의 손만 맞잡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베를린올림픽을 극적인 이벤트로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올림피아 를 연출한 레니 리펜슈탈이 1956년 독일을 다시 찾은 대회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올림픽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마라톤에서는 손기정이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 신기록으로 월계관을 썼고, 남승룡이 동메달을 걸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8월 13일치 신문에 손기정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잘 보이지 않게 손본 후 게재, 인쇄 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 조선총독부 검열을 통과했다. 8월 25일치에는 아예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해 무기 정간을 당했다.
베를린 대회 말고도 올림픽을 정치적 목적이나 체제 선전의 도구로 활용한 예는 적지 않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어수선해진 틈을 타 일본 도쿄 시장이 1940년 올림픽 개최에 나서 성공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유치 경쟁 과정에 고온다습한 도쿄 날씨와 참가 비용 부담 급증 등의 반대 의견이 많자 도쿄 시는 모든 참가국에 100만 엔의 보조금을 주겠다고 할 정도로 절박했다. 곡절 끝에 1936년 베를린 IOC 총회에서 도쿄는 34표를 얻어 27표를 얻은 헬싱키를 제치고 개최지로 선정됐다.
국제 박람회도 함께 열릴 예정이라 도시 미관 공사와 호텔 건축, 기념품 사업 개시 등 다방면에 걸쳐 만반의 준비를 했다. 내각에서 올림픽을 포기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된 군부는 올림픽에 쓰일 목재나 석재를 징발하는 등 형편은 더욱 힘들어지고 있었다.
국제사회에서도 일본의 개최 중지를 요구했고, IOC 역시 일본에 올림픽 개최권 반납을 권유했다. 1938년 7월 15일 일본은 결국 올림픽 개최 포기를 선언했다. 대체 개최지는 핀란드 헬싱키로 결정됐으나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결국 12회 올림픽은 치러지지 않았다. 1964년 도쿄올림픽은 24년 전 대회 준비안을 살려 치러졌다. 그 대회 역시 전후 재건에 성공한 것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남의 얘기만 늘어놓을 일도 아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정권이 그 합법성을 호도하고 북한과의 체제 경쟁 승리를 과시하기 위해 1988 서울올림픽 유치에 나서 성공했던 일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