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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이유없는 매질과 끝없는 굶주림… 지옥 에서 보낸 13년

이유없는 매질과 끝없는 굶주림… 지옥 에서 보낸 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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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읍은 금강을 따라 낮게 숨을 고르는 동네다. 그 한편에 ‘금강애린원’이라는 이름의 시설이 있었다.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 ‘고향의 집’이 되었고, 노인요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간판만 바뀐 것이 아니라 시간도 바뀌었지만, 어떤 기억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어린 박정수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다섯, 혹은 여섯 살 무렵이었다. 그의 첫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다만 소리로 남아 있다. 엄마 보고 싶어, 아빠 보고 싶어.” 아이들이 외치던 문장. 그 말은 자발적인 고백이 아니라 나이 많은 ‘형들’에 의해 강요된 구호였다. 외치다 울음을 터뜨리면, 그때부터는 다른 매질이 이어졌다. 울음은 금지된 감정이었고, 울음의 대가는 몸으로 돌아왔다. 그가 왜 그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982년, 대전의 길거리에서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전부다. 누가 데려다주었는지,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 그 이전의 시간은 흐릿한 것뿐이다. 다만 행정의 시간은 분명하다. 1978년생으로 추정되지만, 출생신고는 1991년에야 이루어졌다. 열세 살이 되어서야 ‘존재’가 서류에 적혔다. 그 사이의 세월은 기록되지 않았고, 기록되지 않은 시간은 흔히 그렇듯 개인의 기억 속으로만 가라앉는다.   애린원에서 기록된 박정수씨의 아동카드. 당시 수요시설에서기록된 내용은 허구가 많아 신뢰하기 쉽지 않다. 애린원은 아이들에게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집이 아닌 곳에서 아이들은 집을 외치도록 배웠어요. 그 외침은 누군가를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침묵을 통제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울음은 처벌의 이유가 되었고, 감정은 관리의 대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를 감시했고, 위계는 나이를 따라 내려왔어요. ‘형들’은 또 다른 ‘형들’에게 배웠을 방식으로, 더 어린 아이들에게 같은 말을 시켰습니다. 이미 취학 전에 구구단을 외우도록 했어요. 맞는 게 두려워 7세에 이미 구구단을 암기해버렸어요. 영어 단어를 외우지 못해도 틀린 개수만큼 벌이 더해졌어요. 틀린 개수는 곧 매질의 횟수였어요. 그날 외운 단어가 무엇이었는지보다, 몇 번을 맞았는지가 더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배움의 동기가 호기심이 아니라 체벌이었던 시간, 숫자는 지식이 아니라 폭력의 횟수와 연결되었습니다.” 강경의 아침은 물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하루가 시작된다. 애린원에서의 하루도 늘 그랬다. 새벽 6시, 아이들은 이미 운동장에 서 있었다. 줄은 곧고 길었으며, 말이 없어도 긴장은 공기 같았다. 점호와 단체운동이 시작되기 전, 몸은 이미 굳어 있었다. 당시 원장은 베트남전 참전군인이었다. 그의 통제 방식은 군대식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규율은 생활 전반을 파고들었고, 어긋남은 곧바로 처벌로 이어졌다. 아이들은 ‘훈련’이라는 이름 아래 태권도를 배웠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라기보다, 복종을 몸에 새기는 절차에 가까웠다. 원생 전원에게 강제로 교육이 이뤄졌고, 일정 수준에 이르면 유단자 단증을 따게 했다. 전시된 단증은 시설의 성과를 보여주는 표지처럼 사용되었고, 외부의 후원으로 이어졌다. 강요된 소년체전 출전으로 홍보효과는 극대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련의 현장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련은 종종 폭력으로 번졌고, 싸움은 ‘유도된 충돌’처럼 격해졌다. 실내로 들어가면 또 다른 장면이 이어졌다. 장롱 위에 이불을 얹어 만든 공간. 그 위로 올라가게 한 뒤, 목을 붙잡아 던지는 방식의 폭력이 반복되었다. 언젠가 한번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데, 원장에게 얼굴이 피멍이 들도록 얻어맞은 적이 있어요. 원장은 분이 안 풀렸는지, 공기총을 들고 나와 저를 죽인다고 위협까지 하더군요. 마침 옆에 있던 원장부인이 말리는 바람에 죽음까지는 면한 것 같아요. 다음날 학교를 갔는데, 담임선생님이 피투성이인 제 얼굴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겁니다. 그 지역에서 원장일가는 단순한 유지가 아니라 권력자와 같은 행세를 했습니다.” 식사 시간에도 예외는 없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정자세로 앉아 먹지 않으면 등짝으로 손이 날아왔다. 숟가락을 드는 각도, 씹는 속도까지 눈에 띄면 지적과 함께 구타가 이어졌다. 식사는 늘 부족했다. 아이들은 방법을 찾았다. 축사 근처로 가서 돼지 먹이로 쌓여 있던 땅콩잎을 몰래 뜯어 먹었다. 흙냄새가 밴 잎사귀를 급히 씹어 삼키며, 들키지 않는 것이 먼저였다. 배를 채운다는 감각은 잠깐이었지만, 그마저도 필요했다. 학교로 가면 또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 수업이 끝난 뒤 매점 문이 닫히고 나면, 아이들 몇이 주변을 서성였다. 틈을 보다가 안으로 들어가, 팔고 남은 계란을 찾아 손에 쥐었다. 소금도 없이 급히 먹어치우고,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서둘러 나왔다. 배고픔은 규칙보다 오래 남았고, 그 사실은 누구도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노동의 일과 역시 일상의 중심에 있었다. 애린원이 운영하던 농장에서는 표고버섯과 군자란을 재배했다. 어린 아이들에게도 작업은 예외가 아니었다. 통나무에 구멍을 뚫어 종균을 넣는 과정에서 드릴을 다루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기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이유로 폭행이 이어졌다. 손에 익지 않은 도구와 눈앞의 과업, 그리고 뒤따르는 처벌의 두려움이 한 장면에 겹쳐 있었다. 온도에 민감한 군자란을 재배할 당시, ‘이게 죽으면 너도 죽인다’는 협박을 당하기도 했다. 노동의 목적은 자립을 위한 교육이라고 설명되었지만, 아이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원장 림헌정의 성학대, 굴욕적인 행위의 강요 등은 당시 한국일보 보도로 드러나기도 했다. 또한, 1994년에는 이라는 프로그램에 방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은 것은 사건의 일부였을 뿐이고, 많은 시간은 여전히 개인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다. 말로 옮겨지지 못한 장면들이 그 사이에 끼어 있다. 심지어 물건을 훔쳤다는 이유로 15일간 창고에 감금된 아이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여러 번 생사의 경계에 서 있었다고 박정수 씨는 회상한다. 너무 비참해서,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말은, 그 시절의 밀도를 짐작하게 한다. 아이들의 삶은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다. 학교에 가는 길도 평탄하지 않았다. 당시엔 방학 책값 500원을 내야 했던 어느 날, 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늦게 전했다는 이유로 모욕과 협박이 쏟아졌다. 너 같은 것은 죽어도 된다. 호적 신고도 안 돼 있으니,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 행정적으로 존재가 불분명했던 아이에게 그 말은 단순한 꾸중이 아니었다. ‘사라져도 기록되지 않을 수 있다’는 공포가 일상의 일부로 스며들었다. 학습의 기억도 폭력과 분리되지 않는다. 외부에서 들어온 물품들 또한 아이들의 것이 아니었다. 기부로 들어온 크레파스와 물감이 시간이 지나 굳어버리면, 아이들에게 그것을 소각장으로 옮겨 태우게 했다. 쓸 만한 것들은 따로 선별되어 원장의 아들에게 돌아갔고, 남은 것은 창고에 보관하다 폐기 과정을 밟았다. 도움의 손길이 도착하는 순간과 그것이 실제로 누구에게 쓰이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한번은 소각장에서 남은 물품을 태우던 중, 지나던 뱀을 구워먹었다는 이유로 원장에게 구타를 당한 일도 있었다.   박정수씨가 실종아동찾기협회에 의뢰하여 만든 웹자보. 지금도 그는 부모찾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날도 엄청나게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누군가가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이유로 끌려 나왔습니다. 수도꼭지가 열리자, 찬물이 그대로 쏟아졌는데, 주변에 서 있던 원생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장면을 지켜봤습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숨이 가빠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몸이 힘없이 기울었습니다. 아이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몇몇이 아이를 들고 화단 쪽으로 향했고, 삽이 땅을 찍는 소리가 반복됐으며, 얼어붙은 흙이 깨지며 갈라졌습니다. 아이를 화단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원생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 그 광경을 바라봤습니다. 그날 이후로도 ‘벌’은 계속됐습니다.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이유로 옷을 발가벗긴 채 운동장을 돌게 하는 일이 반복됐어요. 규율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지만,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아무도 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부모가 존재하는 위탁고아보다 부모의 존재여부를 알 수 없는 천애고아에게 더 가혹하고 혹독하게 굴었다. 원장은 특히, 여교사들을 앞세워 아이들을 다루게 했다. 지시는 분명했고, 방식도 정해져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때리는 일. 그 지시를 따르지 않는 교사는 오래 남지 못했다.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반복됐다. 아이들은 그 질서 안에서 하루를 보냈다. 잘못의 기준은 자주 바뀌었고, 체벌의 수위는 높아져 갔다. 매질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이유와 결과는 늘 어긋나 있었다. 어느 날은 논산의 쌘폴여고에서 위문공연을 왔다. 잠시나마 분위기가 풀렸고, 아이들은 낯선 호의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 틈에서 어린 박정수가 여고생에게 안겼다는 이유로 매질이 이어졌다. 무엇이 금지인지, 왜 금지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다만 금지라는 사실과, 어겼을 때의 결과만이 분명했다. 17세가 되면서 고등학교를 입학해야 할 나이가 다가왔다. 문산으로 가는 결정은 선택처럼 제시됐다. 여기서 맞아죽을래, 아니면 나가서 학교 다닐래.” 원장의 질문은 권유였지만 당시 박정수 씨가 듣기엔 그런 느낌이었다. 행선지는 산업체 학교인 파주공고 자동차정비과. 이름은 ‘진학’이었지만, 내부에서는 다른 의미로 통했다. 함께 보내진 셋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듣거나 보았던 아이들이었다. 원장이 여자 원생에게 가한 성폭행,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공통점. 원장은 그 공통점을 문제로 여겼다. 그래서 셋을 묶어, 가장 멀리 떨어진, 원장의 지인이 있는 파주공고로 보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대목이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이 다시 나타났다. 성폭력 가해자로 재판을 받게 됐다는 소식이 먼저 도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실제로 파주까지 올라왔다. 증언을 좀 해달라.” 부탁의 형식이었지만, 관계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말해달라는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길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자신에게 유리한 말, 자신을 덜 해치게 할 말. 며칠 뒤에는 다른 방문이 이어졌다. 당시 고발자였던 여자 교사들이 찾아왔다. 이들의 요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해달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각자의 입장에서 달랐다. 원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원장이나 여자 교사들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심지어 여교사들이 더 참혹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그들이 성폭행 사건을 고발하면서 마치 정의의 신봉자처럼 행세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낮과 밤이 분리된 생활이 이어졌다. 낮에는 형광등을 만드는 공장으로 출근했고, 밤에는 파주공고 야간학교 교실로 향했다.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28만 원. 1996년 당시 생산직 노동자의 월급이 60만원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었다. 공장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직원 대부분이 고아 출신이었다. 채용은 값싼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기숙사와 작업장이 이어진 구조 속에서, 일과 생활은 자연스럽게 묶였다. 불빛을 만드는 공장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불빛 아래서 수업을 듣는 생활이 반복됐다. 문제는 공장 밖에서 시작됐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서, 소속 회사별로 갈라진 패싸움이 벌어졌다. 작업복의 로고와 소속이 곧 편이 됐다. 어느 날 충돌이 커졌고, 형광등 회사 쪽이 밀렸다. 싸움은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공장으로 돌아온 뒤, 폭력은 방향을 바꿨다. 싸움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담하지 않은 이들이 오히려 표적이 됐다. 집단 구타가 이어졌고, 이유를 묻는 말은 허용되지 않았다.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잘못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폭력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던 박정수 씨는 공장을 떠나야 했다.   고아수용시설 가해법인의 자산환수 및 영구퇴출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는 4월 24일의 국회 앞. 공장을 떠난 후에도 그는 학업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했다. 동아일보 청담지국에서 시작된 하루는 늘 어둠 속에서 끝났고, 그 사이엔 ‘공부’라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신문배달하면 검정고시 전문 신설동의 수도학원에 공짜로 다닐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이었다. 등록금이 부담되어 포기했던 공부의 길이, 새벽 신문으로 다시 열렸다. 손끝이 얼어붙어 신문을 던져 넣던 그 몇 달의 노동은 단순한 ‘알바’가 아니라, 꿈의 입장권이었다. 낡은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모은 시간들은 결국 검정고시학원의 불빛 앞에 멈췄다. 그가 새벽마다 배달했던 것은 종이가 아니라 의지였다. 그리고 그 의지는, 한 청년의 이름을 낡은 신문지보다 훨씬 더 오래 남게 했다. 그렇게 그는 고졸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아들었다. 너희들이 사람대접을 받으니까 사람인 줄 알지? 개돼지처럼 맞다 죽어봐야 정신 차리지.” 애린원의 아이들에게 너희는 사람이 아니라는 선언. 맞아도 되는 존재이고, 굶어도 되는 존재이며,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선언이었다. 원장 사모는 화가 날 때마다 아이들 앞에 서서 그렇게 말했다. 욕설은 밥처럼 날아다녔으며, 손찌검은 날씨 같았다. 그곳에서의 하루는 살아가는 시간이 아니라 긴장하는 시간이었다. 1년 365일 중 200일 이상을 늘 경계 속에 보냈다고 그는 말했다. 언제 욕설이 날아올지, 언제 몽둥이가 내려올지 몰랐다. 몸보다 먼저 닳아버린 건 신경이었다. 원장 사모 앞에서는 무릎 꿇는 일도 흔했다. 살기 위해서였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빌어야 했다. 애린원에서의 13년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런데 퇴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연락이 왔다. 애린원의 원장 사모가 자신을 부른 것이다. 그는 망설이다 시설로 갔다. 여전히 그 건물 냄새가 기억 속 공포를 끌어올렸다. 사모는 예전처럼 앉아 있었고,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국가에서 나온 정착금이다.” 봉투 안에는 2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 돈을 받으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고맙다는 생각보다 먼저 든 것은 두려움이었다. 왜 갑자기 이런 돈을 주는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운영과 관련한 감사가 진행 중이었으며, 그래서 그 돈 역시 진심 어린 지원이라기보다, 문제를 덮기 위한 형식적인 지급 아니었겠느냐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성인이 된후 그는 ‘충북 지금은’ 이라는 방송의 가족찾기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부모에 대한 기억이 정확하지 않으니 실종여부나 납치여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실종아동찾기 부모모임을 알게 되면서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부모찾기는 계속되고 있다. 20대 중후반 무렵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평범한 미래를 상상했다. 작은 전셋집 하나 얻고, 퇴근길에 시장 들러 반찬을 사고, 누군가와 함께 늙어가는 삶. 애린원에서 보낸 시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이었다. 처음 만난 여자와 서로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 하지만 여자 쪽 부모가 그의 성장과정을 알게 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두 번째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더 조심했다. 자신의 과거를 쉽게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은 밝혀졌다. 상대 부모는 대놓고 반대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열심히 일해도, 술 안 먹고 성실하게 살아도, 끝내 따라붙는 말 하나. ‘고아.’ 시설에서 살아남기 위해 버텼던 시간보다 사회 밖에서 마주한 그 단어가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애린원에서는 맞으며 살았지만, 세상에서는 조용히 밀려났다. 그 뒤 그는 결혼 생각을 접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먼저, 자신의 출신부터 설명해야 하는 삶에 지쳐버린 것이다.   기자회견과 함께 진행된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애린원 피해자 박정수 씨. 애린원 운영자들은 고아시설을 폐쇄한 후 노인요양원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고아들의 핏값으로 부를 쌓은 후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한 방편이다. 그들이 또 용서받기 힘든 이유는 업종변경으로 그곳을 퇴소한 동료 고아들과의 만남 자체를 차단해 버렸다는 점이다. 배달업종에 종사중인 박정수 씨는 지금도 우울증에 시달린다. 과거를 생각하면 가끔 주체못할 눈물이 흐르고 헬멧의 보호대를 내려 소리없이 울기도 한다. 박정수 씨는 지난, 3월 24일 신분과 처지를 괴로워하며 한잔 술과 함께 국민청원게시판에 자신의 억울한 삶을 국가가 보상하라는 글을 올렸다. 이후 동작구청 담당공무원이 진화위 3기 출범을 알려줬다. 그는 곧 피해사실을 접수하며 고아수용시설 단체 회원들과 함께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는 애린원이라는 공간을 떠났지만 기억은 떠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바뀌면 공간의 역할도 바뀐다. 그러나 어떤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 시간 속에 있던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 강경의 바람은 여전히 낮게 분다. 간판은 바뀌었고, 사람도 바뀌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처음으로 세상을 기억하기 시작한 그 장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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