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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 살해한 강철 인간 스탈린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 살해한 강철 인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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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는 말을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 아니, 총구 정도가 아니라 수용소, 숙청, 기근, 선전(宣傳)의 전방위 포위망으로 권력을 움켜쥔 사람. 그 이름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8~1953). 본명은 이오시프 주가시빌리(Iosif Jughashvili)이며, 스탈린 이라는 이름은 러시아어로 강철 에서 따온 것이다. 스스로 강철이라 불렀으니, 따스한 인간미는 처음부터 포기한 셈이다.   1932년의 스탈린(위키피디아) 구두 수선공의 아들,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스탈린은 1878년 12월 18일 당시 러시아 제국 치하 조지아(그루지야) 고리(Gori)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구두수선공,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이 두 조합이 낳은 결과가 스탈린이라는 사실은,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라는 명제에 꽤 복잡한 주석을 달아준다. 젊은 시절에는 정교회 신학교를 다녔다. 신을 섬기러 갔다가 혁명가로 돌아온 것이다.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이끄는 볼셰비키 당에 합류하여 은행강도, 지하선전, 유배 등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오늘날로 치면 청년 시절 운동권에서 각종 사고를 치다가 끝내 대통령 된 사례라 할 수 있겠다. 1917년 혁명 성공 이후 레닌이 1924년 사망하자 스탈린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Grigory Zinoviev, 1883~1936), 니콜라이 부하린(Nikolai Bukharin, 1888~1938), 레온 트로츠키(1879~1940) 등 쟁쟁한 동료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까지 도망쳤으나 결국 암살당했다. 달아나도 소용 없었다. 그야말로 전우를 제일 조심하라 는 격언의 생생한 실증이었다.   1950년의 스탈린(위키피디아) 공포정치, 국가가 국민을 잡아먹는 법 스탈린 집권기(1924~1953)는 크게 세 가지 공포로 요약된다. 첫째, 강제 집단농장화(1929~1933).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국가소유 집단농장으로 편입시켰다. 반발하는 부농(쿨라크, kulak)들은 계급의 적 으로 분류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1932~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 Holodomor)이 발생하여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 곡물을 국가가 수출하는 동안, 국민은 굶었다. 이 구조,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다. 둘째, 대숙청(1936~1938). 스탈린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법한 군 장성, 당 간부, 지식인, 심지어 예전 동료들까지 반역죄로 몰아 처형하거나 수용소(굴라크, Gulag)에 보냈다. 추산에 따라 다르지만 이 시기에만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 희생됐다. 재판은 있었다. 다만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피고들은 자신의 죄를 자백 했다. 고문과 가족을 협박한 탓이었다. 셋째, 개인 숭배. 스탈린은 인민의 아버지 , 위대한 지도자 , 태양 으로 불렸다. 신문, 라디오, 교과서, 영화, 모든 매체가 그를 찬양했다. 비판은 곧 죽음이었다. 그러니 모두가 찬양했다. 진심으로 찬양하는 사람도 있었다. 세뇌란 꽤 효율적인 기술이다.   1902년 경찰이 촬영한 스탈린의 사진(위키피디아) 전쟁의 승리자, 그러나 공은 누구의 것인가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독소전쟁(1941~1945)이 벌어졌다. 스탈린은 처음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다. 대숙청으로 유능한 군 장성들을 제 손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1896~1974)처럼 살아남은 장군들이 사실상 전쟁을 이끌었다. 전쟁이 끝나자 영광은 스탈린에게 돌아갔다. 죽인 것도 스탈린, 살린 것도 스탈린, 이 기묘한 역설이 그의 집권 내내 반복됐다. 전쟁에서 소련이 치른 대가는 처참했다.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700만 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럼에도 1945년 전승과 함께 스탈린의 권위는 절정에 이르렀다. 폐허 위에 세운 권력이었다.   스탈린이 초기 편집자로 활동했던 프라우다 창간호(위키피디아) 스탈린 이후, 그리고 역사의 심판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향년 74. 죽는 날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다. 사망 직후 소련 내부에서조차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다. 니키타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 1894~1971)는 1956년 비밀 연설에서 스탈린의 개인 숭배와 공포정치를 공개 비판했다. 이른바 탈스탈린 (de-Stalinization)이었다. 그러나 역사란 단순하지 않다. 오늘날에도 러시아 일부에서는 스탈린을 강한 지도자 로 그리워하는 여론이 존재한다. 혼란 속에서 질서를 만들었다는 이유에서다. 공포로 만든 질서를 질서 라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1917년 청년 인민위원 시절의 스탈린(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스탈린을 읽는다는 것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거 소련 얘기 아닌가요? 우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상관이 꽤 있다. 첫째, 개인 숭배와 제도의 실종. 스탈린 체제의 핵심은 제도보다 인물이 우선했다는 점이다. 법이 있었지만 지도자의 의지 앞에 종잇조각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다. 법대로 하자 는 말이 실제로는 힘 있는 자의 뜻대로 하자 는 뜻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둘째, 숙청의 언어. 스탈린은 반대파를 인민의 적 , 반혁명분자 로 불렀다. 언어가 먼저 상대를 인간 이하로 만들고, 그 다음 물리적 제거가 뒤따랐다. 한국사회에서도 정치적 반대편을 빨갱이 등의 딱지로 먼저 규정하고 대화를 끊어버리는 방식은 여전히 작동 중이다. 언어의 무기화는 스탈린의 전매특허가 아니었다. 셋째, 검찰·사법기구의 정치 도구화. 대숙청 당시 소련의 검사 안드레이 비신스키(Andrei Vyshinsky, 1883~1954)는 무고한 이들에게 자백을 강요하고 사형을 구형했다. 그 뒤 그는 외무장관에까지 올랐다. 권력에 충성한 법조인에 대한 보상, 이것도 어디선가 본 풍경이다. 넷째, 강한 지도자 환상. 러시아인 일부가 스탈린을 그리워하듯, 한국에서도 주기적으로 박정희, 전두환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는 여론이 등장한다. 혼란스러울수록, 민주주의가 느리고 답답할수록 이 유혹은 커진다. 그러나 역사는 거듭 가르쳐준다. 강철 주먹의 끝에는 항상 삼청교육대 같은 수용소가 있었다고,   1920년의 스탈린(위키피디아)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패턴은 반복된다 스탈린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나쁜 목적을 위해 좋은 조직을 만든 인간. 그가 구축한 관료제, 선전체계, 정보기관은 실로 효율적이었다. 다만 그 효율성이 향한 곳이 인민의 복지가 아니라 권력자 한 사람의 유지였을 뿐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를 암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조금 더 멀리서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서다. 스탈린의 시대는 멀리 있지 않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여전히 살아있다. 다만 더 세련된 언어로, 더 합법적인 외양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이다. ‘강철 인간’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오늘 세계 뉴스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들여다보시기를 권한다.   1922년 9월, 스탈린이 모스크바 외곽의 고르키 별장에서 요양 중이던 레닌을 위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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