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국경도 이념도 없다 …찐 과학자 아서 에딩턴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19년 5월 29일 아프리카 서쪽 끝 프린시페 섬에서 한 영국인이 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서 스탠리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 그런데 이 남자, 그냥 구경꾼이 아니었다. 그는 독일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상대성 이론을 증명하려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왔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영국인이 독일인의 이론을 입증하러 나섰으니 말이다. 당시 영국 사회에는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찔렀는데, 에딩턴은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며 태연히 아인슈타인을 지지했다. 이런 배포가 있으니 후에 별빛 굽히기의 아버지 라는 별명도 얻을 만했다.
아서 스탠리 에딩턴. (위키피디아)
켄달 출생, 케임브리지 정착
에딩턴은 1882년 잉글랜드 북서부 켄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퀘이커교 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수학에 천재적 재능을 보였다. 16세에 케임브리지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 것만 봐도 그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1905년 케임브리지를 졸업한 에딩턴은 곧바로 그리니치(Greenwich) 천문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청년, 단순히 별만 관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별의 내부 구조와 진화 과정에 대해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앞서 간 관점이다.
웨스턴슈퍼메어 월리스코트 로드 42번지에 있는 에딩턴의 명판. (위키피디아)
평화주의자의 역설과 전쟁 거부
에딩턴은 독실한 퀘이커교도였다.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1차 세계대전 중 징집을 거부했고, 대신 천문학 연구로 나라에 기여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이런 선택은 거의 사회적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에딩턴은 굽히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총을 들기보다 망원경을 들고 진리를 찾겠다 는 그의 고집은 결국 옳았다. 그가 증명한 상대성이론은 영국을 과학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니까. 총알보다 수식이 더 강했던 셈이다.
흥미롭게도 에딩턴의 평화주의 덕분에 그는 징집을 면제받고 과학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접하고 이를 검증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차근차근 진행했다. 만약 그가 전쟁터에 끌려갔다면 1919년의 역사적 관측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에딩턴(맨 오른쪽)이 장난감 당나귀를 타고 있는 모습. 1913년 독일 본에서 열린 태양 연구 협력을 위한 국제연합 제5차 회의 때로 추정된다. (위키피디아)
1919년 역사를 바꾼 6분간의 관측
1919년 5월 29일 아프리카 프린시페 섬에서 벌어진 일은 과학사의 전환점이었다. 에딩턴은 일식이 일어나는 동안 태양 근처를 지나는 별빛이 휘어지는지 관측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장에 의해 빛도 굽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관측 결과는 놀라웠다. 별빛이 정확히 아인슈타인이 예측한 만큼 굽어져 있었다. 에딩턴은 즉시 이 결과를 영국으로 타전했고, 이 소식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뉴턴을 뒤엎다 라는 제목으로 신문들이 떠들썩했다.
당시 영국 왕립학회 회장이었던 조제프 존 톰슨(J. J. Thomson, 1856~1940)은 이것은 인류 사상 최고의 발견 중 하나 라고 선언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3~1727) 이후 200여 년간 절대 진리로 여겨졌던 고전역학이 흔들린 순간이다.
1919년 5월 29일의 일식을 촬영한 에딩턴의 사진 중 하나로, 1920년 일식의 성공을 발표하는 논문에 실려 있으며, 빛이 휘어진다 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인시켜 주었다. (위키피디아)
대중과학의 선구자, 어려운 걸 쉽게 만드는 마법사
에딩턴의 진면모는 어려운 과학 이론을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게 풀어쓰는 능력이었다. 그의 대표작 〈팽창하는 우주〉(1933)는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개념을 영국 대중에게 처음 소개한 것도 그였다.
우주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 는 그의 비유는 지금도 과학 교과서에 등장한다. 복잡한 수식 대신 쉬운 말로 과학을 설명하는 전통, 이것이 바로 에딩턴이 영국 사회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영국은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1942~2018)까지 이어지는 대중과학 작가 전통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의 또 다른 명저 〈별의 내부 구조〉(1926)는 별이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어내는지를 설명한 최초의 체계적 연구서다. 당시만 해도 별의 에너지원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는데, 에딩턴은 핵융합이 그 답일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의 예측은 나중에 한스 베테(Hans Bethe, 1906~2005)에 의해 정확히 증명됐다.
에딩턴이 태양 주위의 빛의 곡률에 대한 관측 결과를 발표하고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확증한 케임브리지 ∇2V 클럽 회의록. 회의록에는 일반적인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회장은 제83차 회의가 역사적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라는 구절이 포함돼 있다. (위키피디아)
종교와 과학의 화해자, 신은 수학자인가
빅토리아 시대부터 영국 사회를 괴롭혀온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종교와 과학의 갈등이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진화론 이후 교회와 과학계는 으르렁거리며 대립했는데, 에딩턴은 이 둘을 화해시키려 노력했다.
신은 수학자다 라는 그의 명언은 유명하다.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 속에서 신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이런 접근법은 영국의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과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신앙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에딩턴은 정기적으로 퀘이커교 집회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과학적 발견들이 오히려 신의 존재를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학이 발전할수록 우주의 신비가 더욱 깊어진다 고 말해 많은 신앙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위키피디아)
교육 혁신의 숨은 공로자, 여성 과학자의 든든한 후원자
에딩턴은 1913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 루카스 교수직을 맡았다. 이 자리는 한때 뉴턴이 역임했던 영예로운 자리였다. 그의 강의는 늘 만원이었다고 한다. 딱딱한 이론을 재미있게 설명하는 능력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여성 과학자들을 적극 지원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세실리아 페인(Cecilia Payne, 1900~1979)이라는 여성 천문학자가 별의 주성분이 수소와 헬륨이라고 발견했을 때, 다른 남성 학자들은 그럴 리 없다 며 무시했지만 에딩턴만은 그녀를 지지했다. 페인의 발견은 나중에 완전히 옳은 것으로 판명됐다.
에딩턴의 제자 중에는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Subrahmanyan Chandrasekhar, 1910~1995)도 있었다. 인도 출신의 이 젊은 물리학자는 나중에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되는데, 에딩턴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런 개방적 자세는 영국 과학계의 다양성 확대에 기여했다.
세실리아 페인. (위키피디아)
아인슈타인을 영국으로 데려온 남자
에딩턴이 없었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이렇게 빨리 세계에 알려졌을까? 에딩턴의 1919년 일식 관측은 아인슈타인을 일약 세계적 스타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덕택에 영국은 현대물리학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다.
독일인의 이론을 영국인이 증명했다 는 이야기는 전 세계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과학의 국제적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에딩턴과 아인슈타인은 이후 평생 우정을 나눴다. 두 사람의 편지 왕래는 20여 년간 계속되었고, 서로를 동지 라고 부를 정도였다.
에딩턴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영국에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1920년 왕립학회에서 열린 상대성 이론 특별 강연에는 영국 최고의 물리학자들이 몰려들었다. 에딩턴의 명쾌한 해설 덕분에 많은 영국 과학자들이 상대성 이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왼쪽)과 에딩턴(오른쪽)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몇 년 후에야 처음 만났다.(BBC)
1944년, 케임브리지에서의 마지막 여정
에딩턴은 1944년 11월 22일 케임브리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1세, 비교적 이른 나이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과학계 거물들이 대거 참석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계가 위대한 스승을 잃었다 며 애도했다.
에딩턴이 남긴 과학적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별의 진화 이론, 우주 팽창 법칙, 상대성 이론의 검증... 하지만 그의 진짜 유산은 과학을 대중의 것으로 만든 일이다.
에딩턴은 1919년 5월 29일에 일식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BBC)
여전히 빛나는 유산, 지금 영국이 배워야 할 것
에딩턴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지났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영국의 과학 대중화 전통, 종교와 과학의 조화로운 공존, 국제적 과학 협력 정신... 이 모든 것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진리 앞에서는 국경도, 편견도 없다 는 그의 신념은 지금의 영국 사회가 되새겨야 할 가치다. 브렉시트로 유럽과 담을 쌓은 지금, 에딩턴의 개방적 정신이 그리워진다.
현재 영국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유럽연합과의 협력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다. 에딩턴이 보여준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는 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그가 1차 대전 직후 독일 과학자와 손잡았던 것처럼, 지금의 영국도 정치적 갈등을 넘어 과학 협력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별을 가려 빛을 굽힌 그 남자는, 결국 영국 사회에 더 큰 빛을 선사했다. 그것도 아직까지 꺼지지 않는 빛을. 에딩턴의 정신을 이어받아 영국이 다시 한번 과학과 인문학이 어우러지는 열린사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