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 했던 구한말 청과의 사대 관계 청산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아편전쟁 이후 청이 서구 열강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조선 지식인들의 마음은 착잡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수모를 안긴 ‘오랑캐’였던 청이 무너지는 것이 기쁘기도 하면서, 그 다음 차례는 조선이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신들에게 청의 현실을 탐지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서양 ‘금수’들을 수용하는 청의 개방세력들에 대해서 반감을 강하게 드러내던 고종은, 점차로 청이 양무운동을 통해 새로운 근대국가로 나가는 것을 배우려 하였어요. 척화비를 세워 서양을 배척하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성년이 되었음에도 권력을 넘겨주지 않는 아버지를 밀어내고 친정을 선포하였지요.
조선을 속방으로 잡아두려는 청, 대등 관계 추구한 고종
조선은 청의 속방이었기 때문에 독립국은 아니었지만,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구미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어요. 1876년 강화도조약의 제 1조에는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는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점을 청도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강화도조약, 복제본
청은 조선의 구미 열강과의 조약 체결도 주선했습니다. 주일 청국공사관의 황준헌이 『조선책략』 을 써서 수신사 김홍집에게 전달한 것도 그런 의도였어요. 그래서 조선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호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청은 조약문 안에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것을 명기하려 들었지만 열강의 반대로 실패했어요.
이때 고종은 내아문을 통해 상주 외교사절을 북경에 파견하는 파사주경(派使駐京)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명목상으로는 조공사절과 칙사의 왕래에 따른 경비부담을 개선하는 차원이라고 했지만, 조청관계를 만국공법 체제하의 대등한 관계로 전환하려는 의도였지요. 하지만 청의 반대로 좌절하고 대신에 천진에 영사급의 주진대원(駐津大員)을 파견했습니다.
사대 관계와 국제법적 자주권 사이의 타협 ‘양절체제’
당시 양무운동으로 자신감을 회복한 청은 오히려 의례적인 속방관계에서 실질적인 지배예속관계로의 전환을 추구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1882년에 발생했던 임오군란에 군대를 파견하여 흥선대원군을 천진으로 납치해 간 것이었지요. 그로 인해 고종의 왕권이 회복되었지만, 청의 군대가 한성에 주둔하고 조청상민무역장정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조청관계가 조약질서로 이행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그럼에도 장정이라고 한 것은 국가간의 대등한 지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므로, 고종과 청의 북양대신이 조인의 주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청 상인들이 한성 안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어요. 하지만 최혜국 약관에 따라 일본과 구미 상인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조선 정부가 반발을 하면서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청과의 사대 관계를 존속시키는 것이 다른 외세의 침탈로부터 조선을 보호해 주는 후원자로 설정하는데도 유리하다는 현실적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이 사대 관계와 만국공법 질서를 병존시키면서 조선의 자주권을 지켜 나가는 외교 체제를 유길준은 ‘양절(兩截)체제’라고 표현했다.
자주독립 내건 갑신정변 실패로 더 심해진 청의 내정간섭
조약이란 독립국가들 사이에서 체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강은 만국공법 질서에 따라 조선을 독립국가로서 인정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청과의 속방관계를 폐기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개화파 관료들이었는데, 이들에게 그러한 생각을 불어 넣은 것은 구미 외교관들과 일본의 지식인들이었어요.
하지만 조선이 청의 외압에서 벗어날 주체적 역량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침략의도가 의심스러웠고 미국에 기대를 가졌지만, 거리가 너무 멀고 조선 문제에 관심도 개입할 의지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요. 개화파가 기대했던 민영익이 보빙사에서 돌아온 후, 친청사대로 돌아선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1884년의 갑신정변은 일본 군대의 힘을 빌어 사대파 대신들을 처단하고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던 시도였는데요. 오히려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있던 청 군대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내정간섭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심지어 고종을 청군 진영에 며칠간 억류하는 굴욕까지 당하고 일본과 체결한 한성조약에서도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강요하였어요.
동학혁명에 대한 고종의 모순적 태도가 불러온 청일 대결
고종은 궁궐 내에 내무부를 만들어 친청 관료들을 배제하고 국정을 주도하려고 했습니다. 청의 반대를 무릅쓰고 육영공원을 비롯한 각종 근대 기구에 미국인을 초빙하거나 미국 기술을 도입했어요. 아울러 조러 밀약을 통해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고, 일본과 미국에 외교관을 상주시켜 조선이 주권국가임을 알리려 했지요.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국내외적인 반발에 직면했습니다. 김윤식은 대원군의 환국을 추진했고, 청은 원세개를 파견하고 대원군을 환국시켜 고종을 견제하려 했어요. 원세개는 감국(監國)이라 자칭하면서 고종이 직접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들에게 정사를 위임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심지어 고종 폐위론까지 제기하고 실제로 추진했어요.
내정간섭을 자행했던 원세개(1859-1916) 나중에 중화민국 초대 총통과 중화제국의 황제를 지냈다
그러자 고종은 1888년부터 2년에 걸쳐 청에 원세개의 소환을 끈질기게 요구했습니다. 원세개가 권력을 남용해 조선의 주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요. 그러나 이홍장은 자신의 대리인이었던 원세개 교체 요구를 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청의 무력에 의존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지요.
청은 병력을 충청도 아산에 파견하는 한편, 천진조약을 근거로 일본에 이를 통보했습니다. 일본군은 공사관 및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 을 내세우며 1894년 5월 6일 인천에 상륙했어요. 조선 정부는 즉시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무시했고 전주화약으로 파병의 근거가 사라졌음에도 일본은 조선에서의 군사력 증강을 계속했습니다.
청의 완전한 몰락과 일본의 지배적 위치 확인한 시모노세키 조약
사실 천진조약은 조선 대표의 참가 없이 청일 양국 간에 맺어진 조약이었으므로 조선에 대한 구속력이 없었지요. 그러나 일본 측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청일 공동으로 권고하자는 안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조선 정부와 청이 거부하자 일본은 다시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인정하는 것은 강화도조약에 위배된다는 억지 주장을 하면서 경복궁을 강점했어요.
이어서 일본군은 7월 25일 선전 포고도 없이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8월에 성환 전투에서 승리하고 9월에는 평양에서 대승을 거둬 청군을 조선에서 밀어냈지요. 한편 일본 해군은 9월 황해 해전에서 청의 북양함대를 물리쳤으며, 10월에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격했습니다. 11월에는 요동반도의 여순을 점령했고 산동성의 위해위를 장악했어요.
이때 청은 이홍장을 대표로 파견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시모노세키에서 1895년 4월 17일 강화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강화조약의 가장 핵심은 청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한 것이었어요. 청일전쟁은 그동안 중화질서를 바탕으로 동아시아를 주도해 왔던 청이 몰락하고 일본이 동아시아의 맹주는 물론 제국주의의 일원으로 새롭게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광경
1899년 대등한 한청조약으로 완전히 사라진 사대외교
비록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이 사대관계를 폐기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과 약속한 것으로서 조선과 청의 관계를 규정할 아무 근거가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조선에서 활동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업무는 영국 공사관이 대행했어요. 그에 따라 조선 정부는 1896년부터 청과의 대등한 조약체결을 추진했습니다.
고종은 1896년 청의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 자리에 환구단을 세우고 대한제국을 수립했으며, 광무연호를 쓰고 황제를 칭하게 되었어요. 이는 청의 속방이 아니라 엄연한 독립국임을 선포한 것입니다. 청은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국경무역 관세 부과의 어려움과 청 상인들이 일본 상인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현실에서 조약체결을 수용하게 되었어요.
1899년 9월 14일에 체결된 한청조약은 상호 영사재판권을 인정한 대등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은 자주독립국이자 황제국을 선포한 대한제국의 외교적 의지와 역량의 시험장이었어요. 이로써 사대외교에 기반을 두었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교민보호라는 것을 내세워 간도영유권 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어요.
거센 제국주의 질서 속에 홀로 내던져진 조선의 운명
당시 한국 측의 민간 여론은 완전한 대등조약의 체결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청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높아 영사재판권의 철폐를 주장했어요. 은 청이 열강에 의해 쪼개지는 것을 틈타 ‘이 기회에 청국을 쳐 요동과 만주를 차지해 보자’고 까지 했습니다. 청을 야만이자 침략의 대상으로 격하시키고 있었어요.
아울러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데, 독립문은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심지어 궁궐마저 훼손하면서도 독립문만은 원형 그대로 잘 유지시켜 해방이 될 때까지 남아 있었던 것인데요. 왜냐하면 조선의 독립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에게 강요한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독립문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정경
이제 그토록 바라던 자주독립국이 된 대한제국은 이제 청의 지원 없이 홀로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사실 조선의 독립은 일본이 바라는 바였습니다. 그래야 청의 간섭 없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을테니까요. 그런데 청이 사라진 자리를 뜻밖에 러시아가 차지하게 되자, 이젠 러시아와의 결전을 대비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