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레퀴엠 [사회혁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인을 비롯하여 많은 신하들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삼문,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이 단종복위운동을 벌이다가 극형에 처해진 것도, 단종을 비롯하여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죽은 것도 상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조와 그에게 가담한 종친들, 그리고 측근 공신들이 당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피해를 입혔는지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조가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운 왕이라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할 필요는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야사나 설화를 통해 사실과 다른 수많은 전설이 만들어졌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정순왕후와 경혜공주가 노비로 전락했다는 이야기일 텐데요. 너무나 안타까운 비극을 겪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면 안될 것입니다. 동시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의 피해자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지요.
사실과 다른 전설이 된 정순왕후 송씨의 비극과 정업원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계속해서 단종에게 국혼을 강요합니다. 아직 아버지 문종의 국상 중이라는 이유로 끈질기게 거절했던 단종도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1454년 열네 살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된 송씨의 아버지 송현수는 세조와 친구사이였습니다. 송현수가 장인으로 선택된 이유는 그가 정치적 욕심이 없다는 이유였어요. 그런데 왕비는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를 함에 따라 불과 1년 만에 대비로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됨에 따라, 그녀 역시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났어요. 하지만 이미 친정이 풍비박산 난 상태라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간 곳은 1448년 세종 때 폐지되었다가 세조가 1457년에 다시 만들어 준 정업원이었어요. 이곳은 고려 시절부터 이어져 선왕의 후궁들이 주로 거처하던 시설로서 창덕궁 근처에 있었습니다.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왕족들의 아내들이 이곳으로 모였어요.
정업원은 몰락한 왕실 여성들의 해방구였고, 이들의 마지막 안식처였습니다. 정순왕후나 경혜공주가 정업원에 들어간 이유이기도 하지요. 정업원의 주지 임명권은 대왕대비가 직접 가지고 있었고,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 곡식 등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찰이었어요. 그러니까 노비로 전락했다거나 동망봉의 전설, 또는 염색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는 이야기도, 공식 기록이 없는 탓에 생긴 근거없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단명한 단종과 달리 모두 80세 넘게 살아남은 단종의 세 부인
정순왕후는 연산군에 의해 정업원이 폐지되자, 사형이었던 스님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인창방(종로구 숭인동) 저택을 수리하고 정업원을 새로 만들어 주지가 되었어요. 건물 일부는 함께 비구니가 되어 보필하던 궁녀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1521년 81세로 죽기 전, 단종의 사당을 비롯한 건물 그리고 노비들을 정미수의 아내에게 상속해 준 문서가 발견되었어요. 나중에 영조는 그 자리에 ‘정업원 구기터’라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영조가 세운 정업원 옛터 비각. (종로구 숭인동 소재)
그런데 정순왕후가 간택되었을 때, 함께 참여했던 두 여성은 단종의 후궁이 되었는데요. 그 가운데 권완의 딸인 권중비라는 후궁은, 아버지가 송현수와 함께 역모로 몰려 처형을 당하자 영광에 관비로 끌려 갔다가 1457년 도승지 조석문에게 노비로 하사되었습니다. 세조 10년 1464년에 방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권씨가 진천에서 힘들게 살고 있었다는 1519년 기록도 있습니다. 1521년 82세까지 살았다는군요.
함께 후궁이 된 김씨는, 무관 출신으로 당시 함경도 절제사로 있던 김사우의 딸이었습니다. 김사우 역시 단종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 대상이 되었지만, 세조는 여진족을 장악하고 있던 그를 제외시켜 주었어요. 세조 10년 1464년에 사망했는데, 실록에 실린 그의 졸기에도 단종의 장인이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김씨는 한양에서 85세까지 살았어요. 단종은 단명했지만, 그의 세 부인들은 모두 장수했습니다.
단종의 양아들이 세조의 적손 연산군 몰아내는 공신이 되다
단종은 궁궐보다 유일한 혈육인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주 머물렀어요. ‘계유정난’을 일으킨 날에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세조는 단종과 가까운 종친들을 계속해서 유배를 보내거나 죽였어요. 영양위 정종도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전라도 광주로 유배를 갔습니다. 이때 경혜공주도 함께 머물렀는데, 이렇게 가족과 함께 유배생활을 하는 것을 완취(完聚)라고 하는데요. 정미수는 1456년 유배지 광주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런데 정종은 승려들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탄핵을 받고, 세조 7년 1461년에 24살의 나이로 능지처사를 당했습니다. 공주가 순천의 관비로 끌려갔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요. 25살 공주는 정희왕후의 요청으로 아들 정미수와 함께 한양으로 소환되어 집과 노비 및 나중에는 빼앗겼던 보물도 돌려받습니다. 정미수는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나중에 성종이 되는 둘째 자산군과 함께 성장했어요.
어쨌든 왕실의 보호를 받고 큰 정미수는, 예종 때 세조의 유지에 따라 종친으로 다시 대우를 받았고, 성종대에 벼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연산군 시절에도 요직을 거치며 원만한 처세로 살아남았다가, 중종반종에 가담하여 공신에 책봉되었어요. 역적의 자식이라고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국왕들은 끝끝내 그를 보호했습니다. 경혜공주는 1474년 38살의 나이에 아들에게 풍족한 재산을 나누어 주고 세상을 떠났어요.
정순왕후와 해주 정씨 가문 사연 담긴 사릉(思陵)
정순왕후는 성종에게 정미수를 시양자(侍養子)로 정해 달라고 청해 허락을 받았습니다. 정미수는 그녀를 집에 모시고 봉양을 잘했지만, 1512년 중종 7년에, 57세로 먼저 사망했습니다. 정순왕후는 그 후에도 자신을 잘 모신 정미수의 아내에게 재산 모두를 상속했습니다. 1521년 중종 16년에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손이 없는 정미수가 양자로 들인 정승휴의 자손들이 대대로 단종과 정순왕후에 대한 제사를 지냈어요.
그녀의 무덤도 양주에 있는 해주 정씨가의 선산에 마련되었습니다. ‘노산군부인 송씨지묘(魯山君夫人 宋氏之墓)’라고 하는 옛 비석이 남아 있어요. 그런데 숙종 대에 왕비로 추존되면서 사릉이 되었습니다. 이때 왕릉의 전례에 따라 해주 정씨의 묘지들은 모두 철거되어야 했지만, 그동안 제사를 모셔왔던 공로를 인정하여 그대로 두도록 결정되었어요. 그래서 사릉에는 왕릉과 일반 묘역이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가 묻혀 있는 사릉. (경기도 남양주군 소재)
단종의 생모와 유모도 세조의 탄압을 피하지 못해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이 12살에 사망하자, 태종은 안평대군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어 가게 했어요. 그런데 안평대군이 죄인으로 몰려 사망하자, 양모인 성녕대군의 처 성씨도 폐서인해 경주로 유배시켜 버렸습니다. 안평대군의 아들들은 물론 살해당했고, 며느리 군부인 남씨와 딸은 공신 권람의 노비로 전락했어요. 궁녀 출신이었던 세종의 후궁 영빈 강씨의 아들 화의군은 익산에 30년 동안 유배를 당했지요.
단종을 낳다가 스물네 살의 나이에 산후병으로 사망했던 세자빈 권씨는 문종이 등극하자 현덕왕후로 추존되었어요. 그런데 단종복위운동에 동생 권자신이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미 죽은 아버지 권전과 함께 폐서인을 당했습니다. 세조는 죽은 형수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은 다른 곳에 대충 묻어 버렸고, 문종과 함께 봉안되었던 종묘의 위패도 철거했어요.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 권자신의 처자식도 사형당했습니다.
혜빈 양씨와 그의 아들들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혜빈 양씨는 아버지 세종의 후궁으로서, 세종의 명에 따라 죽은 세자빈을 대신하여 단종을 유모처럼 키운 인물이었지요. 그런데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혜빈 양씨는 반역을 도모했다며 청풍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처음에는 단종의 부탁을 받고 사형은 면해 준다고 했다가, 몇 달 후에 결국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녀의 아들 한남군과 영풍군도 유배지에서 죽었어요.
반역의 땅 낙인찍혀 지도에서 사라진 순흥도호부
금성대군은 유배를 갔던 경상도 순흥도호부에서, 세조 3년 1457년에 이보흠 부사를 포함하여 지역의 선비들을 모아 세조를 내쫓을 계획을 세웠으나 관노의 고변으로 발각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를 도운 것으로 판명된 수백 명이 처형되었지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순흥부는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혀 아예 고을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풍기와 영주, 봉화로 분할되어 편입되고 말았어요.
단지 고을이 사라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토지와 백성을 모두 풍기군에 붙이고 창고와 관사를 파괴하고, 그 기지를 허물어버리며 또 호장·장교로서 우두머리 되는 자는 전 가족을 강원도 전역의 아전으로 보내 법을 엄하게 하소서 라고 하여 윤허를 받았다고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다가 풍기가 순흥을 다 포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영천 및 봉화와 나누게 되었고 226년 후에야 다시 회복했습니다.
지금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 자리는 원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는데, 순흥부가 사라질 때, 관군에 의해 불타 버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1542년 중종 37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그 절터 위에, 고려 후기에 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했던 안향을 모시기 위해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건립했습니다. 1549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가 되어, 명종에게 사액을 요청하면서 소수서원이 되었어요.
안향을 모신 소수서원. (경북 영주시 소재)
정통성 없는 권력이 빚은 참혹한 운명들
세조가 유능한 왕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재위 13년 동안 자신의 정통성 부재를 의식하여,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은 비판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어요. 거기에는 친형제와 친구, 숙모와 아버지의 후궁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참혹했던 피해자들의 운명이 너무 가슴 아팠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내어 진혼곡이라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동시에 이 시기 실록은 아무래도 세조의 입장에서 쓴 것이 분명해서, 그를 정당화하기 위한 평가의 부분은 제외하고 사실적인 서술만 참고하려고 노력했어요. 반대로 피해자 측의 자료가 없다 보니, 그들에 대한 야사나 설화의 내용들이 전혀 사실과 달리 윤색되어 널리 유통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내는 것이 역사학자의 임무이지요.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권력은 결코 나눌 수 없고, 한번 잡으면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인간의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잡는 경우, 정통성의 부재로 인해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어 있어요. 지난 12.3 불법계엄도 만약 성공했다면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불법행위에 저항을 하다가 또 많은 희생자를 냈겠지요. 우리가 이 시점에서 세조의 행위를 냉정하게 평가하는 이유입니다.주진오 한국현재사 formch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