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작은 키에 13억 중국을 바꾼 덩샤오핑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젊을 때 키 157센티미터, 나이 들어선 152센티미터. 담배를 하루에 한 보루씩 피워댔다는 소문. 세 번이나 권력의 벼랑 끝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기어 올라온 집념의 인간.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은 그런 사람이었다. 중국 현대사에서 그의 이름은 마치 양날의 칼처럼 빛나고 또 피를 흘린다. 어떤 이에게는 수억 명을 가난에서 건져낸 실용주의 지도자요, 어떤 이에게는 민주화의 싹을 탱크로 밟아버린 냉혹한 권력자다.
1979년의 덩샤오핑(위키피디아)
세 번 넘어져 세 번 일어난 사나이
덩샤오핑은 1904년 쓰촨성의 작은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열여섯 살에 프랑스로 건너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마르크스주의를 접했고, 이후 소련을 거쳐 중국 공산당의 핵심 대열에 합류했다.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함께 혁명을 완수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기여한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 참 운이 없었다. 아니, 운이 나쁜 건지 시대가 나빴던 건지.
첫 번째 실각은 1966년이다.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1966~1976)을 일으키며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실권파 라는 딱지를 붙여 덩샤오핑을 권력의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그는 강제로 농촌의 트랙터 공장에서 일했다. 중국 2인자가 트랙터를 고쳤다니, 이건 조선 시대로 치면 영의정이 논두렁에서 모내기를 한 격이다.
두 번째로 1973년 화려하게 복귀하나 싶더니 1976년 다시 쫓겨났다.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의 죽음을 애도하는 민중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썼다.
세 번째 복귀는 1978년. 마오쩌둥이 세상을 뜨고 사인방(四人幇)이 몰락하자, 드디어 덩샤오핑의 시대가 열렸다. 그의 나이 일흔넷이었다. 그 때 나라 살리기를 시작했다. 비유하면 은퇴 후 귀촌이라도 할 나이에 13억 직원들이 일하는 회사 회생을 맡은 셈이다.
덩샤오핑이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1921년).(위키피디아)
고양이가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
덩샤오핑 하면 반드시 나오는 말이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 원래는 쓰촨 지방의 속담이었다고도 하는데, 덩샤오핑이 이 말을 꺼낸 순간 그것은 단순한 속담이 아니라 중국의 새로운 국가철학이 됐다.
무슨 뜻인가. 이념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는 말이다.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를 따지기보다, 인민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먼저라는 뜻이다. 이걸 학술적으로는 실용주의 라 부르지만, 솔직히 말하면 따질 시간 있으면 일이나 해 에 가깝다.
그가 밀어붙인 개혁개방 정책은 1978년 이후 중국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농촌에서는 집단농장 대신 개별농가가 생산의욕을 찾았고, 해안지역에는 외국기업을 유치하는 경제특구가 설치됐다. 선전(深圳)이라는 작은 어촌은 불과 수십 년 만에 인구 1천만이 넘는 첨단도시로 탈바꿈했다. 이 속도라면 제주도에 삼성 공장을 지었더니 실리콘밸리가 됐다고 보면 된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수억 명의 중국인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세계은행 통계를 보면 중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1978년 약 200 달러에서 덩샤오핑 사망 직전인 1996년에는 700 달러를 넘어섰고, 이후 계속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인류 역사에 이토록 짧은 시간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가난에서 벗어난 사례는 없다. 덩샤오핑이 없었다면 오늘의 중국도 없었다는 말은, 싫든 좋든, 틀리지 않는다.
1937년 덩샤오핑이 국민총연맹(NRA) 제복을 입고 있는 모습(위키피디아)
그러나, 탱크 앞에 선 청년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잠깐 멈춰야 한다.
1989년 6월 4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군대의 총과 탱크에 쓰러졌다. 사망자 수는 지금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중국 정부는 수백 명이라 하지만, 여러 정황과 증언은 수천 명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결정을 내린 최고 책임자가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그는 사회 안정이 없으면 개혁도 없다 고 말했다. 논리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논리의 결말이 광장에 선 맨몸의 청년들에게 탱크를 보내는 것이었다면, 그 논리는 이미 논리가 아니라 폭력이다. 경제기적이 아무리 눈부셔도 이 장면 하나가 덩샤오핑의 역사적 평가에 지울 수 없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흰 고양이도 검은 고양이도 쥐를 잡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 쥐가 자기 나라 젊은이들이었다면, 그건 좋은 고양이가 아니다.
1949년 덩샤오핑(왼쪽)과 허룽(가운데), 주더(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읽는 덩샤오핑, 우리가 배울 것과 경계할 것
한국은 2024년 말 대통령 탄핵 정국을 지나 2025년을 거치며 또 한 번 정치적 격랑 속에 있다. 트럼프가 일으킨 이란 전쟁으로 세계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져들고, 청년들은 집도 일자리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이런 때에 덩샤오핑의 삶은 우리에게 몇 가지 날카로운 물음을 던진다.
첫째, 실용주의의 용기.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라는 신성한 교리를 스스로 깨뜨렸다. 그것도 마오쩌둥의 후계자들이 즐비한 상황에.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지지층의 눈치 보기를 멈추고 국민 전체를 위해 불편한 선택을 내린 적이 있는가?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각자의 교리가 마치 목숨보다 소중한 것처럼 굴면서 현실은 나 몰라라 하는 모습, 어딘지 낯설지 않다.
둘째, 장기 비전의 힘. 덩샤오핑은 2050년까지 중국을 중진국으로 만들겠다 는 100년 단위의 구상을 했다. 한국의 정치 주기는 대통령 5년, 국회의원 4년이다. 그러니 정책도 4~5년 단위로 쪼개진다. 30년 후를 내다보는 에너지정책, 산업정책, 교육정책이 나오기 어려운 구조다. 임기 안에 성과가 나와야 표를 받으니까. 덩샤오핑 자신이 그 열매를 못 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씨앗을 심었다. 그게 진짜 지도자의 모습 아닐까.
셋째, 그리고 반면교사. 민주주의 없는 성장의 끝.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한다. 덩샤오핑 모델의 최대 약점은 민주주의의 결핍이었다. 경제는 열었지만 정치는 닫았다.
그 결과 오늘 중국에서 시진핑(1953~ )은 사실상 종신 권력을 굳히고 있고, 인민은 경제적 풍요를 얻었지만 정치적 자유는 여전히 요원하다. 한국은 달랐다. 1987년 피 흘리며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2016~2017년 촛불혁명으로 그것을 지켜냈다. 이것은 덩샤오핑의 중국이 아직 갖지 못한 자산이다. 우리가 가진 이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우리도 탱크를 부를 수 있는 제2의 윤석열을 만날 수 있다.
덩샤오핑(왼쪽)이 1954년 제14대 달라이 라마(오른쪽)와 만났다. (위키피디아)
작은 키, 긴 그림자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향년 92세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기 5년 전인 1992년,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남쪽 해안도시들을 순시하며 개혁을 멈추지 말라 고 외쳤다. 이른바 남순강화 (南巡講話)다. 은퇴한 지도자가 여행을 하며 강연을 하자 나라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쯤 되면 그의 영향력은 직책이 아니라 인격과 신뢰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빛나지는 않는다. 천안문의 피는 역사가 잊지 않을 것이고, 잊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수억 명을 건져 올린 것도 역사가 기록할 사실이다.
한 인간이 이토록 거대한 명암을 동시에 품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불편하고도 중요한 교훈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이여, 덩샤오핑의 실용을 배우되 그의 폭력은 배우지 마시라. 고양이 색깔 따질 여유에 청년들 밥상부터 챙기시라. 그리고 무엇보다, 광장에 탱크를 보내는 나라가 얼마나 오래 가는지, 역사는 이미 대답하고 있다.
덩샤오핑(왼쪽)이 훗날 주석이 되는 리셴녠(李先念, 가운데), 저우언라이 총리와 함께 1963년에 찍은 사진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