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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동북아 전력망 연결로 평화를 설계하자

동북아 전력망 연결로 평화를 설계하자
[뉴스]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저트센터의 데저트 태양광 발전시설 가동식에서 샐리 주얼 미 내무부장관이 태양광 패널을 둘러보고 있다. 2015.2.9. [AP=연합뉴스] 올해 봄 캘리포니아의 어느 저녁, 인류 에너지 역사에 기록될 기념비적인 장면이 소리 없이 펼쳐졌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자 사막 위에 끝없이 펼쳐진 수십 기가와트(GW)의 태양광 패널들이 일제히 잠들기 시작했다. 도시는 퇴근한 시민들이 불을 켜고 가전제품을 가동하며 전력 수요가 수직으로 솟구치는 시간이었다. 전력 학계에서 한때 오리 목(Duck Curve) 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던, 가파르고 위험한 저녁 피크타임의 도래였다. 과거에는 이 급격한 곡선을 메우기 위해 대형 가스발전소들이 헐떡이며 화석연료를 태워야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은 달랐다. 캘리포니아 전역에 설치된 거대한 배터리 저장장치(BESS)들이 숨죽이고 있던 12기가와트가 넘는 전기를 일제히, 그리고 조용히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낮 시간 동안 넘쳐나 버려질 뻔했던 뜨거운 태양빛이 정확히 필요한 순간, 가장 효율적인 형태로 도시의 핏줄을 타고 흘러들었다. 가스발전소의 굴뚝은 매연을 뿜지 않았고, 전력망은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같은 날 지구 반대편,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의 호젓한 주택가에서도 경이로운 광경이 목격되고 있었다. 일과를 마친 주민들이 공유 전기차를 집 앞 충전기에 꽂자, 차들은 전력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력망으로 전기를 되돌려주고 있었다. 낮 동안 주택 지붕의 태양광 패널이 모아둔 햇빛을 전기차의 배터리가 머금고 있다가, 전력 수요가 치솟는 저녁 시간에 동네 전체로 공급하는 이른바 바퀴 달린 발전소 , 즉 양방향 충전(V2G, Vehicle-to-Grid) 기술의 현장이었다. 자동차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거대한 분산형 발전소이자 저장장치로 진화한 것이다. 이 동네에서 고작 500대의 전기차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것만으로도 마을 전체 전력 수요의 10분의 1을 가볍게 감당해낸다. 이것은 먼 미래의 공상과학 소설이 아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는, 이미 우리 곁에 도달한 눈부신 현실이다. 재생에너지는 더 이상 불안정하고 보조금에 의존하는 가난한 에너지 가 아니다. 기술은 무르익었고 비용은 무서운 속도로 내려앉았다. 배터리 가격은 최근 몇 년 사이 절반 가까이 폭락했으며, 흩어진 소규모 재생에너지와 전기차 배터리를 소프트웨어로 묶어 하나의 거대한 발전소처럼 운영하는 가상발전소(VPP) 기술은 인공지능(AI)과 결합하여 전력 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최근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거대 테크 기업들의 AI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역시, 이 효율적인 지능형 분산 전력망만이 지속 가능하게 감당할 수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전남 신안군 지도읍에 건설된 세계 최대 규모의 추적식 태양광발전소단지. 연합뉴스 화석은 고립을 낳고, 햇빛은 연결을 부른다 우리는 여기서 기술의 진보를 넘어, 에너지가 가진 본원적인 철학과 마주해야 한다. 인류 문명은 어떤 에너지를 기반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구조와 평화의 형태를 결정해왔다. 석유, 석탄, 가스로 대표되는 화석연료는 본질적으로 고립과 독점의 에너지 다. 특정 지역에만 매장되어 있고, 대규모 자본과 권력이 이를 채굴하여 거대한 저장고에 쌓아두어야만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화석연료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독점의 역사였고, 지배의 역사였으며, 그 독점권을 빼앗기 위해 피를 흘리는 전쟁의 논리 를 낳았다. 중동의 전쟁도, 글로벌 공급망을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도 결국 화석연료가 가진 고립성과 유한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국가가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통제하고 감시해야 하는 대형 원자력 발전 역시 이러한 독점과 고립의 연장선상에 있다. 반면, 햇빛과 바람으로 대표되는 재생에너지는 본성적으로 연결과 공유를 요구한다. 햇빛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으며 지구상 어디에나 내리쬔다. 다만 기후와 시간에 따라 변덕스러울 뿐이다. 이 변덕스러움이라는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재생에너지가 선택한 진화의 방향이 바로 연결 이다. 넓은 지역의 전력망을 하나로 묶고, 남는 곳의 전기를 부족한 곳으로 실시간으로 나누며, 수백만 개의 미시적인 배터리를 연결할 때 재생에너지는 비로소 화석연료를 압도하는 가장 강력하고 안정적인 에너지가 된다. 이 차이는 문명사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을 선언한다. 독점 가능한 에너지가 지배와 전쟁을 불렀다면, 연결을 요구하는 에너지는 필연적으로 협력과 공존의 논리 를 부른다. 연결될수록 모두가 이로워지고 안전해지기 때문이다. 이 연결의 논리는 가정을 넘어 단지로, 단지에서 섬으로, 국가에서 대륙으로 끊임없이 확장된다. 대한민국 내부에서도 제주는 재생에너지 비중이 전국에서 가장 앞서가지만, 육지와의 해저 연계선(HVDC)이라는 전력망 연결 통로가 있었기에 출력제한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많은 재생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었다. 유럽은 이미 대륙 규모의 상호연계 전력망을 통해 국가 간 장벽을 허물고 초국가적 에너지 공동체로 작동하고 있다. 여기서 오늘날 한반도가 마주한 가혹한 실안보적 상황이 드러난다. 대한민국은 전력망과 에너지 관점에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외로운 ‘전기적 섬(Electrical Island)’이다. 대륙과의 전력망 연결이 없는 한, 우리는 언제나 에너지적으로 고립무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동북아 대륙과의 전력망 연계는 단순한 경제적 선택이 아니라, 한반도의 생존 조건이자 분단 체제를 물리적으로 해체하는 평화의 위대한 인프라가 될 수 있다. 전기로 묶인 이웃은 서로를 겨누지 못한다 평화는 말의 성찬이나 가냘픈 선언문, 혹은 정치가들의 일시적인 악수 퍼포먼스로 오지 않는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뒤틀리거나 국내 정치적 위기가 찾아오면, 수십 장짜리 평화 조약서와 불가침 선언문은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되어 불타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인류의 잔혹한 전쟁사를 통해 뼈저리게 학습했다. 진짜 평화는 인간의 연약한 ‘선의’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공격하는 순간 자신도 파멸할 수밖에 없는 물리적 상호의존 구조를 만들 때 비로소 작동한다. 가장 완벽한 모범 답안은 유럽연합(EU)의 출발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의 앙숙이었던 프랑스와 독일은 또다시 전쟁을 벌이지 않기 위해 기막힌 묘수를 내놓았다. 당시 전쟁의 가장 핵심적인 군수물자였던 석탄과 철강의 권한을 양국 정부로부터 빼앗아 초국가적 기구에 귀속시킨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의 출범이었다. 군수물자의 목줄을 서로가 공유하고 있으니, 상대방 몰래 전쟁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신뢰가 있어서 시스템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어 상호 신뢰를 강제한 것이다. 이 당돌한 인프라의 통합이 자라나 오늘날 거대한 유럽연합이라는 인류사적 평화 공동체를 일구어냈다. 이제 우리는 석탄과 철강의 시대를 지나, 전력과 에너지의 시대를 살고 있다. 국경을 넘어 전기가 흐르는 동북아 전력망 연결은 그 무엇보다 강력한 ‘평화의 중력’을 만들어낸다. 초고압 직류 송전선은 양국의 심장을 연결하는 혈관과 같다. 일단 전력망이 연결되면, 갈등이 생겼다고 해서 쉽게 전기를 끊을 수 없다. 전기를 끊는 순간 송전선의 저항과 계통 충격으로 인해 자국 전력망도 함께 붕괴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전력망으로 묶인 이웃은 서로를 쉽게 겨누지 못한다. 이것이 기술이 만들어내는 구조적 평화다. 과거부터 논의되어 온 동북아 전력망 연결 구상은 러시아와 중국도 오랫동안 그 타당성을 인정해왔다. 이 구상이 매력적인 이유는 참가국들의 도덕적 선의가 아니라, 철저한 이해의 합치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풍부한 재생에너지 자원을 수출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송배전 기술과 자본을 제공하며, 북한은 대륙과 해양을 잇는 요충지로서 전력망 통과 이익과 국가 전력망 재건의 혜택을 얻는다. 전력망 연결은 단순한 에너지 인프라가 아니라, 동북아 국가들을 물리적 경제적으로 한 몸으로 만드는 평화의 구조물이다.   2026년 5월 24일, 중국 북부 산시성 제슈 인근 언덕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들. 2026.5.24.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국제학술대회 을 제안한다 물론 이 대륙 전력망으로 가는 길이 순탄한 탄탄대로일 리는 없다. 한국의 좁은 국토와 제도적 규제는 재생에너지 확산에 불리한 여건을 조성하고 있으며, 동북아의 얽히고설킨 대륙 전력망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고도의 지정학적 함수 관계다. 무엇보다 조선(북한)의 노후화된 전력망은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사실상 초토화된 인프라를 무에서부터 다시 건설해야 하는 재건 수준의 난제다. 그러나 거센 파도와 암초가 두렵다고 해서 배를 띄우지 않는다면 인류는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유럽이 접경 지역의 작은 송전선을 잇는 미시적인 시도로 시작해 대륙의 통합을 이루었듯, 우리에게도 담대한 상상력과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우리는 골방의 담론을 넘어, 전 세계의 지혜를 한데 모으는 실천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 이에 필자는 국토와 에너지의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학계, 정계,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사회의 염원을 담아, 서울에서 국제학술대회 을 개최할 것을 정식으로 제안한다. 이 학술대회는 단순히 재생에너지의 발전 효율이나 기술적 지표를 공유하는 통상적인 학술 행사가 아니다. 기술(Energy)이 어떻게 지정학적 갈등(Politics)을 구원하고 평화(Peace)를 구조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3대 핵심 의제 첫째, 기술 안보와 동북아 전력망 연결 구축 이다. 캘리포니아와 네덜란드 등 글로벌 에너지 혁신 사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한국의 기술과 북한의 입지, 대륙의 자원을 결합하는 구체적인 전력망 연계 시나리오를 도출한다. 분산형 지능형 전력망과 중앙집중형 대형 발전 방식의 비용·안정성·지정학적 적합성을 다각도로 비교하고, 동북아 에너지 전환의 최적 믹스를 과학적으로 설계한다. 구체적인 전력망 연계 시나리오를 도출한다. 둘째, 이해의 합치를 통한 구조적 신뢰와 평화의 제도화 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역사적 교훈을 21세기 에너지 대전환의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정권의 성향이나 외교적 갈등에 좌우되지 않는 초국가적 다자간 에너지 협정 체계를 설계하고, 전력망의 상호의존성이 어떻게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평화의 중력 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 정치외교학적·경제학적 메커니즘을 구체화한다. 셋째, 에너지 전환과 공유부(Common Wealth)의 결합 이다. 대륙 전력망의 구축과 광활한 재생에너지 개발에서 발생하는 문명적 이익은 결코 소수 대자본이나 국가 권력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거대한 과실을 토지와 에너지의 공유부 로 귀속시켜 시민들에게 배분하는 경제 모델을 토론한다. 나아가 AI 전력망과 가상발전소를 통해 평범한 시민들이 생산자이자 주권자로 참여하는 분산형 주권 모델을 정립하고, 이를 연대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젓자 우리는 지금 인류 문명사의 거대한 분수령에 서 있다. 에너지를 독점하고 빼앗기 위해 국경선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던 야만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는 에너지를 나누고, 전력망을 연결하며, 생존을 위해 서로 손을 잡아야만 하는 지혜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기술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고, 역사의 물줄기는 흐르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우리의 안목과 결단이다.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외로운 ‘전기적 섬’에 갇혀 있을 수는 없다. 대륙과의 전력망 연결은 한반도를 분단의 차가운 종착역에서, 대륙과 해양을 폭발적으로 연결하는 에너지 평화의 번영하는 출발점으로 완전히 바꾸어놓을 것이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 대전환의 도도한 파도가 밀려오는 지금이야말로 평화의 돛을 올릴 골든타임이다. 서울에서 시작될 국제학술대회가, 전력망으로 연결된 동북아가 마침내 총구를 내리고 손을 맞잡는 역사의 기점이 되기를 희망한다.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leewys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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