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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호랑이 할아버지’ 김구는 왜 담배를 끊었나

‘호랑이 할아버지’ 김구는 왜 담배를 끊었나
[사람들]
백범 김구의 별명은 ‘호랑이’였습니다. 해방 후 들어선 미군정은 한 수 더해 ‘블랙타이거’(Black Tiger)라고 불렀습니다. 광대뼈가 발달한 고집스러운 인상,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맹수 같은 성격, 그리고 반민족적인 것에는 굴하지 않은 무장 독립운동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그가 타계한 며칠 후 1949년 7월 4일 자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KOREA: Death of a Tiger”(한국: 호랑이의 죽음)라는 강렬한 헤드라인과 함께,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둔 백범의 비극적인 서거 직후의 모습을 실어 충격을 주었습니다.   김구 서거 직후의 사진. 1949년 7월 초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은 ‘KOREA: Death of a Tiger’라는 제목으로 김구의 죽음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백범은 50대까지 담배를 즐겼습니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초기 임정의 기강을 확립했던 그는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양철통에 50개비가 들어있는 값싼 백금룡(百金龍 바이진롱)을 한 대씩 뽑아주며 함께 담배를 즐겼습니다. 그에게 담배는 망국의 고독과 어려움을 버티게 해준 ‘망명의 진통제’였습니다. 주변에서 담배를 줄이라”고 만류하면 김구는 이미 담배 인이 박였는데, 이걸 어찌 끊겠는가? 옛다, 같이 한 대 더 먹자!”고 궐련을 던져주었습니다.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라고 할 만하지요. 그랬던 호랑이 할아버지가, 1937년의 어느 날 밤, 담배를 끊었습니다. 중일전쟁의 포화 속에 상해가 일본군에 함락되기 직전이었습니다. 김구는 남경에서 자신의 가장 믿음직한 오른팔이자 참모인 안공근을 불렀습니다. 상해에 남겨진 안중근 의사의 부인(김아려 여사)과 식솔을 무사히 구출해 오게.”   1935년 11월 7일 중국 항주(杭州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창립하고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앞줄 왼쪽부터 송병조 이시영 김구 이동녕(앞의 어린이는 엄항섭의 딸 기순) 조완구, 뒷줄 왼쪽부터 엄항섭 양무조 김봉준 안공근 차리석 조성환. 김구에게 안중근 의사 가문과의 관계는 특별했습니다. 청년 시절 동학운동이 실패하자 관군에게 쫓기던 김창수(김구의 본명)를 거두어준 이가 바로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였습니다. 안 진사는 동학군을 토벌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젊은 김구의 소문을 듣고 보호해준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김구가 안 의사의 유족을 지키는 것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의리이자, 평생의 은혜를 갚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해로 들어간 안공근은 김구의 노모인 곽낙원 여사만을 모시고 나왔습니다. 김구는 안공근을 크게 나무랐습니다. 양반의 집에 불이 나면 사당에 가서 신주(神主)부터 안고 나오는 법이거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손에 포기하고 오다니! 이것이 가문의 도덕이며, 혁명가의 도덕이란 말이냐?” 상황이 급박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안공근에게 김구는 말했습니다. 나도 오늘부터 담배를 끊겠다. 너도 참된 혁명가가 되어라.” 그 후 김구는 서거하는 순간까지 단 한 개의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김구는 부하를 야단치는 자리에서 왜 ‘금연’을 선언했을까요? 그 이유는 조금 복잡합니다. 그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람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김구보다 13세 어린 안공근은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입니다. 큰형은 중근, 둘째 형은 정근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일제에 쫓긴 공근은 보통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습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수색과 추적이 계속되자 안창호의 주선으로 흑룡강(黑龍江 헤이룽장)성으로 갔고, 다음해 모스크바로 공부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931년 11월에는 김구와 함께 일제 주요 요인을 암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단장 김구를 도우며 참모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유창한 러시아어를 배경으로 프랑스 공무국 정보담당관인 러시아인을 통해 일본영사관의 많은 정보를 수집해 임정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 정부와의 교섭과 연락업무를 담당하면서 김구의 핵심 측근으로서 확고한 위상을 확보했습니다.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할 무렵, 안중근의 부인을 모시고 나오지 못하자 김구가 안공근을 야단쳤다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안공근은 다시 상하이로 들어갔지만, 자신의 가족만 데리고 빠져나왔고, 안중근의 부인은 끝내 모시고 오지 못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안공근은 김구의 신망을 잃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사정이 혼재해 있습니다. 당시 임정의 재정과 특무 조직을 관리하던 안공근이 독립운동 성금 중 일부를 사사로이 챙기거나 불투명하게 사용했다는 물의가 임정 내부에서 계속 불거졌습니다. 사람들이 안공근에 대한 불만을 말하면 김구는 자금 관리는 어려운 업무라며 여전히 안공근을 신뢰했습니다. 특무부대의 중견단원 김동우, 오관식 등 7~8명이 김구의 독재적 행동과 안공근의 전횡불륜(專橫不倫) 행위에 분개했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특무부대를 이탈하여 상하이에서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김구는 자금 관리 업무에서 안공근을 배제했고, 신뢰를 잃은 안공근은 한동안 독자적인 정보 활동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후 안공근은 홍콩으로 갔습니다. 상해에 침투하여 안중근의 부인을 모셔오려고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감시가 삼엄해 다시 상해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안공근은 홍콩에서 중경으로 온 직후인 1939년 5월 30일 행방불명되었습니다. 그 이유나 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정정화는 자신의 일대기인 『장강일기』에서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안공근이 형 안중근의 일로 말썽을 일으키고 공금을 챙겨 홍콩으로 잠시 몸을 피한 일이 있었다. 재주가 많고 말을 잘하는 이라서 여기저기에 허튼소리를 하고 다녔던 모양이다. 임정 어른들께 야단을 맞게 생겼으니까 홍콩으로 도망갔던 것이다. 백범은 나중에 돌아온 그에게 ‘이제 사람이 돼라. 지금 이 자리에서 결심을 해라. 그 대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이 담배를 끊겠다. 네가 사람이 될 때까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1920년대부터 안공근과 친밀하게 교류했던 정화암은 자서전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에서 안공근은 자금 사용 문제로 김구와 사이가 벌어지자 김구를 축출하고 자신의 형(안정근)을 추대하려고 했다가 발각당하는 바람에 김구로부터 모든 행동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썼습니다. 이와 관련해 안중근 가문의 여러 인사와 어린 시절부터 친했고,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낸 김자동은 생전에 유진동의 부인 강영파가 자신의 모친 정정화에게 한인 청년들이 안공근의 시신을 유진동의 병원으로 들고 왔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김구 세력의 청년들이 안공근을 손본 후 김구의 주치의인 유진동의 병원으로 싣고 왔지만 살리지는 못했다는 뜻입니다.   1946년 경교장 앞에서의 백범 김구와 며느리 안미생(뒤쪽). 안미생은 1945년 11월 23일 임정요인 1차 환국 당시 김구의 비서로 귀국했다. 일각에서는 김구의 측근들이 안공근을 암살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보냅니다. 이에 대해 김자동 회장(2022년 작고)은 이렇게 잘라 말한 바 있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 백범 선생은 알지 못했고, 살해를 지시한 것도 아니었다.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은 중경 시절부터 1949년 백범이 서거할 때까지 백범의 비서로 일했다. 백범이 자기 아버지 살해 지시를 내린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랬을 리가 없다. 더구나 안공근의 조카딸(안정근의 장녀) 안미생은 훗날 백범의 며느리가 되었다.” 1940년 아들 신과 안미생의 결혼에 대해 김구는 훌륭한 집안의 자제이니 물어볼 것도 없다”며 매우 반갑게 며느리로 맞이했다고 합니다. 김신이 죽고, 안미생은 김구의 비서로 일했습니다. 김구는 안공근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경 시장 양삼화(楊森和 양선허)와 경비사령 유치(劉峙 류즈)를 비롯해 다양한 루트를 통해 안공근 실종사건을 조사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공근의 행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편, 중국의 역사학자 왕병의(王炳毅 왕빙이)는 중국 정기 간행물인 『문사춘추』(文史春秋) 2003년 제11호에 논문 「한국 항일 의사 안공근 중경 실종 사건 내막」을 실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안공근의 실종은 임시정부 내부 파벌 싸움이 아닌, 중국인 이중간첩 라검북(羅劍北 뤄젠베이)이 자신의 일제 밀정 행각을 알고 있는 안공근을 살해해 중경의 폐광 갱도에 유기했다”는 것입니다. 중국 정부 비밀 정보기관의 수사 아카이브와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했다는 이 논문은 발표된 지 한참 지나 국내에 알려졌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라검북은 북경대를 졸업하고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1929년에는 군벌 장학량 휘하에서 정보처장을 지내기도 한 인물입니다. 상하이에서 항일 잡지를 발행하다가 자금난에 처하자 일제 밀정으로 돌아선 국제 이중간첩이라고 합니다. 중국 국민정부 공안당국의 수사 기록에도 이런 내용이 있는데, 라검북이 영국 국적(홍콩 시민권)을 갖고 있어 중국 사법당국이 기소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김구는 담배를 끊은 이유와 안공근의 그 이후에 관해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연구자들은 김구의 선언 속에는 몇 가지 뜻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철저한 ‘자기 징벌’입니다. 김구는 안공근을 탓하기 전에, ‘내 부하를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고, 조국의 영웅인 안중근의 유족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는 지도자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벌을 주기 전에 자신의 욕구를 끊어내는 육체적 고통을 자신에게 부과한 것입니다. 다음은 솔선수범입니다. 말로만 훈계하는 리더는 힘이 없습니다. 김구는 자신의 사적 즐거움을 절단해 버림으로써 말의 무게를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의 금연 선언은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세우는 무언의 압박이라고 봅니다. 한국 독립운동사는 늘 고질적인 혈연, 지연, 파벌 싸움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안공근의 실책 역시 많았고, 둘의 사이는 틀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때 김구는 계파와 연고를 배격하고 공화 정신을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심한 시대였지만, 김구는 끝까지 직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동지를 배신하지 않는 것,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의 가족을 책임지는 것, 남에게 말하기 전에 자신부터 실천하는 것. 김구는 그 원칙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김구가 활동한 시대는 앞을 보기 어렵고, 변절도 극심한 때였습니다.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한 연구자는 김구의 평생에 걸쳐 그를 배신한 사람은 한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임순만 언론인 hnanj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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