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 유서 대필 파기환송심, 조작 기소 끝내 불인정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화 1991, 봄 갈무리
1991년의 봄은 1980년의 봄 못지 않게 잔인했다. 4월 26일 명지대학교 등록금 인하 요구 시위에 나섰던 강경대가 백골단의 린치로 세상을 등지자 많은 젊은이들이 정권에 항의하기 위해 극단을 선택했다. 4월 29일 박승희, 5월 1일 김영균, 3일 전세용, 6일 박창수, 8일 김기설, 10일 윤용하, 18일 이정순과 김철수, 22일 정상순, 25일 김귀정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다.
5월 8일 아침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가 노태우 정권 물러나라고 요구하며 서강대의 한 건물 옥상에서 몸을 던지자 전재기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장은 강신욱 강력부 부장검사 등 6명으로 전담 조사반을 짜서 수사하도록 지시했다. 사건 발생 9시간 만에 강씨의 자택을 압수수색한 것은 이 사건 수사가 정권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었음을 반증한다. 같은 달 11일에 전민련은 검찰의 요구에 따라 김기설의 필적이 담긴 사회국 업무일지를 전달했다.
전민련은 투신 사흘 전부터 김씨가 여자친구 등에게 투신 결심을 알린 뒤 백방으로 그를 만류하려 했다. 하지만 검찰은 아랑곳 않고 김씨의 친구였던 강기훈씨 주변을 샅샅이 뒤져 7월 12일 그를 자살 방조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영화 1991, 봄 갈무리
강씨는 누명을 벗기 위해 몸부림을 쳤으나 이듬해 7월 24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개월이 확정돼 복역했다. 여러 종교단체 등이 여러 차례 사면을 요구했으나 외면당해 1994년 8월 만기 출소했다.
2002년 4월 28일 MBC 91년 5월, 죽음의 배후 편을 통해 침묵으로 일관해 오던 김씨의 부친이 아들이 직접 유서를 썼다고 증언하면서 큰 전기를 맞았다. 제작진은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의 사설감정인에게 의뢰한 결과 유서의 필체가 김씨의 것이 맞다는 소견을 끌어냈다.
2004년 11월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해당 사건을 조사 대상으로 선정했고 이듬해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위원회 를 결성했다. 2007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이 사건을 재조명해 국과수에 필적감정을 재의뢰해 유서의 글씨는 강씨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판단을 이끌어냈다. 결국 1991년 수사 당시 필적 감정을 했던 이도 자신이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물러섰다.
결국 단 하나의 결정적인 증거인 필적 감정서가 위조된 점이 인정돼 재심 결과, 지난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하지만 정권 차원에서 무리하게 기획한 수사 때문에 삶이 송두리째 짓밟힌 강씨가 제대로 된 보상을 받기까지는 또다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CG) 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
서울고법 민사5-1부(송혜정 김대현 강성훈 고법판사)는 21일 강씨가 제기한 손해배상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서 6700 만원을 추가 배상하라고 판결했지만 조작 기소를 인정하라는 원고의 주문을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이날 파기 환송심은 수사 과정에서의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파기환송 취지에 따른 것이었다. 이날 판결을 받음으로써 이제 강씨에 대한 민형사상 모든 재판은 일단락됐다.
재판부는 이날 강씨에게 5300여 만원, 그의 부인에게 500만원, 강씨의 두 동생에게 각각 400여 만원을 추가로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따라서 추가로 늘어난 배상액은 모두 6700만원이 된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이 법원 심판 범위인 개별 불법행위, 위법한 피의자 조사, 변호인 접견 침해,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 위자료를 추가로 정한 것 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7년 1심은 국가와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문서분석실장 김모 씨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며 강씨 측에 총 6억 8000여 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듬해 2심은 강씨에게 6억 8000만원, 부인에게 1억원, 두 동생에게 각각 7166만원을 합쳐 9억 2000여 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다만 2심에서는 전 국과수 문서분석실장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의 소멸 시효가 지났다고 보고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2022년 11월 대법원은 수사 과정에서 일어난 개별 불법행위에 대해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본 원심 판결에 잘못이 있다며 사건을 돌려보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장기 소멸시효 규정이 효력이 없게 됐는데도 원심이 이 규정을 근거로 밤샘 조사, 변호인 접견권 침해 등에 대한 배상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취지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이나 중대한 인권침해·조작 의혹 사건은 국가배상 소멸시효 적용이 되지 않는다고 결정한 바 있다.
이와 별도로 강씨의 자녀 두 명에게 각각 1000만원씩 배상하라는 원심 판단이 대법원에서 확정된 바 있어 최종적으로 강씨와 가족의 배상액은 모두 10억 1000만원에 이를 것으로 변호인단은 추정했다.
당연하게도 강씨 측 변호인단은 법원이 끝내 검찰의 조작 수사가 갖는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변호인단은 입장문을 통해 이번 판결은 사건을 개별 불법행위에 대한 위자료 문제로만 한정하고, 검찰이 주도한 수사 전반과 공소 제기·유지의 불법성을 끝내 인정하지 않아 유서 대필 사건 의 본질을 또다시 외면했다 면서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자행된 수사 조작과 개별적 인권침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불법행위 라며 대한민국은 검찰이 주도한 조작의 전체 책임을 인정하고 강씨와 가족들에게 온전한 사과와 배상을 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법무법인 지향의 김묘희 변호사는 앞서 대법원에서 수사 검사들과 국과수 감정인 개인에 대한 소멸시효는 완성된 것으로 확인하면서 파기환송심 재판부도 이에 따라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법원이 결국 사건의 전체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진실을 기다려 온 피해자에게 또 하나의 절망을 남긴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어 2018년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와 대검찰청 진상조사단도 ‘조작 사건’이었다고 공식 인정했다. 그런데도 국가는 손해배상 소송 과정에서 과거사위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등 책임을 회피했다”며 피해 회복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보여준 대한민국의 태도에 깊은 유감”이라고 했다.
경향신문은 22일 사설에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은 권위주의 시대 검찰이 자행한 정치적 불법수사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무고한 시민의 삶을 무너뜨리고 사법 정의를 왜곡한 사건의 실체와 책임소재가 법원에서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점이 유감스럽다 며 재판은 마무리됐지만, 입법 등 다른 조치를 통해서라도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그것이 오욕의 과거사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 이라고 짚었다.
한겨레신문도 같은 날 사설을 통해 국가 배상의 본질은 돈이 아니다. 피해자의 명예를 온전히 회복하고, 국가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공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래야 국가폭력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 며 강씨 사건은 검찰이 어떤 방식으로 정권에 부역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법원이 진작에 단죄했다면, 검찰이 지금처럼 해체 위기를 맞지 않았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어쩌면 강씨가 35년의 세월을 건너 진정 바랐던 것은 사법부가 억울한 누명을 씌워 3년 동안 자신을 영어에 갇히게 만든 이들의 책임을 엄중히 묻고, 이를 계기로 이들로부터 진심을 다한 사죄를 받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 기회를 사법부는 영영 빼앗아 버렸다. 임병선 에디터 byeongseon1610@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