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가 지켰고 조선일보가 잃은 것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허위 보도를 바로잡습니다: NYT의 기자가 장기간에 걸쳐 조작한 기사로 독자들을 기만했습니다. 그 기자는 해고되었습니다.”
2003년 5월 11일, 세계적 권위지 뉴욕타임스(NYT) 1면에 독자에게 사과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생생한 르포 기사로 이름을 날리던 젊은 기자 제이슨 블레어가 보도한 기사 중 상당수에 가공의 인물이 등장하고, 인터뷰 내용은 연극 대사처럼 기자가 창작한 ‘허위’이고 ‘조작’이라는 사과문이었습니다.
고백하고 바로 잡는 용기로 신뢰 지킨 뉴욕타임스
뉴욕타임스는 152년 역사에 가장 큰 오점을 남긴 ‘최악의 보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쉬쉬하며 숨기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조작된 기사라는 항의가 들어오자 조사팀을 꾸려 블레어 기자가 쓴 기사들을 면밀하게 살폈습니다. 그 결과 블레어 기자가 쓴 73건의 기사 중에 최소 36건에서 심각한 조작과 표절이 있음이 드러났고, 블레어 기자는 해고되었습니다.
2003년 5월 1일자 뉴욕타임스 1면에 실린 ‘조작 기사’ 사과문
블레어 기자는 작은 사실에 큰 창작을 보태 기사를 조작했습니다. 이라크전에서 실종된 군인이 있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블레어 기자는 실종 군인의 가족들은 더 나쁜 소식을 듣게 될까 두려워한다는 르포 기사를 썼습니다. 실종보다 더 나쁜 소식은 사망 소식입니다. 심금을 울리는 기사였지만, 기사에 등장하는 실종 군인의 아버지는 블레어 기자를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기사에는 부모님의 집에선 소 목장이 보인다고 묘사했는데, 그 또한 창작이었습니다.
해군 병원에 입원 중인 4명의 부상병을 만나 직접 인터뷰하고 전쟁 트라우마 기사를 썼다고 했는데, 한 명과 전화로 통화를 했을 뿐 다른 세 명의 부상병은 만난 적도 통화한 적도 없었습니다. 전사자 아들을 둔 목사 아버지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한 목사의 집에 전쟁이 들이닥치다’라는 기사를 썼는데, 실제로 만난 게 아니라 한 번의 통화가 전부였고 다른 매체가 보도한 인터뷰를 짜깁기하고 성경에 아들 사진을 끼워두고 있다는 창작을 보태 기사를 조작했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블레어 기자는 회사에서 ‘잘 나가는 기자’로 통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기사 조작은 ‘언론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배신한 행위’라고 했습니다. 조작 기사를 쓴 기자는 해고됐고, 편집국장과 부국장은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작 기사가 보도된 경위를 지면을 통해 독자들에게 투명하게 밝혔고 재발 방지를 위해 외부 옴부즈만 신설과 기자 교육 강화 등 시스템을 정비했습니다. 152년의 역사에 없었던 오점이고 치욕이라는 ‘기사 조작’에도 불구하고 뉴욕타임스가 언론으로서 신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바로잡는 정직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배우 등장하는 ‘정치 공작 연극’ 발원지는 SBS
블레어 기자의 조작 기사가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전쟁 반대 여론에 힘을 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해야 한다는 철칙입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는 152년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오점이고 독자들의 신뢰를 배신한 행위라며 1면에 사과문을 싣고, 진상 조사 결과와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과 약속을 4개 면에 걸쳐 상세하게 게재했습니다. 반면에 한국의 어떤 언론은 대통령 당선자가 바뀌었을 수도 있는 허위의 사실을 마구잡이로 유포하고도 사과조차 하지 않습니다.
NYT의 사례를 소개하며 ‘당당한 사과로 독자의 신뢰를 얻으라’고 권하는 기자협회보 기사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는 NYT의 조작 기사는 블레어 기자가 조작한 것이지만, ‘이재명 조폭 연루설’은 기자가 조작한 게 아닙니다. ‘조폭 연루설’이 허위라는 판결문에는 조작극의 주연을 맡은 조폭 출신 박철민(당시 수감 중)이 나오고, 국힘당 소속이고 성남시 시의원을 지낸 그의 아버지가 나오고, 박철민의 아버지와 소속 정당이 같은 정치인 변호사 장영하가 나오고, 익명의 검찰 관계자와 국힘당 관계자가 나오고, 국정감사장에서 돈다발 사진을 흔들며 ‘조폭 연루설’을 띄운 국힘당 김용판 의원이 나옵니다. 등장인물들 면면을 보면, ‘조폭 연루설’은 한 사람의 창작이 아닌 집단 창작이고, 각각의 배역을 맡은 여러 배우가 무대에 등장하는 ‘정치 공작’ 연극이라고 함이 옳습니다.
‘조폭 연루설’의 발원지는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입니다. SBS는 2018년 7월 21일 방영된 SBS 의 ‘조폭과 권력-파타야 살인사건, 그 후’에서 이재명 성남시장이 성남의 조폭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둘 사이에는 ‘성남’이라는 두 글자 외에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그알’ 제작진은 둘 사이에 영화 ‘아수라’를 배치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조폭과도 손을 잡는 악덕 시장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시청자들은 연상작용을 통해 영화 속의 악덕 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을 동일시했을 겁니다.
가짜 ‘돈다발 사진’ 확인 후에도 ‘조폭 연루설’ 확산에 열 올린 조선일보
‘조폭 연루설’ 조작극의 주연인 조직 폭력배는 SBS의 ‘그알’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하지만, 폭력배 혼자서 그런 ‘기획’을 하진 않았을 겁니다. 배후에서 그림을 그려준 기획자와 조력자들이 있었을 겁니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검찰 관계자와 국힘당 관계자가 누구인지, 그것이 알고 싶은 이유입니다. ‘이재명 조폭 연루설’은 선거의 판을 흔들려는 정치 공작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선동의 귀재라는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는 1%의 사실에 99%의 거짓을 섞어야 선동에 효과적이라고 했습니다. ‘이재명 조폭 연루설’도 그랬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기획’이라 해도 언론이 보도준칙(언론 윤리)을 지키면, 공작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취재원(제보자)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지 따져보고, 이중 삼중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정보의 출처를 밝히고, 익명이 아닌 실명으로 보도하고, 독자·시청자들이 사안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고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중요한 사실들을 빠짐없이 보도하고… 몇 가지의 기본적인 원칙만 준수해도 허위의 사실을 보도할 수 없습니다.
SBS의 ‘그알’에서 발원한 ‘이재명 조폭 연루설’은 2022년 대선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재발화되어 선거판을 흔들었습니다. 국힘당 김용판 의원이 경기도 국정감사장에서 조폭 출신 박철민이 제공했다는 ‘돈다발 사진’을 흔들며 신호탄을 쏘아 올렸고, 늘 그랬듯 대다수 언론이 중계하듯 그대로 옮겼습니다. 사실 확인도 검증도 없었습니다. 김용판 의원이 들고나온 ‘돈다발 사진’은 가짜라는 게 바로 그 국감장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를 비롯한 몇몇 언론은 ‘조폭 연루설’ 확산에 열을 올렸습니다. 기본적인 보도준칙만 지켜도 충분히 거를 수 있는 허위의 사실인데도 그대로 보도했다는 것은 여론을 왜곡하려는 ‘악의’가 있었다는 자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재명 조폴 연루설’의 발원지가 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조폭과 권력 방송 화면
음모 꾸민 자보다 살포한 자에게 더 큰 책임
흔히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합니다.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가 활짝 피어나기 때문일 겁니다. 박철민과 장영하 판결문에는 ‘조폭 연루설’은 유권자의 합리적 판단을 방해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의 공정성을 심각하게 훼손하였으며 0.73%라는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된 대선에서 그러한 허위 사실 공표가 대선 결과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적혀 있습니다. 각각 다른 재판부였지만 그런 이유로 두 사람에겐 징역형의 중형이 선고됐습니다.
그 판결은 ‘조폭 연루설’을 적극적이고 반복적이고 악의적으로 집요하게 살포한 언론에 더 엄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기획된 ‘조폭 연루설’이라도 언론이 보도준칙에 따라 성실하게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면 보도할 수 없었을 것이고 유권자들의 판단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상모략의 허위 사실은 아무리 정교하게 기획하고 조작을 하더라도 언론이 받아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그런 면에서 음모를 꾸민 자들보다 그걸 마구잡이로 살포한 언론에 더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거꾸로 갑니다.
뉴욕타임스 152년 역사에 가장 큰 오명을 남겼다는 블레어 기자의 기사 조작은 선거에 영향을 주지도 않았고 그럴 의도도 없었지만, ‘이재명 조폭 연루설’은 선거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명백함에도 어떤 언론은 적극적으로 허위 사실 유포에 협력했습니다.
악의적 ‘정치 공작’ 보도의 최종 대가는 무엇일까
박근혜 정부 초기에 조선일보가 ‘특종’으로 보도한 ‘채 검찰총장 혼외자’ 보도는 국정원과 박근혜 청와대가 공동으로 기획한 정치 공작이었습니다. 국정원은 사찰을 하고, 대통령실은 조선일보에 사찰 자료를 제공하고, 조선일보는 특종으로 보도하고… 언론이 정치 공작의 한 축이 된 셈인데, 그 보도는 한국신문협회가 주는 ‘2014년 한국신문상’을 받았고, 기자들을 회사에서 두둑한 특별 보너스를 받았고, 그 당시의 편집국장은 후에 집권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박근혜 정권 초기에 조선일보가 특종으로 보도한 ‘채 검찰총장 혼외자’ 보도
정보의 출처를 밝히라는 취재원 공개의 원칙만 지켰어도 그런 ‘정치 공작’ 보도는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그 당시에 검찰이 하고 있던 ‘국정원 댓글공작’ 수사는 궤도를 이탈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수 국민이 윤석열의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에 현혹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 정부 말기에 조선일보는 청와대와 각을 세웠고 당시 집권당 의원이던 김진태(현 강원도지사)는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이 홍보대행업체로부터 억대의 호화 해외여행 접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그 자료 역시 국정원에서 제공했을 것인데, 한국 언론이 보도준칙을 성실하게 지켰다면, 정치 공작 보도의 협력자였던 조선일보가 정치 공작 보도의 피해자가 되는 아이러니도 없었을 겁니다.
송요훈 편집위원(전 MBC 기자)
뉴욕타임스는 잘못된 보도를 숨기는 비겁함 대신 드러내 보이고 책임지는 정직함을 선택했습니다. 독자들은 그런 뉴욕타임스를 신뢰했고, 그런 토양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타임스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겁니다. 뉴욕타임스의 사례가 우리 언론에 타산지석의 교훈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난하게도 ‘이재명 조폭 연루설’을 집요하게 악의적으로 살포하던 조선일보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위협했던 ‘언론 범죄’에 대해 아직도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