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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과 재즈, 소비되면서도 소비되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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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성 재즈가수 『소유의 종말』의 저자 제레미 러스킨에 따르면 이제 ‘소비에서 직업이 탄생하는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Consume(소비하다)’은 ‘철저히 사로잡다’ 혹은 ‘취하다’라는 라틴어 ‘consumere’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비한다는 건 그것에 사로잡히고, 중독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감정 소비’나 ‘감정 낭비’라는 말이 없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정보와 광고에 지친 감각은 이제 감정마저 사물처럼 다루고 있다. 가속화된 일상의 소비는 점차 확대되어 감정, 마음, 기분, 느낌, 감각도 소비의 대상이 되어가는 중이다. 이제 ‘어떻게 사느냐’보다 ‘어떻게 소비하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가 온 것만은 분명하다. 좋은 목재로 만든 책상은 주인의 손길이 닿을수록 좋아진다. 잘 지은 건축물은 세월이 흐를수록 빛나는 유산이 되어간다. 커피잔, 만년필, 스탠드, 가죽가방, 장 담그는 항아리는 그것을 쓰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수명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쉽게 변형되지 않는다. 시간과 기억이 함께 숨쉬고 있는 사물들은 소비하면서도 소비되지 않는다. 작가들이 만든 그릇이나 노트에 애착이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세계, 컬러를 매일 소비하지만 그것은 손끝의 감각으로 남는다. 사물을 통해 작가와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와인은 즉흥연주처럼 끝없이 달라지는 술 세상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주류는 맥주다. 그러나 가장 다양한 종류를 갖고 있는 것은 와인이다. ‘신의 물방울’이라고 불리는 술, 와인은 가볍게 소비되는 술이 아니다. 와인을 마시는 순간 신화적, 역사적, 문화적 히스토리를 동시에 체험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소비하지만 소비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이성과 질서의 셰계를 흔드는 존재, 디오니소스는 와인의 신이다. 디오니소스의 축제는 단순히 술을 마시는 자리가 아니라 재생의 잔치였다. 디오니소스는 포도가 으깨져 발효되는 변형으로 죽음을 재생하고, 사람들을 취하게 함으로써 고정된 자아에서 잠시 벗어나게 만들어준 신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기독교 전통에서 와인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체였다.   디오니소스 와인이 가지고 있는 산도나 탄닌, 바디감과 향은 마치 부드럽거나 거친 말투로, 혹은 가볍거나 묵직한 존재감으로, 또는 어떤 기억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와인은 즉흥연주처럼 끝없이 달라지는 술이다. 와인의 역사도 다양한 스토리를 품고 있다. 중세 유럽의 도시는 물이 오염된 까닭에 희석한 와인을 기본 음료로 마셨다. 와인은 갈증해소와 영양 공급원으로써 생존을 위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포도 재배는 수도원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취향과 계급이 등장하는 17~18세기에는 와인의 생산지, 품질, 등급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이제 ‘어디 와인인가?’가 중요해진 것이다. 근대 후반에 이르러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 와인과 음식의 조합을 다룬 미식의 문화가 확장되었다. 와인은 하나의 교양이자 취향의 상징이 되었다. 현대에는 와인이 ‘경험과 해석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개인의 취향, 스토리가 중요해졌으며 와인의 맛은 각자가 다르게 느끼는 경험으로 표현한다. 다채롭고 긍정적이고 풍요롭고 비싸기도 한 와인의 세계 이집트에서 와인은 파라오 무덤의 부장품으로,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소스(와인의 신)로, 로마제국에서는 문명의 척도(포도밭을 확장하며)가 되었다.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에서도 와인은 빠지지 않았다. 신화와 역사 속에서 문명화를 거친 와인은 이제 미생물학, 신경과학, 인류학이 만나는 융합 연구로 주목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일부 심리치료 센터에서는 와인을 활용한 감각 치료를 시도 중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한 삶의 구성요소로 ‘좋은 음식, 좋은 우정, 좋은 대화와 함께 하는 와인’을 들었다. In vino veritas(포도주 안에 진리가 있다)”를 외친 소크라테스는 밤새 와인을 마시고 논하면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플라톤은 와인은 영혼을 불로 달구어, 평소 숨겨진 성격을 드러낸다”고 주의를 주었으며, 몽테뉴는 ”와인은 나의 가면을 벗겨주는 유일한 친구다 라고 고백했다. 부조리의 작가 까뮈는 ”의미 없는 세계에서도 햇살 아래 와인 한잔을 즐기는 것이 반항하는 삶에 대한 긍정 이라고 말했다. 니체도 와인(디오니소스)을 삶을 긍정하는 힘으로 보지 않았던가. 부르고뉴에 여행갔을 때 안개 속에 마법의 성처럼 다가왔던 와이너리에서의 추억은 때때로 나를 그 시절로 이끈다. 융단처럼 펼쳐진 포도밭의 장관. 풍요의 기운이 느껴지는 부르고뉴는 와인을 위해 태어난 땅이었다. 그 곳에서 자란 주민 대부분은 와인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세계의 왕족들에게 납품하는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로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고성.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시음실에서 마신 와인들은 모두 최고의 맛을 지닌 와인이었다. 20년 전 부르고뉴의 와이너리에서 마셨던 와인에 대한 기억은 어제처럼 선명하다. 분명 그날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한 삶을 누렸던 것이리라. 그러니 와인은 마시며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소비될 수 없다. 시음을 마치자 와이너리 주인은 화이트 와인 한 병씩을 선물로 내주었다(3명이 산 와인의 2배 되는 가격의 와인). 파리에 있을 때 와인샵을 하는 친구가 가게 지하에 있는 와인 창고에서 특별한 와인을 보여준 적이 있다. 커다란 상자에 세 병이 들어 있었는데 각 병당 가격이 3000만 원이었다. 알고 보니 그의 아버지가 유산으로 아들 삼형제에게 남겨준 것으로 1950년대 와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이탈리아의 사라룽가 달바 포도원. 2025. 08. 21 신화=연합 재즈는 직감을 통한 즉흥성으로 현재에 머무는 ‘미래의 음악’ 와인처럼 재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음악은 아니지만 재즈의 요소들(즉흥성, 유연한 리듬, 장르 융합)은 거의 모든 대중음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중음악, 가요나 팝은 가사를 외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재즈는 그저 듣는 데 그친다. 분위기나 스타일을 언급할 때는 재즈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영화의 OST로 재즈가 나오지만 사람들이 주제 테마를 흥얼거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재즈는 소비되는 음악으로 보여진다. 어디에서나 흐르고 있지만 좀처럼 귀 기울여 듣지 않는… 그러나 와인이 술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재즈는 음악을 넘어선 장르이다. 재즈를 ‘미래의 음악(the music of the future)’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공포와 구역질을 재즈 녹음으로 치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재즈는 감상 음악이 아닌 치유제였다. 요즘도 재즈가 집중력을 높이는데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주의가 산만한 학생이 스캣을 배우며 집중력이 좋아지는 것은 순간적인 긴장과 이완이 동시에 훈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높아지면 노래뿐만 아니라 태도도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재즈 연주회 한 장면. 와인에 있어 Terroir(테루아)가 중요한 것은 같은 포도라도 토양이나 기후, 미생물 환경에 따라 다른 와인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같은 브루고뉴 밭에서 자란 같은 품종인데도 해마다 다른 맛의 와인이 나오기도 한다). 와인에서 테루아가 가장 중요하듯, 재즈에서도 재즈의 뿌리와 토양이 중요하다. 재즈의 뿌리가 되는 뉴올리언즈는 다른 지역으로 대체될 수 없는 땅이다. 다른 나라의 재즈가 아무리 뛰어난 기량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재즈의 발상지는 늘 뉴올리언즈인 것이다. 와인이 오감(시각, 후각, 미각, 촉각, 청각)을 통해 오롯이 순간에 머물게 하는 것처럼 재즈도 그날의 공간, 조명, 컨디션, 멤버들 간의 소통, 직감을 통한 즉흥성으로 현재에 머문다. 윈튼 마샬리스는 재즈는 현재의 힘이다. 거기엔 대본이 없다. 대화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재즈 공연을 보는 관객이 흥겹게 어깨를 들썩이고 있다면 마샬리스가 얘기한 연주자와 관객과의 대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윈튼 마샬리스 나른한 오후, 또 다른 창조를 위하여 재즈 한 곡에 와인 한 잔을… 1945년 산 와인은 아직도 음용이 가능하다. 재즈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에서 마일즈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으로, 다시 허비 행콕의 재창조된 전통으로 이어진다. 와인이나 재즈는 모두 시간이 중요한 재료이다. 와인에도 테루아와 발효법칙이 있지만 매년 다른 맛이 나오듯, 재즈에서는 화성과 코드 진행이라는 규칙 속에서도 즉흥의 순간에는 달라진다. 같은 밭에서 다른 빈티지가 나오는 와인처럼 재즈는 같은 곡에서 매번 다른 연주가 나오는 것이다. 와인의 양조 스타일이 맛을 가르고, 재즈의 연주 스타일이 곡을 바꾼다. 같은 와인, 같은 재즈곡이라도 어디서,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재즈와 와인은 결국 분위기와 스타일로 완성된다. 와인과 재즈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와인은 포도가 발효되고 숙성이 되기까지 기다린다. 재즈는 기량을 쌓기 위해, 자유로운 즉흥이 나오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마시는 순간, 즉흥연주를 듣는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된 사람에게 감각과 기억으로 체화된다. 그리고 그것은 함께 나누어야 한다. 와인 한 병은 함께 나눌 친구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알렉상드르 뒤마) 와인과 재즈는 계획하더라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야만 완성되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고(빈티지, 시대별 장르 등), 현재에 집중하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기후, 토양, 장르의 융합성)를 열어두고 있다는 점에서 와인과 재즈는 확실히 닮아있다. AI의 시대에서도 기후변화 담론의 아이콘이 된 와인, 다양한 장르와의 융합으로 진화하는 재즈는 마시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소비재가 아니다. 발효하고, 즉흥하면서 다시 변형되고 재생되는 예술이다. 나른한 오후에 Django Reinhard의 를 들으며 마신 와인 한잔으로 마음이 고요해진다면 이는 ‘아름다운 소비’가 아닐까? 또 다른 창조를 위한…   장고 라인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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