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정치문화는 왜 민주공화정과 충돌하는가 [칼럼] 오늘날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너무도 당연한 체제처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언하지만, 정작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공화정, 자유주의와 민주공화정의 차이를 분명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정은 결코 처음부터 존재했던 질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왕권과 귀족정, 식민주의와 파시즘, 독재와 전체주의를 거치며 어렵게 축적해온 정치적 성취였습니다. 수많은 혁명과 전쟁, 실패와 희생 끝에 형성된 역사적 결론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이미 그 흐름 위에서 스스로를 민주공화국이라 선언한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극우세력은 혐오와 음모론, 지도자 숭배와 역사왜곡을 반복하면서도 자신들을 자유의 수호자”처럼 포장합니다. 누군가 이를 비판하면 곧바로 표현의 자유도 없느냐”는 반응이 돌아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민주공화정은 왜 등장했는가. 왜 인류는 그것을 보편적 정치질서로 발전시켜 왔는가. 그리고 왜 오늘날 극우의 정치문화는 민주공화정과 충돌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민주공화정이라는 개념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됐는지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원래 다른 전통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같은 의미처럼 사용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두 개념은 서로 다른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민주주의(democracy)는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한 개념입니다. demos(인민)와 kratos(권력)의 결합, 곧 누가 통치에 참여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고대 아테네 시민들은 민회(Ekklesia)를 통해 직접 정치에 참여했고, 상당수 공직을 추첨으로 선출했습니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민주주의는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여성과 노예, 외국인은 시민권에서 배제됐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384~322)의 『정치학(Politics)』 역시 시민권을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가진 자유 성인 남성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정치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그리스 아테네에 있는 아고라. 고대 아테네에서 아고라는 시민들이 만나 의견을 교환하고 정치적 여론을 형성하며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했다. 2026.4.24. [EPA=연합뉴스]
반면 공화정(republic)은 다른 전통에서 발전했습니다. 공화정의 어원인 라틴어 res publica는 공적인 것(public thing)”이라는 뜻입니다. 핵심은 권력이 특정 왕가나 귀족 가문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이었습니다.
고대 로마는 왕정을 폐지한 뒤 집정관(consul), 원로원(senate), 호민관(tribune) 등을 통해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도록 견제 구조를 만들려 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106~43)는 『공화국(De Re Publica)』에서 국가를 특정 지배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 전체의 공적 질서로 설명했습니다. 즉 민주주의가 누가 권력을 행사하는가”의 문제였다면, 공화정은 권력이 누구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물론 초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역시 오늘날 기준에서 보면 불완전했습니다. 여성과 노예, 이주민, 빈민 다수는 여전히 정치 공동체 밖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민주공화정은 처음부터 완성된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권력 독점과 신분질서, 차별과 배제를 비판하며 시민권과 자유의 범위를 계속 확장해온 역사적 과정 속에서 발전해온 체제였습니다. 민주공화정은 국민주권과 시민의 자유, 권력분립과 공공성을 결합해 권력의 독점을 막으려는 근대 정치질서였습니다.
■ 마키아벨리는 왜 공화정을 말했는가
근대 초기 유럽에서 공화주의를 다시 본격적으로 고민한 대표적 인물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군주론(Il Principe, 1532)』의 저자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더 깊이 고민했던 것은 공화정의 문제였습니다. 특히 『로마사 논고(Discourses on Livy, 1531)』에서 그는 로마 공화정의 구조를 분석하며 권력의 독점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를 고민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왕권과 귀족세력, 도시국가와 외세가 끊임없이 충돌하던 시대였습니다. 피렌체 역시 메디치 가문과 귀족세력, 시민계층 사이의 갈등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좋은 군주를 기다리는 방식만으로는 자유를 지킬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시민적 덕성(civic virtue)과 공적 참여, 권력 간 상호견제가 유지될 때만 공화정이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사상가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 1940~ )와 J. G. A. 포칵(J. G. A. Pocock, 1924~2023) 역시 마키아벨리 공화주의의 핵심을 권력의 비독점과 시민적 자유”로 해석했습니다. 공화주의는 처음부터 권력의 공공성을 고민한 사상이었습니다. 권력이 특정 혈통과 귀족, 왕실의 사유물이 되는 순간 공동체 전체의 자유가 무너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공화주의 역시 오늘날 의미의 보편적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말한 시민 역시 남성 시민계층 중심이었습니다. 공화주의 역시 완성된 교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계속 확장되어 온 질서였습니다.
■ 루소는 왜 자유를 공동체와 연결했는가
이 흐름을 근본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이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였습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Du contrat social, 1762)』에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원리를 본격적으로 체계화했습니다. 인간은 왕에게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의 주권자로 살아가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루소가 무제한적 개인주의를 경계했다는 점입니다. 루소는 왕권이 무너진 뒤에도 또 다른 지배가 등장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돈과 선동, 사적 이익과 파벌정치는 시민 공동체를 다시 예속시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반의지(general will)”를 강조했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공공선을 유지하려는 시민적 의지가 없다면 자유 역시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루소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곧바로 오늘날 극우의 주장을 마치 예견한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극우들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자유”를 주장합니다. 미국의 MAGA도 한국의 극우도 한결같은 자세를 취합니다. 그러나 300여년 전 루소가 바라본 입장에서는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깨뜨리는 도발로써 지적됩니다. 루소는 자유가 단순히 강한 자의 무제한적 권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공공선과 시민적 평등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자유 역시 또 다른 지배의 도구로 변질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의 시민 개념 역시 여성과 식민지 민중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루소는 이후 인류가 국민주권과 시민권의 범위를 확대해가는 데 결정적 출발점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루소의 국민주권론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구열강에 맞서 근대화를 갈망하던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됩니다. 메이지 시기 일본에서는 루소와 몽테스키외(Charles-Louis de Montesquieu, 1689~1755),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등의 저작이 집중적으로 번역됐고, 이러한 흐름은 다시 중국 혁명세력과 조선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파됐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근대 지식인 사회 속에서 국민주권과 민권, 공화주의 사상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자유민권운동과 중국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지식인들 역시 루소의 국민주권론을 중요한 사상적 자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에서 루소는 철학자를 넘어 민권·공화주의·반전제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상가에 가까웠습니다.
■ 미국과 프랑스혁명은 무엇을 바꾸었는가
민주공화정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체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왕권과 귀족정, 독재와 전체주의를 넘어 인류가 어렵게 축적해온 정치적 질서였다.
18세기 말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은 이러한 사상들을 현실 정치 속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미국혁명(1776)은 왕정으로부터 독립하며 공화정과 헌정주의, 권력분립과 대표제를 제도화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과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 등 미국 건국세력은 권력이 특정 세력에 집중되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balance of powers)을 강조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 미국 건국세력 상당수가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경계했다는 사실입니다. 1787년 제정된 미국 헌법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민주공화정(Democratic Republic)”이라는 표현을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미국 헌법 제4조 제4항 공화정 보장조항(Guarantee Clause)에서 미합중국은 연방의 모든 주에 공화적 정부 형태(Republican Form of Government)를 보장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즉 미국 헌법이 강조한 것은 민주주의(Democracy)”보다 공화정(Republic)”이었습니다.
특히 매디슨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Federalist No.10)』에서 고대 아테네식 직접민주정을 경계하며, 민주정(Democracy)은 시민이 직접 통치하는 체제, 공화정(Republic)은 대표자를 통해 통치하는 체제라고 구분했습니다. 당시 미국 건국세력은 직접민주정보다는 대의제와 헌정질서에 기반한 공화주의를 선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미국은 스스로를 민주주의 국가라기보다 공화국(Republic)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다만 19세기 이후 보통선거 확대, 노예제 폐지, 여성참정권과 흑인참정권 확대를 거치며 미국은 점차 민주주의적 공화국의 성격을 강화하게 됩니다. 그러나 헌법 원문 자체는 여전히 공화적 정부 형태(Republican Form of Government)”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매우 흥미로운 대비를 이룹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헌장에서 아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명시했습니다. 미국 헌법이 공화정” 자체를 강조했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식민지배와 왕조체제를 동시에 넘어서는 과정 속에서 민주와 공화를 결합한 민주공화제”를 국가 이념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개념사적으로 보면 미국 헌법이 공화정(Republican Form of Government)”을 중심에 두었다면,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민주공화제(Democratic Republic)”를 전면에 내세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혁명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왕권과 귀족 특권, 신분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인민주권과 시민권, 평등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은 주권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역시 이후 공포정치와 나폴레옹 제정, 왕정복고를 반복하며 오랜 혼란을 겪었습니다. 여성과 식민지 주민, 노동계층 다수 역시 여전히 정치적 권리에서 배제됐습니다. 즉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은 근대 민주공화정의 출발점이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민주공화정이 완성된 형태로 등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혁명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주의·민주주의·공화주의를 하나의 정치질서 안에서 결합시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결정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민주공화정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 토크빌은 왜 ‘민주공화국’을 말했는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민주주의와 공화정의 결합은 조금 더 분명한 형태를 띠기 시작합니다. 이 흐름을 가장 상징적으로 분석한 인물이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이었습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 1835~1840)』에서 미국 사회를 분석하며 근대 민주주의가 선거제도의 확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민주주의가 평등한 시민사회를 확대하는 강력한 흐름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위험 역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특히 토크빌은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을 경계했습니다. 왕정과 귀족정이 무너진 이후에도 여론과 감정, 선동된 대중이 또 다른 억압 권력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극우는 종종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다수 국민의 의사”를 들먹입니다. 그러나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즉각적 감정과 군중심리에만 휘둘리는 체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많이 언급되는 포퓰리즘을 경계한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법치와 권력분립, 지방자치와 시민사회, 공론장과 시민적 덕성을 함께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민주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그것이 공화주의적 질서 속에서 제어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토크빌은 미국 체제를 설명하며 민주공화적체제(democratic republic)”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민주공화국은 선거를 실시하여 대표자를 선출하는 국가 정도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시민주권과 대표제, 권력분립과 법치주의, 시민사회의 공공적 참여가 결합된 정치질서에 가까웠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이 말하는 민주공화정 역시 사실상 이 계보 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어디서 민주공화정을 받아들였는가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왕조복고국가가 아니라 국민주권에 기초한 민주공화국을 국가 정체성으로 선택한 나라였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창한 민주공화제”의 헌법 명시 문제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왜 1919년 이미 민주공화제”를 선언할 수 있었는가. 당시 세계 대부분은 여전히 왕정체제였습니다. 일본 역시 천황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중국조차 신해혁명 이후 극심한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민지 상태였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왜 스스로를 민주공화국이라 선언했을까. 이것은 시대 분위기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정 선언은 분명한 역사적 반성과 사상적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이 짧은 문장은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 식민지배를 거부한 선언이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왕조국가의 종말 선언, 황제주권의 폐기, 세습권력 거부, 국민주권 선언
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독립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왕조체제와 식민지배 질서를 동시에 넘어서는 새로운 국가비젼의 선언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왕조복고국가가 아니라 국민주권에 기초한 근대 국민국가를 지향했던 것입니다.
이 선택의 배경에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냉철한 역사 인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조선 후기 지배체제가 결국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대한제국 말기 권문세가와 왕실, 고위관료층 상당수가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했다는 현실인식은 독립운동 세대에게 매우 강한 충격이었습니다. 실제로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병합 공로자들에게 대규모 작위를 수여했습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여러 저작에서 당시 작위를 받은 인물 대다수가 왕족과 고위 양반관료, 노론계 권문세가 출신이었다고 지적합니다. 대한제국 말기 권문세가와 왕실, 고위관료층 상당수가 식민지배 체제에 협력했다는 현실은 독립운동 세대에게 깊은 충격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완용(李完用, 1858~1926), 송병준(宋秉畯, 1857~1925), 박제순(朴齊純, 1858~1916) 등은 기존 지배질서 내부 인물들이었습니다. 왕실 종친으로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이었던 이재면(李載冕)이 있습니다. 그는 왕실 종친의 대표로서 왕실 종친의 무난한 합병 동참의 공을 크게 인정받았습니다. 일제로부터 가장 많은 상금을 받은 인물은 이완용이 아니라, 바로 고종의 친형 이재면이었습니다. 또한 조선 왕실 전주이씨 종친으로 흥선대원군 가계와 가까운 왕족 이재극(李載克), 역시 전주이씨 왕실 종친으로 흥친왕 계열 후손 이해승(李海昇)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독립운동 세대는 바로 이 비통한 현실을 직시했습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은 군사력 부족만이 아니었던 것입습니다. 왕조국가와 특권지배체제 자체가 이미 역사적 한계에 도달했다는 인식이 강하게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민주공화정은 외래 유행사상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건설 원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 신해혁명(辛亥革命)과 손문(孫文)은 왜 중요했는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정은 서구 사상을 직접 번역한 결과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에는 중요한 동아시아적 연결고리가 존재했습니다. 바로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과 손문(孫文, Sun Yat-sen, 1866~1925)이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은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수립했습니다. 이것은 동아시아에서 수천 년간 지속된 황제체제가 무너진 사건이었습니다. 손문은 삼민주의(三民主義)를 통해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주장했습니다. 특히 민권주의는 국민주권과 공화정, 헌정주의를 핵심 원리로 삼았습니다. 당시 중국 혁명세력과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상해를 중심으로 활발히 교류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바로 그 상해 혁명공간 안에서 수립됐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초안을 잡은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조소앙(趙素昻, 1887~1958), 김규식(金奎植, 1881~1950), 안창호(安昌浩, 1878~1938) 등은 민족 독립만이 아니라: 국민주권, 시민적 국가, 공화주의, 근대 헌정질서를 함께 고민했습니다. 특히 신채호는 왕조 중심 역사관을 비판하며 민족과 시민을 역사의 주체로 바라보려 했고, 조소앙은 삼균주의를 통해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강조하며 민주공화국의 사회적 토대까지 고민했습니다. 안창호 역시 국민개조론과 실력양성론을 통해 시민적 공공윤리와 근대 국민국가의 토대를 강조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조직인 동시에 근대 민주공화국 건설 프로젝트에 가까웠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민주공화정을 국가 정체성으로 선택한 나라였습니다.그것도 왕정이 여전히 세계 다수를 차지하던 1919년에 말입니다.
■ 민주공화정은 어떻게 전후 세계의 보편질서가 되었는가
그러나 1919년의 민주공화정 역시 오늘날과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20세기 전반까지 세계 곳곳에서는 여성 참정권 제한, 식민지 지배, 인종차별, 노동권 탄압이 계속됐습니다. 즉 민주공화정은 여전히 미완의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바로 그 한계를 비판하며 민주공화정의 범위를 계속 확장해 갔습니다. 여성참정권 운동과 노동운동, 반식민주의 운동과 인권운동은 모두 누가 시민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확장해온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류는 20세기 중반 파시즘이라는 거대한 비극과 마주하게 됩니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 헌법 가운데 하나를 갖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나치즘은 선거와 대중선동, 음모론과 혐오정치, 언론 공격과 공포 동원을 통해 민주주의 내부에서 성장했고, 권력을 장악한 뒤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했습니다. 이 경험은 인류에게 매우 큰 충격을 남겼습니다. 민주주의는 선거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 혐오와 음모론, 극단적 민족주의와 지도자 숭배가 민주주의를 내부에서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민주공화정은 이전과 다른 단계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18~19세기 공화주의가 왕권 제한, 귀족정 견제, 국민주권, 권력분립을 중심으로 했다면, 20세기 전후 민주공화정은 여기에 반파시즘, 반전체주의, 인권, 공론장, 다원성, 민주주의 자기방어라는 원리까지 포함하기 시작합니다.
민주공화정은 어느 날 완성된 단일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왕권과 귀족정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해, 파시즘과 전체주의에 대한 반성을 거치며, 오늘날에는 혐오정치와 플랫폼 권력, 공론장 파괴까지 통제하려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역사적 질서였습니다.
민주공화정 발전의 역사
■ 아렌트는 왜 ‘공통의 현실’을 강조했는가
이 흐름을 가장 깊이 분석한 대표적 정치철학자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였습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1951)』에서 전체주의가 독재자의 광기만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녀는 대중의 고립과 불안, 공통 현실의 붕괴, 혐오정치와 음모론이 결합할 때 전체주의가 성장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아렌트는 사람들이 더 이상 공통의 현실(common reality)을 공유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 민주주의가 위험해진다고 보았습니다. 민주주의는 단지 투표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민들이 최소한의 공통 현실을 공유할 수 있을 때 유지되는 정치질서였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현재 극우정치는 끊임없이 공통 현실 자체를 공격합니다. 선거 결과를 부정하고, 언론 전체를 불신하게 만들며, 역사적 사실을 음모론으로 바꾸고, 공동체의 비극을 조롱거리로 소비합니다.
미국 MAGA 진영의 부정선거 음모론, 독일 극우세력의 역사부정, 한국 일부 극우세력의 5·18 왜곡과 제주4·3 음모론은 모두 이 흐름과 연결돼 있습니다. 민주공화정은 단지 선거를 치르는 체제가 아니었습니다.그것은 시민들이 최소한의 공통 현실과 공적 질서를 공유하며 살아가기 위한 정치질서이기도 했습니다.
■ 민주공화정은 왜 인류의 보편질서가 되었는가
바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민주공화정은 점차 인류 보편질서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을 국제질서의 기본 원리로 선언했습니다. 이후 유럽인권협약(1950), 탈식민주의 확산, 여성참정권 확대, 시민권 운동, 국제인권법 발전 등이 이어지며 민주공화정은 시민주권, 인권, 권력분립, 공공성, 다원성, 공론장, 반파시즘 원리를 결합한 현대 헌정질서로 발전하게 됩니다.
민주공화정은 어느 한 나라만의 정치제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왕정과 식민주의,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거치며 어렵게 축적해온 문명적 안전장치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역시 바로 이 역사적 흐름 위에 존재합니다. 대한민국은 우연히 민주공화국이 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현재 유엔(United Nations) 회원국 193개국 가운데 약 150여 개 국가는 군주제가 아닌 공화국(Republic) 체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들 국가 가운데 상당수는 선거와 대의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적 공화정 형태를 운영하고 있으며, 오늘날 민주공화정은 사실상 현대 세계질서의 가장 보편적인 국가 운영 원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United Nations 회원국 현황, CIA World Factbook 정부형태 분류 기준 종합).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미 왕조국가를 거부하고 국민주권을 선언하며 민주공화정을 국가 정체성으로 선택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 역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즉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혈통이나 왕조, 특정 지도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민주공화정 그 자체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은 저절로 주어진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왕조국가와 식민주의, 독재와 파시즘을 넘어 인류가 어렵게 축적해온 시민주권의 질서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민주공화정은 오늘도 시민의 참여와 공론, 연대 속에서 끊임없이 지켜내고 확장해가야 할 살아있는 헌정질서이기도 합니다.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