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왜 쓰는가, 어떻게 쓰는가? 인공지능 시대에 [칼럼] 글, 왜 쓰는가? 그리고 어떻게 쓰는가? 한윤정
이 글을 쓰는 나, 이 글을 읽는 독자… 우리는 모두 글에 평균 이상의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서평이란 형식을 통해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필자이자 독자, 때로는 두 존재를 잇는 서평자로서 역할을 교대로 맡으며, 우리 사이에는 글이라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
필자와 독자, 서평자로 구성된 글 공동체
이런 공동체가 성립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글이 갖는 매력 때문이다. 그것을 읽고 쓰는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배움과 즐거움을 경험한다. 다소 고통스럽더라도 글을 통한 세계가 넓고 깊어지는 만큼 자아도 성숙해진다(?), 즉 ‘나의 멋짐’이 증폭된다. 이런 효능감 때문에, 전통적인 독서공동체의 구성원은 갈수록 줄어든다지만, 나를 비롯한 애호가들의 충성심은 여전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런 믿음에 조금씩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짐작하다시피 인공지능 때문이다.
글 공동체를 흔드는 인공지능의 등장
인공지능은 인간의 읽고 쓰는 능력을 떠받쳐준다. 책을 읽으면서도 몰랐던 맥락과 사실을 콕콕 집어서 정리해주고, 용도와 문체까지 포함해 몇 가지 팁만 주면 그럴듯한 글을 써낸다. 굳이 시간을 들여 읽고 쓰지 않더라도 독서를 갈음하고 좋은 글을 양산한다. 아주 좋은 글은 아니겠지만 어차피 나의 능력과 목표는 좋은 글 정도였고, 나 정도의 독자-필자는 무난히 대체할 수 있다!
이것이 주관적 느낌만은 아닌 것이 2022년 거대언어모델 인공지능의 효시인 챗GPT가 나온 이후 영어저널의 투고 논문 수가 10배 늘었다고 한다. 게다가 논문 수준이 상당히 높아지기까지 했다. 고도의 독서와 글쓰기가 요구되는 논문이 이 정도라면 다른 글의 가치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까? 글의 총량이 거대한 강을 넘어 태평양이 된 시대에 한 숟갈의 글을 더하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쓰는 글이 나의 멋짐이 아니라 ‘인공지능의 멋짐’을 증폭하는 레퍼런스에 그치지 않고, 매력과 생명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리디아 데이비스(에트르 제공)
서울국제도서전 기사 통해 만난 리디아 데이비스
이런저런 두서없는 생각을 하던 중에 리디아 데이비스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때마침 2026 서울국제도서전(6월 24~28일)이 열렸고, 굿즈와 도서전에서만 판매하는 희귀본을 사려는 관람객이 16만 명이나 몰리면서 오픈런 경쟁까지 벌어졌고, 이게 도서전이냐며 독립 출판인들이 마치 인상파 화가들처럼 ‘서울제대로도서전’을 따로 열었고, 행사 주제문을 쓴 김연수 작가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글쓰기 경험을 발표했고, 부대행사 중 하나인 번역가 북토크에 참여하는 리디아 데이비스의 역자 서제인이 또 다른 리디아 데이비스의 역자 이주혜와 함께 한겨레신문에서 별도의 대담을 했고, 서울국제도서전에 갈 마음은 없었으나 관심은 있었던 나는 이 모든 소식을 모바일 뉴스로 본 끝에 리디아 데이비스에게 끌리게 되었다. 그리고 시들해진 나의 책 읽기와 글쓰기에 어떤 자극과 명분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그의 책 두 권을 읽게 되었다.
『형식과 영향력』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서제인 옮김. 에트르 2024년
자기만의 범주를 만드는 글쓰기
『세부 속으로』(Into the Weeds, 2025)가 나중에 나온 책이지만 『형식과 영향력』(Forms and Influences, 2019)을 먼저 읽는 게 좋다. 작가의 나이(1947년생)를 고려하면 『형식과 영향력』이 더 한창일 때 쓴 글들이며, 풍부하고 상세한 데다 다른 작가들의 좋은 문장까지 많이 인용돼 있다. 리디아는 미국의 프랑스어 번역가로서 플로베르, 프루스트, 블랑쇼, 푸코의 작품을 영어로 옮겼으며 『못해와 안 할 거야』 『이야기의 끝』 『불안의 변이』 등의 소설을 썼다. 자신에 대한 글을 보면 부모가 《뉴요커》에 기고한 소설가였으며 어릴 때 목표도 같은 잡지에 소설을 싣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만큼 깔끔하고 세련되고 어감과 수사법에 민감한 단편소설에서 시작된 그의 문학세계는 점점 시라고 해야 할지, 에세이라고 해야 할지, 단편소설이라고 해야 할지 경계가 모호한” 쪽으로 나가는데, 작가 자신은 그저 ‘이야기’라고 불러주길 바란다고 한다.(책의 작가 소개)
무엇보다 내가 리디아에게 금세 친근감을 느낀 것은 그가 글을 술술 쓰지 않는다/못한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바위에서 물을 쥐어짜는 식이며, 그래서 꾸준히 남들의 좋은 문장과 이야기를 읽고 메모하면서 자신만의 형식을 창안한다. 이쯤 되면 『형식과 영향력』이 무슨 뜻인지 짐작할 텐데 부제는 ‘자기만의 범주를 만드는 글쓰기에 관하여’이다.
리디아는 독자에게 만만히 파악되기를 사양하는 필자인 만큼 그의 책을 요약하기는 어렵다. 흩뿌려놓은 응결된 문장들을 때로는 매혹되고 때로는 산만해지는 정신을 붙들면서 읽고 난 다음에야 그 실체가 어렴풋이 그려진다. 문(文)·학(學)·성(性). 책을 읽는 동안 이 단어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언어를 사용하되 언어의 그물에 잡히지 않으려 유영하는 사고…. 행간에 농축된 지(知)의 문화로부터 비로소 이해되는 삶의 신비와 아이러니…. 글쓰기의 팁을 전수하는 실용서이면서도 문학적일 수 있음을 알았다.
좋은 글쓰기 습관을 위한 30가지 조언
그런데 문학적인 글은 정확하지 않아도 될까? 정확은 이해의 깊이이며, 독자가 텍스트 속으로 풍덩 뛰어들 수 있도록 그 깊이를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저자의 실력이다. 면도칼처럼 정확하면서도 심연 같은 책으로 다이빙하기 전 준비운동으로 목차를 일별하기를 권한다. ‘똑같은 말을 철저히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는가’ ‘아주 짧은 이야기 한 편에 대하여’ ‘날것의 재료는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 ‘근원, 고쳐 쓰기, 순서 그리고 결말’ ‘한 문장 고쳐 쓰기’ ‘발견한 재료, 문장 구조, 간결함 그리고 어색한 산문의 아름다움’ ‘단상, 파편화된 혹은 완성되지 않은’. 여기에 이어지는 마지막 장은 ‘좋은 글쓰기 습관을 위한 30가지 조언’이다.
문학성을 좇으면서도 효율성으로 끌려간 나는 첫 장 ‘똑같은 말을 철저히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는가’에 인용된 사무엘 베케트, 그레이스 페일리, 프란츠 카프카, 러셀 에드슨, 찰스 번스타인, 마르셀 프루스트 등의 문장과 저자의 논평을 정신없이 오가다가(모두 ‘철저히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약간 꺼림칙한 기분으로, 결론이자 요약인 마지막 장 ‘좋은 글쓰기 습관을 위한 30가지 조언’으로 넘어갔다. 영화뿐 아니라 책도 스포일하면 안 되겠지만 몇 가지 마음에 닿는 조언을 소개한다.
△규칙적으로 메모하라. 그러면 관찰력과 표현력, 둘 다 날카로워질 것이다. (첫 번째 조언이자 너무 중요해서 길게 설명돼 있다. 기왕이면 양질의 노트에 만년필로 메모하는 게 좋겠지?)
△언제나 당신 자신의 관심사에서부터 작업하라. 자신의 관심사를 믿어라. (음, 첫 번째 서평 대상으로 내 관심사에 따라 이 책을 고르길 잘했군. 그래서인지 서평 쓰는 게 즐겁다.)
△대체로 독학하라. (우연의 일치인지, 마침 일본 작가 시라토리 하루히코의 『독학이라는 세계』를 동시에 읽고 있다.)
△메모한 것들을 지속적으로 고쳐 써라. (나는 주로 남의 글을 메모했는데 내 글을 메모해야겠네?)
△규칙적으로 메모를 고쳐 쓰면 한 편의 단편소설(이야기)을 ‘자라나게’ 할 수 있다. 진짜? 약간 의구심이 생겨 30가지 조언의 뒤쪽으로 가다가 다시 마음에 드는 부분을 발견했다. 육체적인 세계와 계속 접촉하라. 우리 문화에서는 섹스와 폭력이 대단히 강조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게으르고 상상력이 부족한 글쓰기의 결과다. …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대체로 사라져버린 육체성에 대한 조잡한 형태의 대체물일지도 모른다. … 옛날에는 말이나 젖소, 닭 같은 동물들과의 접촉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고, 거래는 개인 간에 육체적으로 일어났고…, 냄새 또한 지금보다 널리 퍼져 있어서 말똥 냄새, 곰팡이 냄새, 사람들의 땀 냄새와 세탁하지 않은 옷 냄새, 담배 냄새, 연기 냄새, 나무 타는 연기 냄새, 먼지투성이 길 냄새, 화초 냄새 등등이 풍겼다.”(272쪽)
중요한 건 양념 아닌 정확한 표현, 느낌 잡아두기
이제 첫 장과 마지막 장 사이의 글들은 훨씬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힌다. ‘아주 짧은 이야기 한 편에 대하여’라는 장은 아주 짧게(3쪽) 썼는데 한 단락 분량의 소설(리디아의 작품)도 있다는 사실과 함께, 나에게 글이나 문단 길이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날것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라는 장은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날것 상태로 존재하며, 중요한 건 양념을 많이 치는 게 아니라 사시미처럼 정확하게 뜨는(표현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한 편의 글이 태어나도록 하는 원동력은 영감(아, 이건 글이 될 것 같다!)이며 완결감의 차이는 맨 마지막 문장들에서 만들어진다는 부분도 있는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예전에 한 소설가에게 들은 적 있다.
‘어색한 산문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장에서는 논리적으로 똑 떨어지는 글이 아니라 와비사비(侘び寂び)처럼 때로는 모자람과 불균형이 마음을 때린다고 조언한다. 이어 ‘단상, 파편화된 혹은 완성되지 않은’이라는 장은 프란츠 카프카의 『일기』나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처럼 조각 글도 문학작품, 나아가 책이 될 수 있다고 알려 준다. 아하, 중요한 건 기승전결의 글쓰기가 아니라 느낌을 잡아두는 것이다! 계속 강조하는 팁을 하나 덧붙이면 언어에의 민감성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어를 꾸준히 공부하라고 권유한다.
『세부 속으로』 리디아 데이비스 지음, 서제인 옮김. 에트르 2026년
왜 쓰는가? 그리고 어떻게 쓰는가?
이제 『세부 속으로』 차례다. ‘세부’라 번역했지만 원래 뜻은 ‘잡초’이고, 부제는 ‘더 자세한 쓰기, 사라짐의 쓰기에 대하여’이다. 『형식과 영향력』이 ‘어떻게 쓰는가’였다면 이 책은 ‘왜 쓰는가’이다. 집필 동기는 예일대학교가 설립한 윈덤 캠벨 문학상 재단에서 펴내는 ‘나는 왜 쓰는가’ 시리즈의 한 권으로 청탁받은 것이다.
리디아는 역시 돌려 말하기의 명수다. 왜 쓰는가라는 막연한 질문 앞에서 마침 읽던 영국 작가 조지 스터트의 『수레바퀴 제작인의 작업실』이라는 책을 계속 물고 늘어진다. 딱 봐도 수레바퀴 만드는 과정이 지루하게 서술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기는 어려운 책이다. 그런데 왜 쓰는가? 스터트가 그랬듯 나를 신경 쓰이게 해서 결국 내가 그것에 대해 ‘뭔가를 하게’ 되기 때문”이라는 게 리디아의 생각이다. 나를 붙들고, 어떤 의미에서 나를 도구로 사용해 자신(글)이 존재하게 되는 것은 내 외부에 있는 무언가다.” 오, 글쓰기의 영성이다! 리디아는 말한다. 나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나는 어떤 특정한 청중을 위해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감동시키기 위해 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왜 쓰는가는 어찌 보면 단순하다. 나를 신경 쓰이게 하는 것에 대해 쓰고 싶으니까. 그래서 왜 쓰는가보다는 어떻게 쓰는가로 흘러가고, 『세부 속으로』는 『형식과 영향력』과 여러 모로 중복되고 공명한다.
어떻게 쓰는가의 요체는 ‘낯설게 하기’
어떻게 쓰는가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낯설게 하기’다. 무슨 일이 있어도 특정한 주제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쓰면서 기꺼이 낯설어지려” 해야 한다. 그런 작가로는 거트루드 스타인, 로라 라이딩, 로베르트 무질, 발터 벤야민, 에밀리 디킨슨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별나다, 한 가지에 전념한다, 지루해지고 독자를 잃을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점 말고도 글 자체의 세심함과 흥미로움이 있다.”
이제 왜 쓰는가라는 주제의 책에 왜 ‘잡초 속으로’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의문이 생긴다. 리디아가 이 부분을 따로 말하지 않아서 짐작해볼 수밖에 없다. 단서는 두 책에 모두 인용된, 제목 없는 러시아어(정확히는 볼가강 유역 제레미스어)의 짧은 시에 있다. 빨간 털실로 이 손모아장갑 뜨기를 시작하는 게 아니었는데./ 장갑은 이제 완성됐지만,/ 내 인생은 끝나버렸네.” 모든 것은 마지막에 이른다. 인생은 짧고 예술도 짧다. 그러니 내 글이 영원히 살아남길 바라지 말자. 그저 이름 모를 풀(이른바 잡초)처럼 단순히 존재하자. ‘왜 쓰는가’라는 거룩한 질문에 리디아는 주섬주섬 잡초처럼 답했으며, 이는 이 글에 딱 맞는 ‘형식’이었다.
인공지능 시대에 리디아식 읽고 쓰기
읽기가 고통스러운 즐거움이라면 쓰기는 즐거운 고통이라서 쉽게 인용의 유혹에 빠진다. 한 번만 더 리디아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무언가를 읽고 있고, 그래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와중에도 언제나 무언가를 읽고 있다.” 읽지 않고 쓰는 사람은 없다. 인공지능도 읽으면서 쓴다. 그런데 사람의 읽기는 인공지능의 읽기와 달리 몸으로도 읽는다. 정보와 논리만이 아니라 감각과 리듬까지 얻는다. 리디아의 글을 읽은 내 글은 그의 글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느낌적 느낌’을 느끼는 게 사람이며, 우리에게는 이심전심 미러뉴런이 있으며, 근미래에 피지컬AI가 발전해서 몸으로 읽고 느끼더라도 그에 따른 전기와 물 사용량, 사회적 비용, 생태계 훼손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한윤정 녹색연합 공동대표
김연수 작가는 도서전 취지문인 「인간 선언 호모 두두리」를 쓰면서 글의 논지를 제시하고 인공지능이 초고를 쓴 다음, 이를 고쳐 쓰는 실험을 했는데 이는 노동에 가까웠다고 한다. 최고 성능의 인공지능도 아직 문학적 글쓰기는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을 이용한 글쓰기의 경로는 첫째 아이디어를 주고받되 작가가 직접 쓰는 길, 둘째 작가가 논지를 정하고 인공지능이 글을 생성하는 디렉팅(이번 도서전 방식), 셋째 인간 개입 없이 강인공지능이 스스로 글을 쓰는 경우로 나눠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순간, 인공지능의 의견에 바로 수긍하게 될까 봐 아직 두렵다. 오롯이 인간으로서 읽고 쓰기에 몰두한 리디아의 길을 계속 따라갈 수 있을까?한윤정 녹색연합 공동대표 yunjeong_han@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