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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기억 또렷한데 기록 없는 3년… 존재 증명 위해 싸운다

기억 또렷한데 기록 없는 3년… 존재 증명 위해 싸운다
[사람들]
전북 익산의 한 중식당에서 일하던 그는 친구와 함께 전남 강진으로 향했으며, 한 정미소에서 일하게 된다. 곡식을 찧고, 무거운 포대를 나르고, 돌아가는 기계를 돌보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소년에게는 위험한 작업이었지만, 그에게 별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돌아가던 기계에 오른손이 빨려 들어갔다.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그의 오른손 다섯 손가락은 모두 절단된 상태였다. 1987년 그의 나이 열여덟의 일이었다. 그날 이후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장은 사고를 당한 소년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소년의 미래에 대한 책임도 없었다. 결국 그는 최소한의 치료만 받은 채 1년 만에 그곳을 나오고 말았다. 그는 지금도 가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내가 고아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부모가 있었다면, 형제나 친척이 있었다면, 그의 억울함을 대신 따져줄 사람이 있었다면 과연 사장은 그리도 쉽게 책임을 외면할 수 있었을까. 답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지역사회에서 사장은 유지였고, 전직 경찰관으로서 현직 경찰과도 꽤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호자도, 배경도 없던 한 소년이 맞서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었다. 그는 결국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 대신 다른 것을 얻었다. 왼손잡이로 살아가는 삶이었다. 왼손은 그의 새로운 오른손이 되었다. 그의 왼손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단순한 신체적 장애의 이야기가 아니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가 노동 현장으로 내몰렸던 시대, 사고를 당하고도 책임을 묻지 못했던 사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홀로 견뎌야 했던 한 인간의 기록이다. 사회가 그의 오른손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왼손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강제로 무려 다섯 곳의 수용시설을 전전해야만 했던 이현주 씨의 이야기이다. 이씨의 법적 나이는 1973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70년생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법적 기록과 실제 삶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의 시작은 전남 곡성읍 신기리의 한 다리 밑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그리고 어린 현주 씨. 그가 기억하는 당시 나이는 대여섯 살 무렵이다. 어머니는 약간의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가족의 삶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어린 현주에게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족은 더욱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몰렸다. 버팀목을 잃은 가정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남겨진 어머니 역시 아이들을 돌볼 여력이 부족했다. 그 과정에 가족은 흩어졌다. 자신의 기억과 성인이 되어 찾아가 만난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누나는 검은색 승용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입양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뒤 자신이 어떻게 익산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단 하나, 어머니와 헤어지던 순간만은 유난히 선명하다.   개정보육원을 탈출할 때 당시를 AI로 재현한 이미지 익산역 앞이었어요. 인파도 많고 번화가였던 역전 거리에 오락실이 있었는데, 번쩍이는 불빛과 뿅뿅거리는 게임기 소리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오락기 앞에 서서 한참을 구경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어머니는 사라지고 없었어요. 사람들 틈을 헤집고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죠. 그날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이후 옥구군 개정면에 위치한 개정보육원으로 보내졌습니다. 보호를 위해 보내진 시설이었지만, 제 기억 속 보육원은 보호의 공간이 아니었고 폭력이 일상이었던 곳입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맞아야 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체벌도 흔했죠. 어린아이들이 공포 속에서 생활하는 일이 일종의 문화 같았어요.” 숱한 매질과 폭력에 시달려 그 곳을 탈출했지만, 이현주 씨가 처음 마주한 자유는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자유는 배고픔과 불안, 그리고 잠잘 곳을 찾아 헤매는 일상이었다. 그는 부스에서 구두닦이로 생활하며 터미널과 역전 주변에서 이른바 찍새 로 손님을 찾았다. 가끔은 신문도 팔고, 껌도 팔았다. 그날 번 돈으로 밥을 먹고, 남은 돈으로 잠잘 곳을 구했다. 거리에서 자는 날도 있었지만, 운이 좋은 날은 허름한 여인숙을 얻을 수 있었다. 소년에게 여인숙은 사치가 아니었다. 잠시나마 비를 피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쫓기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안식도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그가 묵고 있던 여관에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군인들은 어린 소년이 혼자 여관방에 머물고 있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겼다. 보호자도 없고, 주소도 없고, 신분을 설명해 줄 어른도 없는 아이는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한 아동이라기보다 관리 대상이었다. 어린 소년은 군인들에게 자신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삶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군인들은 그를 다시 시설로 보냈다. 행선지는 힘겹게 탈출했던 개정보육원이었다. 지금의 이현주 씨는 당시를 돌아보며 계엄령 시기였을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정확한 날짜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시절 한국 사회는 군이 치안과 사회 통제에 깊숙이 관여하던 시대였다. 거리의 부랑인, 무연고자, 가출 청소년들은 보호보다 통제의 대상이었다. 행정과 치안의 경계가 지금보다 훨씬 모호한 시절, 어린 소년이 여인숙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었다. 어린 이현주에게 또 한 번의 강제 귀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거리는 위험한 곳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 선택한 삶이 존재했던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국가권력은 그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개정보육원 생활이 견디기 힘들어서 계속 도망쳤어요. 기회만 생기면 시설을 벗어나려 했으며, 몇 번이고 담장을 넘었고, 몇 번이고 붙잡혀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다시 탈출해 서울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어요. 거리에서 배회하던 중 공무원의 눈에 띄어 시립아동보호소 시설인 ‘소년의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약 1년 정도 생활한 것 같아요. 결국 처음 연고지였던 개정보육원으로 다시 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 느낌 같아요. 어디를 가야 하는지,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시설 밖에 있고 싶어서 또 탈출했는데, 이번에도 서울 수유리 인근에서 붙잡혀 성인 노숙자들 수용하는 시립갱생원으로 보내진 겁니다. 왜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가족을 잃고 시설을 탈출한 아이였을 뿐인데, 어느 순간 성인 노숙인들과 함께 갱생원이라는 공간에 들어가 있었죠. 서울시립갱생원에서 1년 정도 머물렀고, 다시 목포의 동명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어느 시점엔가 전북 이리보육원에 잠시 머물렀다는 기억도 있습니다. 며칠이었는지, 몇 주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아요. 문제는 기록인데, 현재 확인된 공적 기록 어디에도 이리보육원 생활은 존재하지 않더군요.” 이현주 씨가 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의 나이는 또래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군산 개정보육원에 수용 당시 기본적인 한글을 깨친 상태라 초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됐다. 당시 나이는 열세 살가량으로 추정된다. 같은 교실에 앉아 있던 아이들보다 몇 살은 더 많았다. 이미 거리와 시설을 떠돌며 어린 시절의 상당 부분을 잃어버린 뒤였다. 1년 정도 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시설이었으며, 시설은 지독한 노동을 가르쳤다. 어린 소년은 교과서보다 먼저 삽과 호미를 손에 쥐었다. 운동장의 놀이보다 먼저 농장 작업을 하게 되었고, 친구들과의 어울림보다 먼저 감시자들의 눈치를 배웠다. 그의 어린 시절은 학교가 아니라 시설의 작업장에서 흘러갔다.   개정보육원에서 지내며 다녔던 발산초등학교에서의 이현주씨 생활기록부 시립갱생원으로 보내졌을 때도, 이현주 씨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하지만 시설은 그를 아동으로 대하지 않았다. 처음 3개월 동안 맡겨진 일은 봉투 접기와 구슬 꿰기였다. 끝없이 종이를 접고, 작은 구슬을 실에 끼우는 단순 작업이었지만 고역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3개월이 지나자 작업은 더욱 힘들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바위를 깨고 옮기는 작업에까지 동원됐다. 아직 성장기였던 아이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노동이었다. 노동을 거부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하기 싫다는 말은 곧 체벌로 이어졌다. 이현주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구타와 폭력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설명이 필요 없는 생활의 일부였다. 그 시절, 가장 두려웠던 것은 노동만이 아니었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집단 체벌이었다. 어느 날, 원생들은 운동장으로 불려 나왔다. 관리자는 아이들에게 귀를 잡고 엎드려 팔꿈치를 이용해 앞으로 기어가라고 했다. 모두들 이유도 모른 채 바닥 위를 기었다. 팔꿈치의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흘렀다. 지나간 자리마다 붉은 자국이 길게 남았다. 관리자들의 폭력은 일상적인 수준을 넘어섰다. 곡괭이 자루가 체벌 도구로 사용됐다.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 일을 늦게 했다는 이유, 관리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그곳 원생들은 맞아야 했다. 시설은 보호의 공간이 아니라 통제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더 힘든 시간은 목포의 동명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립갱생원을 거쳐 동명원으로 옮겨진 그는 다시 강제노동 현장으로 내몰렸다. 동명원은 김 양식장을 운영했어요. 바닷가 인근에 설치된 김 양식장은 원생들에게 노동을 시키기 위한 공간이었죠. 운영자들이 별도로 수익을 올리기 위해 아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던 곳입니다. 한 겨울 매서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후려쳤고, 차가운 바닷물은 손발의 감각을 앗아갔어요. 손이 갈라져 피가 나고 몸은 얼어붙었습니다. 한여름 햇볕이 바다 위로 쏟아지는 무더위 속에서도 노동은 계속됐습니다. 노동의 대가는커녕 안 맞으면 다행인 날들이 계속됐습니다. 시설은 우리를 보호 대상이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했습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시설 생활의 잔인함에서 벗어났을 때가 15살 무렵이었습니다. 벼가 쑥쑥 자라고 있던 한여름, 낮에는 논에 숨어 있었고 밤에는 산길과 해안길을 따라 드디어 탈출에 성공한 것입니다.” 시설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지는 날이 있다. 바로 감사가 나오는 날이었다. 동명원에서도 그랬고, 개정보육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기억한다. 시청이나 관계기관의 감사가 예정된 날이면 시설은 갑자기 다른 세상이 된다. 평소에는 입어보지 못한 깨끗한 옷이 지급되는데, 해진 작업복 대신 단정한 옷을 주고, 식사도 평소보다 반찬이 많고, 고기반찬 같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들이 식탁에 올라왔다. 시설은 마치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는 공간처럼 꾸며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담당 공무원들이 둘러보는 동안 아이들은 얌전하게 행동해야 했다. 불만을 말해서도, 폭행을 당한 사실을 이야기해서도 안 되며, 그날만큼은 관리자의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마치 하루짜리 연극 같았어요. 감사가 끝나고 차량이 시설을 떠나면 상황은 곧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아이들에게 입혀졌던 좋은 옷은 다시 회수되죠. 마치 애초부터 우리들의 것이 아니었다는 듯 벗겨집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날 밤이 가장 두려운 날이 되기도 합니다. 감사 이후 더 심한 체벌이 이어지는 겁니다. 관리자들은 아이들이 외부인 앞에서 시설의 실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 두려움은 다시 폭력이 되어 아이들에게 돌아옵니다. 어린 원생들에게 감사는 보호를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잠시 꾸며진 가짜 풍경이었습니다.”   동명원에서 운영하던 김 양식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원생들의 모습을 AI로 재현한 이미지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국가의 기록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가족과 헤어지고 여러 시설을 전전하는 동안 자신의 생년월일은 물론,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시설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지, 행정적인 신분 문제를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성인이 된 뒤에도 자신이 법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살아갔다. 그런 삶이 바뀌게 된 계기는 뜻밖에도 사랑이었다. 결혼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20대 초반, 함께 살고 싶은 여자가 생겼다. 함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지만 곧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혼인신고를 하려면 신분이 필요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국가가 인정하는 기록이 있어야 했다. 그때 누군가가 한 가지 조언해주었다. 개정보육원에 있을 때 학교를 다녔다면 그곳에 기록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그 말은 한 줄기 희망이었다. 이씨는 자신이 다녔던 학교를 찾아갔다. 다행히 학교에는 당시 사용하던 이름과 생년월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그 서류를 발급받아 동사무소를 갔고, 학교 기록을 근거로 신분 등록 절차를 진행했다. 비로소 주민등록을 갖게 되었다. 국가의 기록 속, 한 사람으로 등록된 것이다. 신분 등록이 끝나자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병무청에서 신체검사 통지서가 도착했다. 그 순간 그는 아이러니를 느꼈다고 말한다. 그전까지 국가는 자신을 찾지 못했다.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묻지 않았다. 하지만 주민등록이 되자마자 병역 의무를 확인하는 통지서는 정확하게 날아왔다. 그 역시 대한민국 국민으로 등록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신분 등록 이전의 삶은 늘 불안정했다. 거리에서 친구들과 함께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 문제는 신분증을 요구받을 때였다. 주민등록증도 없고, 자신의 신분을 증명할 서류도 없었다. 경찰은 그런 그를 쉽게 믿지 않았다.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파출소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도 허다했다. 범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신분증은 단순한 플라스틱 카드가 아닌, 국가가 자신을 한 사람의 시민으로 인정한다는 증표였다. 누군가에게는 태어나면서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지만, 이현주 씨에게 그것은 스물한 해를 지나서야 손에 넣은 권리였다.   기거했던 시설에서 찍은 이현주씨의 어린 시절 모습, 오른쪽 사진의 얼굴에 있는 검은 반점은 구타당한 후 피가 응고된 모습. 2008년 무렵, 이현주 씨는 KBS에서 방영되던 가족찾기 프로그램 를 통해 어머니와 입양간 누나 ‘이현숙’ 씨를 찾는 방송에 출연했다. 그에게 가족 찾기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곡성의 다리 밑 움막에서 함께 살았던 어머니, 그리고 어느 날 검은 승용차를 타고 사라진 누나. 평생 마음속에 남아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당시 방송 제작진과 함께 수소문했지만 결과는 기대와 달랐으며, 어머니도, 누나도 찾지 못했다. 방송이 끝난 뒤에도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시설을 전전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폭력, 강제노역, 가족과의 생이별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며칠 동안 울었다고 말한다. 한때는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난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고아가 되었다는 이유로, 시설에 수용되었다는 이유로 왜 자신은 끊임없이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지, 왜 끊임없는 폭력에 시달렸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화병과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그는 끝내 살아남았다. 그 이유를 묻자 이현주 씨는 이렇게 말한다. 죽고 싶었지만, 억울해서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은 그의 삶을 설명하는 가장 짧고 강력한 문장인지도 모른다. 세상은 그를 정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시설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아라는 이유로 차별을 경험한 일도 적지 않았다. 국가 역시 그를 보호하기보다는 의심하는 쪽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 시설을 전전했던 기록들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고, 자신의 피해를 설명하려면 증거를 요구받았다. 기억은 분명한데 기록은 부족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오랫동안 싸워야 했다. 방황도 있었다. 한때는 조직폭력배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 했다. 사회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에게 그곳은 일종의 소속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길로 들어가지 않았다.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닌, 누군가 건넨 한마디였다. 마흔이 넘으면 자기 인생은 스스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이 가슴에 깊게 남았다. 과거의 피해는 분명 존재한다. 국가와 시설이 책임져야 할 일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삶까지 과거에만 맡길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이후 그는 조금씩 자신의 삶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현재 이현주 씨는 경기도남양주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가족을 찾고 싶어 하며, 기록에서 사라진 시간들을 밝혀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시설 수용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다. 사라진 기록들도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다리 밑 움막에서 시작해 시설과 거리를 떠돌았던 한 소년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이 겪은 일을 세상에 말하고 있다. 그것은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다시는 같은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도 그 어린 시절의 억울함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는다.   고2기 진실과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받은 이현주 씨 관련 결정문의 일부. 기록은 침묵하고 있다. 그가 보관하고 있는 기억과 행정기관이 보관하고 있는 문서 사이 적지 않은 간격이 존재한다. 그 간격은 이미 한 차례 국가기관의 조사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제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문에 남아 있는 시설 생활 기록은 시립갱생원과 목포 동명원, 두 곳에서의 약 5년뿐이다. 그러나 이현주 씨의 기억은 다르다. 개정보육원, 소년의 집, 시립갱생원, 동명원, 그리고 이리보육원까지, 그가 시설을 전전한 시간은 최소 8년가량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시간과 실제 삶의 시간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행정문서에는 5년이 남아 있지만, 그의 몸과 기억은 8년을 말하고 있다. 그 3년의 공백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어느 시설에서 생활했는지, 누구의 관리 아래 있었는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국가는 기록이 없다고 하지만 이현주 씨는 그 시간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단순한 숫자의 차이가 아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와 폭력, 강제수용과 시설생활의 흔적이 사라진 시간이다. 그가 최근 ‘제3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다시 피해 사실을 신청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진 시간을 찾고 싶다고 말한다. 기록에서 지워진 몇 년. 행정문서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한 인간의 기억 속에는 선명하게 남아 있는 시간. 그는 지금도 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흩어지고 이동되었던 한 아이의 삶을 제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이득신 시민기자 dsshine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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