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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전쟁의 트라우마와 불면

전쟁의 트라우마와 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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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가자!” 아랫방에서 또 어머니의 그 저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7년을 두고 들어와도 전연 모를 그 어떤 딴사람의 목소리... 저렇게 쨍쨍한 목소리로 외마디 소리를 지를 뿐 그 밖의 모든 것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었다. 철호에게 있어서 지금의 어머니는 말하자면 어머니의 시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범선 [오발탄] 중에서)   은 6.25 전쟁 직후의 암울한 시대상을 어느 회사의 말단 서기인 주인공 철호의 기구한 운명을 통해 그려낸다. 가족들이 전쟁의 상처와 가난으로 좌절하고 피폐해져 가는 가운데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신도 끝내 함께 무너져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철호의 어머니는 누워지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벌떡 일어나 가자! 가자!”라고 소리를 지른다. 북한에서 지주로서 풍족하게 살았던 당신은 분단 직후에 빈손으로 월남하여 해방촌의 판잣집에 정착하게 되면서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터져 용산 일대가 폭격으로 ‘지옥처럼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완전히 실성하게 된 것이다. 1959년에 발표된 이 소설을 유현목 감독이 1961년 영화로 만들었는데, 전후의 빈곤과 부조리와 인간 소외를 탁월하게 그려내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다(유튜브로 시청할 수 있다). 거기에서도 어머니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사뭇 처절하게 묘사된다. 6.25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은 무자비했다. 역사학자 김태우는 이라는 책에서 당시의 상황을 치밀한 증언과 자료로 밝혀내고 있다. 그 가운데 ‘흰옷을 입은 적들’이라는 장(章)이 있는데,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난민대열에 섞여 전선 지역에 먼저 투입된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을 가리킨다. 그들을 겨냥한 무차별 폭격이 민간인의 대량 살상으로 이어졌고, 다행히 살아남았다 해도 깊은 정신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우리는 사격 훈련장이나 데모 현장에서 총탄 소리를 들어보았겠지만, 공중폭격이 일으키는 굉음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충격파(shockwave)라고 한다. 영화관의 최첨단 음향 시스템으로도 그 맹렬한 진동을 재현하지 못한다. 그러한 충격은 강한 트라우마를 남길 수 있다. 트라우마란 어떤 공포스러운 경험이 남긴 심리적 외상으로서, 단순한 기억을 넘어 현재의 일상에까지 신체적·정신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말한다. 뇌는 사건을 과거로 저장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는 플래시백에 시달린다. 특히 고령자의 경우 끔찍한 기억이 인지적 통제 없이 튀어나오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치매와 맞물리면 최근의 ‘에피소드 기억’은 소실되지만 오래된 ‘감정 기억’은 생생하게 남는다. 그렇듯 만성화된 불안과 두려움은 외상 관련 수면 장애 (trauma-related parasomnia)를 일으키기 쉽다. 그래서 단순히 악몽을 꾸는 것을 넘어, 꿈의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격렬한 움직임을 보이는 등 이상 행동을 나타내기도 하는데, 의 노파가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한국에서 전쟁 그리고 4.3 등의 국가폭력을 겪은 세대는 오랫동안 숙면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에게 밤은 휴식의 시간이 아니었다. 폭격뿐 아니라 감시, 미행, 밀고, 체포, 처형, 피난, 도주, 이산(離散) 등이 야간에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수면은 오랫동안 불안으로 가득 찬 시간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전후 한국인들은 역사적 비극의 상처를 오랫동안 꺼내놓지 못했다. 나의 지인은 제주도 출신인데 조부모가 4.3의 희생자였는데도 아버지가 그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고, 1990년대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 그 사건을 처음 알게 되어 궁금해서 물어보았더니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느냐고 화를 내면서 대답을 피하셨다고 한다. 그렇듯 대낮의 침묵 속에 억눌린 기억은 밤중의 악몽으로 재현되기 일쑤고, 수면의 질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트라우마로 인한 수면 장애는 참전 군인들에게 더욱 심각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9·11 이후 아프간전 및 이라크전에 참전했던 미군 가운데 3만 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는 전사자의 4배에 달한다. 구사일생으로 귀환했는데도 자살하는 것은 정신이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전쟁터는 지뢰와 매복과 기습 등 치명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어서, 외부의 위험을 탐지하는 편도체가 24시간 동안 과도하게 활성화된 채로 지내게 된다. 그리고 불규칙한 교대 근무, 야간 경계, 폭발음과 조명 등으로 생체시계가 무너져 버린다. 참전의 트라우마는 멘탈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감당하기가 어렵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총성의 환청에 시달리고 꿈속에 죽은 동료가 등장하여 소스라치게 놀란다. 세상은 너무 위험하고 잠이 들면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는 불안으로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 민간인 학살이나 강간에까지 가담했다면 죄책감과 수치심, 그리고 자기혐오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단순한 공포 반응을 넘어 정체성의 붕괴를 초래한다. 피폐해진 자아는 의식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밤에 더욱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트라우마가 깊을수록 약물이나 상담만으로는 호전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의외의 방법이 시도되기도 한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에 그 한 가지 사례가 소개된다. 30분짜리 분량이지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던져주는 영상이다. 주인공은 이라크 파병에서 돌아온 어느 퇴역 군인인데, 그곳에서 어린아이를 학살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발작 치료제와 항불안제와 부작용 완화제 등 수많은 약을 달고 살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엄청난 술을 마셨다. 그렇게 악몽에 사로잡히고 죽음에 이끌려 좀비처럼 살아가던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는데 바로 서핑과의 만남이었다. 파도를 타면 자연에 도취되면서 도파민이 급증하고, 끔찍한 기억들을 바닷물로 씻어낼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파도를 탔을 때 저의 기분은 저의 일부가 죽은 것 같았어요. 엄청난 고통과 죄책감에 괴로워하던 저는 그날 죽은 거예요. 바다의 심장 박동을 느꼈어요. 살아 숨 쉬는 것 같았죠. 그곳에는 죽음과 파멸, 트라우마는 없었어요.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제가 꾸는 유일한 꿈은 다음 파도를 타는 거였어요.” 내일은 어떤 파도를 타게 될까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자살 충동에 휩쓸리지 않는다. 그는 트라우마 베테랑들을 위한 서핑 학교에서 코치로서 자원봉사를 하며 지낸다. 그 학교에는 대전차 지뢰를 밟아 하반신을 잃은 사람, 한쪽 팔이 잘려서 밥주걱을 달고 파도를 타는 사람, 연쇄 폭발로 청력과 시력을 잃은 사람 등이 참가한다. 매일 20명 이상의 참전 병사들이 자살하는 미국에서 이런 프로그램은 재활 치료에 특효약이 된다. 생각을 억지로 바꾸려는 (top-down) 방식이 아니라, 몸의 감각을 통해 신경계를 진정시키는 접근이기 때문이다. 서핑을 하면 전쟁터에서처럼 심박이 올라가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지만, 목숨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놀이와 도전의 감각으로 각성의 내용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것이 안전한 환경에서 반복되면 뇌는 각성을 공포로 연결하지 않게 된다. 거기에 더해 자연환경이 치유 효과를 배가한다. 광활한 바다, 평온하게 누워있는 수평선,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파도는 마음의 공간을 활짝 열어준다. 공동체의 경험도 세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함께 파도를 타면서 장애를 딛고 일어서도록 서로 격려하고 실패와 성공의 기억을 공유하면서 안전한 소속감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무감각한 살인 병기가 되어야 했던 운명,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비된 신경전달 물질들이 고스란히 신체에 남아 엉뚱한 폭력으로 터져 나오던 상처는 그렇게 서서히 치유되어 간다. 지구촌에 추악한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3년이 넘도록 처절하게 연명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의 참전 군인들은 가족 학대의 가해자가 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미국과 이스라엘이 뜬금없이 일으킨 이란과의 전쟁에서 165명의 초등학생들이 폭사했다. 뉴스에서 다뤄지는 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비명과 절규는 곳곳에 가득하다. 야간 공습으로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우는 시민들, 파괴의 악몽으로 몸부림치는 군인들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어리석고 사악한 권력자들의 만행을 멈춰 세울 힘은 모아질 수 있을까.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갖게 된 이웃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평화란 거창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사람들이 총성과 폭발의 환청에 시달리지 않고 숙면할 수 있는 밤을 되찾는 일이다. 휴머니즘은 평온하게 잠드는 시간을 지키는 데서 시작된다. * 이 글은 미국의 한인 동포 매체인 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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