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매달려 미래 잃어버린 러시아 국민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구 소련에 대한 향수
푸틴 정권은 여러 측면에서 러시아 국민의 구 소련에 대한 향수에 기반하고 있다. 오늘날 러시아가 소련을 강하게 미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소련의 부정적인 측면은 은근히 뒤로 감추고 향수를 자극할 만한 요소들만 전면에 내세워 세대를 가리지 않고 긍정적인 감정을 자극한다. 맛있는 아이스크림, 풍부한 사회복지 제도, 전 세계가 부러워하던 강력한 국력, 인류 역사상 최초의 우주 비행, 웃고 있는 행복한 국민들…. 외부에서 보면 과연 이게 통할까?” 싶어 다소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실제로 통한다. 그것도 전 세대에 걸쳐서 말이다.
기성세대는 자신이 젊었을 때의 달콤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청년 세대는 학자금 대출, 내 집 마련, 취업난 같은 자본주의적 문제가 없었던 사회라는 (정확히 말하면 없었다고 선동하는) 이미지에 매혹된다. 외교부 장관이 ‘СССР’(‘소련’)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회의에 참석하면 긍정적인 여론이 형성되고, 한 의류회사가 할아버지 세대를 연상시키는 니트 디자인에 ‘집단농장’이나 ‘5개년 계획을 실현하자!’ 같은 문구를 넣은 옷을 출시하면 순식간에 완판된다. 소련과 관련된 상징은 인기가 높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러시아 국민은 왜 이처럼 소련 향수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는 걸까? 여론조사 기관 ‘FOM’(‘공공의견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도 러시아인의 63%가 소련 붕괴를 아쉬워한다고 답했다. 이 수치는 1990년대 말, IMF 금융위기 때에 80%를 넘는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2010년대 초반 51%까지 많이 감소했지만 이후 다시 안정적인 상승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햇볕도 더 쨍쨍했고 아가씨도 더 예뻤던’ 위대한 과거
응답자들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생각은 ‘안정성’ (16%)이다. 그 다음으로는 ‘젊음과 근심 없는 어린 시절’ (15%), ‘행복한 시절’ (15%), ‘민족 간의 단결과 우정’ (13%) 등이다. 소련의 부정적인 측면은 훨씬 덜 언급된다. 사회 탄압과 생필품 부족은 각각 4%에 불과했다.
‘사람들이 위대한 강대국에 속해 있다는 감각을 잃었다’는 질문에 대해, 1999년에는 20%만이 이 견해에 동의했으나 2014년에는 56%, 2021년에는 46%에 달했다. 과거의 ‘위대함’에 대한 그리움이나 이미 독립한 국가들을 자신의 뒷마당처럼 여기는 태도는, 러시아 정권이 자국민에게 외교적 모험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러시아판 ‘Make Russia Great Again’ (‘러시아를 다시 위대하게!’)이다.
소련 공산당 지지자들이 볼셰비키혁명 107주년을 맞아 혁명 발생지인 생페테부르크 오로라 크루저항 근처에 모여 구 소련 시절의 노래를 합창하고 있다. 2024. 11. 7 연합뉴스/AP
우리가 보통 향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나이를 들먹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더 건강했고 일이나 가족 부양 같은 ‘어른의’ 의무에 짓눌리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할 수 있다. 실제 소련 시절에 경력을 시작했던 많은 이들은 나라가 붕괴한 다음에 들어선 시장경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서 좌절이 비롯된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젊었던 시절에 대해 나도 많이 들었던 농담이 있다. 직역하자면 ‘그때는 햇볕도 더 쨍쨍했고 풀도 더 파랬고 아가씨도 더 예뻤다’다. 전형적인 젊음에 대한 향수다.
심지어 스탈린까지 그리워하는 현재의 불안정성
그러나 소련 붕괴에 대한 아쉬움의 원인은 단지 따뜻한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어려운 현실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기도 한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실제로 이런 향수는 국가 구조가 무너지고 경제 위기가 이어졌던 1990년대 말에 정점을 찍었지만, 개혁이 상대적인 성공을 거두고 석유와 가스 붐이 크게 일었던 2000년대에는 사회주의 과거를 그리워하는 비율이 정말 많이 감소했다. 삶이 점점 더 나아지고 즐거워지는데 굳이 과거를 떠올릴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2014년 금융 위기와 크림반도 병합으로 인해 가해진 서방의 경제재제 이후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사람들은 다시 내일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처럼 보였던 ‘기적의 나라’를 되살리게 되었다.
이는 역시 애 그렇게 많은 러시아 국민이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는지도 설명해 준다. ‘레바다 센터’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탈린이 ‘효율적인 매니저’였고 나라에 적절한 ‘질서’를 확립했다고 믿기 때문에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다. 이 ‘질서’라는 개념은 러시아에서 매우 중요하다. 푸틴도 몇 십년동안 반복해서 매우 강조하는 표현이다. 한국 정치인들은 목이 쉬도록 ‘자유’를 외치지만 러시아에서는 ‘질서’를 강조한다. 이 질서는 ‘낮은 물가’, ‘미래에 대한 확신’, ‘국가의 국민에 대한 돌봄’, ‘부패한 관료들과의 투쟁’ 같은 요소들이 함께 묶인 의미이다. 만약 이런 것들을 러시아가 해결할 수 있었다면 과연 스탈린이 이 정도 호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
젊은 세대의 생각도 흥미롭다. 나이로 볼 때 소련에서 살아 본 경험이 없는 10~20대 러시아 총소년들 사이에서도 사회주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2014년에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교 중 하나인 고등경제학교 연구진이 조사한 결과 학생들은 소련을 동시대의 러시아와 직접적으로 대비시키며 현재 러시아에 불리한 평가를 내렸다. 이들은 과거의 ‘우호적인 분위기와 서로에게 도움’과 현재의 ‘서로에 대한 불신’, 당시의 ‘사회적 보장’과 오늘날의 ‘사회적 불안정성’ 사이의 대비를 언급했다.
스탈린
소련 향수는 정권이나 언론 탓 아닌 전반적 사회 분위기
이런 소련에 대한 그리움은 러시아 정부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많다. 국가가 통제하는 언론을 통해 러시아인들을 세뇌 시켜서 과거가 더 좋았다는 생각을 주입했다는 것이다. 물론 푸틴은 이 소련 신화를 많이 활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임기 초기에 내린 상징적 결정 가운데 하나는 소련 국가의 부활이었고 이후에는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는 발언과 같이 수많은 사례가 뒤따랐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러시아 사회에 대한 깊은 분석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련 붕괴에 대한 아쉬움은 푸틴 집권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 있었다. 50세 이상인 세대는 왜 그런지 이해가 간다. 그리고 설문조사 자료에 따르면 오늘날 50세 미만의 응답자 다수는 부모나 친척, 지인들의 이야기, 소련 시절의 영화와 책, 그리고 자신의 막연한 기억에 의존해 소련을 떠올린다. 이는 정부 정책이 어떤지를 떠나서 이미 이런 향수의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가족을 보아도 그렇다. 우리 부모님도 역시 소련을 많이 그리워하고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도 대부분 압도적으로 긍정적이다.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들리는 정보라면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지만 가족 내에서 오가는 이야기는 훨씬 설득력 있고 자연스럽게 믿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현재 러시아 국민 가운데 50대 이상 세대가 실제로 소련에서 살아본 세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내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거의 다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푸틴의 정치술에 저당 잡힌 러시아의 미래
푸틴은 이런 상황을 자신의 지지율에 매우 영리하게 활용하는 것뿐이다. 첫 임기 초기에 국가 경제와 사회 분야를 강화해서 러시아인들에게 안정과 질서를 믿게 만들었고 이후에는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하며 사람들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역사적 공정’의 욕구에 부응했다. 대략 이 지점에서 급속한 경제 성장과 번영하는 나라에서 살고자 하는 정상적인 욕구를 평화적으로 충족시킬 수단은 끝나고 말았다. 코로나19로 인한 피로감, 그 이후에 이어지는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옆 나라를 무력 침공해서 ‘강력하고 위대한 국가’에 대한 국민의 향수를 자극했다. 그 결과 푸틴 본인도 속한 소련 세대,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현재로부터 상상의 과거로 도피하려다가 현재를 잃고, 나라 전체가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하게 되어 버렸다.
푸틴은 언젠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 이런 향수가 아무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아무래도 어려워 보인다. 공산주의 체제의 만행을 제대로 평가하지도, 청산하지도 않은 채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기대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은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지에 대한 우려를 떨쳐내는 것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