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하구 북한 땅에 국제기구도시를 세우자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구촌 평화를 말하는 자리에서 동북아는 늘 문제의 진원지로 거론된다. 북핵 위기, 미중 패권 경쟁, 한반도 분단.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문제의 진원지가 해법의 진원지가 될 수는 없을까.
평화는 선언으로 오지 않는다. 이해관계가 얽히고 제도가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지속된다. 국제기구란 그 제도의 물리적 형태다. 기구가 한 곳에 모이면 분쟁을 조정하는 중립지대가 생기고, 사람이 오가고, 돈이 흐르고,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브뤼셀이 유럽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엔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1945년 만들어진 국제 질서가 수명을 다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느끼는 사실이다.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 — 미국·영국·소련·중국·프랑스 — 이 설계했다. 공교롭게도 이 다섯 나라는 이후 모두 핵보유국이 됐다.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은 이 다섯 나라의 동의 없이는 어떤 집단 행동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다. 유엔은 핵을 가진 자들이 핵전쟁을 방지하는 클럽으로 설계된 것이다.
그 설계의 한계가 21세기 들어 날마다 폭로되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채 4년째 전쟁을 이어가고,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학살을 계속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은 무도한 이란 침공을 강행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거부권 앞에 무력하게 침묵한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네타냐후와 푸틴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해도 집행할 방법이 없다. 법은 칼이 없으면 종잇조각이라는 것이 지금도 유효한 현실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유엔이 구조적으로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이 폭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후 붕괴, 생태 파괴, 빅테크 데이터 독점, 팬데믹 — 이것들은 모두 국경을 넘는 문제다. 그러나 유엔 헌장 제2조 7항의 불간섭 원칙은 강대국이 무슨 짓을 해도 내정 간섭 이라는 방패 뒤에 숨을 수 있게 해준다. 20세기형 위협에 맞게 설계된 기구가 21세기형 위협 앞에서 무력한 것은 설계 실패가 아니라 설계 의도의 한계다.
그 결과 지금 지구촌에서는 새로운 국제 거버넌스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유엔을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유엔이 구조적으로 할 수 없는 것 — 공유 자원의 민주적 관리, 강대국 지도자에 대한 실질적 제재, 지구 차원의 공공재 공급 — 을 담당할 새로운 성격의 기구들이 절실해졌다는 것이다.
기후, 에너지 전환, 데이터 주권, 해양 자원, 핵 감시, 생물다양성 — 분야마다 새로운 국제 협력의 틀이 요구되고 있다.
6월 5일 파주에 있는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쌍안경으로 비무장지대(DMZ) 너머의 북한 쪽을 관찰하는 관광객들. 2025.6.5. AFP 연합뉴스
세계 경제의 중심이 동북아로 왔다
국제 거버넌스의 수요가 폭발하는 바로 이 시점에, 세계 경제의 중심이 동북아로 이동했다. 2000년 세계 GDP의 30%이던 아시아의 비중은 2025년 현재 약 50%에 달한다. 중국 18.3조 달러, 일본 4.1조 달러, 한국 1.7조 달러. 동북아 3국만 합쳐도 세계 경제의 22~23%다. 세계 4분의 1의 경제를 움직이는 권역이다.
그런데 이 권역에 국제기구 본부는 얼마나 있을까. 국제기구연합(UIA) 2024/2025년 연감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활동 중인 국제기구는 약 4만 5,000개, 등록된 기구는 7만 8,500개를 넘는다. 2008년 대비 두 배 가까이 늘었다. 그런데 그 본부 소재지는 여전히 유럽과 북미에 극단적으로 집중되어 있다. 브뤼셀 1,000개, 파리 288개, 런던 284개, 빈 156개, 제네바 135개. 아시아 최다인 싱가포르가 111개, 도쿄 92개, 서울 76개다. 동북아 3대 도시를 합쳐도 210개 — 브뤼셀 혼자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세계 경제의 비중과 국제기구의 비중 사이에 이토록 큰 괴리가 있다. 이것은 불균형이다. 그리고 불균형은 언제나 조정을 요구한다.
트럼프가 만들어준 역사적 공백
2026년 1월, 트럼프 행정부는 행정명령으로 66개 국제기구 및 UN 산하기구에서 탈퇴와 재정 지원 중단을 선언했다. UNFCCC(기후변화협약), IPCC, UNCTAD, UN민주주의기금, UN인구기금 등 제네바와 뉴욕에 집중된 핵심 기구들이 포함됐다. 루비오 국무장관은 낡은 다자주의 모델을 거부한다 고 선언했다. 추가 탈퇴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독일에서 UN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최종 협상 회의가 열리고 있다. 2015.10.20. [EPA=연합뉴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기회다. 미국이 떠난 기구들에 새 거점이 필요해졌다. 제네바의 한 언론은 이 상황을 국제 제네바를 대변할 지도자가 없다 는 위기로 묘사했다. 동시에 이것은 미국 없이도, 혹은 미국을 대신하는 새로운 협력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자각을 촉진하고 있다.
신설, 이전, 확충. 지금이 바로 세 가지를 동시에 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한강하구, 지구촌에 이런 곳은 없다
어디에 새 거점을 마련할 것인가. 필자는 2018년 이 지면에서 한강하구를 제안한 바 있다. 지금 그 제안을 다시, 훨씬 강한 근거를 들어 꺼낸다.
한강하구 일대 약 260㎢, 개풍군을 중심으로 개성공단과 강화도 북부를 포함하는 이 땅은 서울 면적의 절반이다. 북한 땅이 대부분이다. 70년간 접경지대로 묶여 손 못 댄 그 땅이, 지금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도시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입지 조건을 보라. 인천공항까지 1시간, 베이징·상하이·도쿄까지 2시간 항공권이다. 해양(서해)과 유라시아 대륙철도가 동시에 연결되는 지구상 유일한 지점이다. 2천만 인구 밀집지가 1시간 안에 있고, 세계 경제의 거점인 동북아 3국이 코앞이다. 군사적 긴장만 완화된다면 지구상에 이만한 조건을 갖춘 곳은 없다.
필자가 제시하는 국제기구도시 후보지. 그림 제공 이원영
여기에 국제기구들이 들어선다. 기후, 에너지 전환, 데이터 주권, 해양, 보건, 군축 — 국경을 넘는 문제를 다루는 기구들이 국경 그 자체인 이 땅에 자리 잡는다. 기구의 존재 자체가 평화의 물리적 보증이 된다. 한강하구를 침범하는 것은 그 기구들에 입주한 수십 개국을 동시에 건드리는 일이 된다. 브뤼셀이 유럽에서 한 역할을, 한강하구가 동북아에서 할 수 있다.
여기에 각국에 50년 장기 임대하는 조차지 기능을 더한다. 상하이가 조계지를 통해 이종 문명의 시너지로 성장했듯, 홍콩 옆 선전이 그랬듯, 이 땅도 그렇게 진화할 수 있다. 토지는 북한이 소유한 채 지대를 받아 주민에게 돌린다. 개성공단이 이미 소규모로 이 모델의 가능성을 증명했다.
북한에게도 유력한 출구
북한도 지금 절실히 평화를 원하고 있다.
한강하구 국제기구도시는 북한이 체제를 바꾸지 않고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유력하고 현실적인 경로다.
국제기구가 들어오면 세계와 소통하는 인프라가 생긴다. 국제 사회는 이 도시의 안전을 보장할 이해관계를 갖게 된다. 북한을 고립시켜 만들어진 위협은, 연결이 만들어낼 안정으로 대체된다.
이 구상이 실현되면 한반도 평화는 더 이상 강대국의 선의에 기대는 수동적 평화가 아니다. 지구촌이 함께 이해관계를 가지는 능동적이고 구조적인 평화가 된다.
상상이 전략이 되는 순간
노예제 폐지도, 여성 참정권도, 유럽연합도 처음에는 공상이었다. 역사는 불가능이 필연이 되는 과정의 기록이다.
유엔은 수명을 다해가고 있고, 새로운 지구 거버넌스에 대한 수요는 폭발하고 있다. 트럼프는 기존 국제기구 질서를 흔들어 공백을 만들고 있다. 동북아는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떠올랐지만 국제 거버넌스의 중심에서는 여전히 변방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지금 동시에 맞물리고 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무게를 짐이 아니라 자산으로 바꾸는 것, 분단의 접경을 인류 협력의 거점으로 바꾸는 것 — 이것이 적극적 평화전략의 의미다. 방어하는 평화가 아니라 만들어가는 평화다.
신설하고, 이전하고, 확충하라. 한강하구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