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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12·3 내란은 국회 아닌 국민 주권에 대한 반란

12·3 내란은 국회 아닌 국민 주권에 대한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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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전 대통령이 19일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 우두머리 혐의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해 앉아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지귀연 부장판사)는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2026.2.19 서울중앙지법 제공 연합뉴스 2026년 2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재판장 지귀연 부장판사)는 12·3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기소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습니다. 재판부는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와 군·경 동원을 통한 국회 봉쇄 시도를 중대한 헌정질서 파괴 행위로 판단하였습니다. 선고 직후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국민의힘 및 이른바 ‘윤어게인’ 등 옹호 진영에서는 사형을 면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무기징역 선고에 대한 반발이 표출되었습니다. 반면 여당과 시민단체, 다수 시민 여론에서는 형량의 적정성 문제와 더불어 보다 강력한 단죄가 필요하다는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논쟁은 2월 25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 아름드리홀에서 열린 ‘윤석열 내란재판 1심 판결 평가와 내란 청산의 남은 과제’ 토론회로 이어졌습니다(관련 보도 종합). 이 자리에서 법학자와 변호사들은 내란죄 구성요건 해석, 계엄 선포의 위헌성 판단 범위, 증거 채택 문제 등을 둘러싸고 판결의 법리적 한계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공론장에서도 정면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지 않은 질문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지귀연 판사는 판결 과정에서 17세기 영국의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를 소환하였습니다. 군주가 의회를 억압하려 하였고, 그 결과 재판을 거쳐 처형되었다는 역사적 사례를 들어 권력이 의회를 침탈하는 행위의 중대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상징적 비유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 공식 초상(앤서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계열).출처/라이선스: 위키미디어   1649년의 영국은 국민주권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주권은 국민 전체에게 귀속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왕권신수설 아래의 절대군주제와 귀족·지주 엘리트가 장악한 의회가 충돌했을 뿐입니다. 보통선거도, 주권재민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의 ‘주권’은 오늘날 민주공화정에서 말하는 주권과 동일한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대한민국 헌법은 제1조에서 분명히 선언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이 차이를 무시한 채 전제정 시대의 권력 충돌을 민주공화정의 헌법 질서에 그대로 대입하면, 주권 개념의 역사적 층위가 혼동됩니다. 사건은 ‘기관 대 기관’의 충돌로 축소되고, ‘주권자 대 권력자’의 충돌이라는 본질은 흐려집니다. 12·3 사태의 핵심은 국회라는 물리적 공간의 봉쇄가 아닙니다. 그것은 국민이 위임한 주권 질서를 군사력으로 제압하려 한 시도였습니다. 민주공화정에서 주권자의 의사에 반하여 군과 경찰을 동원하는 행위는 단순한 권력 남용이 아니라 주권 침탈입니다. 내란은 국가라는 추상적 기구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주권자에 대한 범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판결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판결은 무엇을 처벌하였습니까. 국회라는 헌법기관의 침탈입니까. 아니면 국민이 위임한 주권 질서의 침탈입니까. 민주공화정에서 가장 먼저 명확히 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주권은 누구의 것입니까. ■ 영국에서 주권(主權)은 어떻게 이동했는가 ―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화와 정치·제도적 상부구조의 재편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의 처형은 상징적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국민주권의 승리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 단계를 건너뛰는 일입니다. 17세기 영국은 국민주권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충돌은 왕권과 엘리트 권력 집단 사이의 갈등이었습니다. 이 갈등의 배경에는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6~17세기 영국은 대항해 시대와 식민지 개척, 해상 무역의 확대를 통해 상업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 봉건 귀족 질서 위에 상인 계층과 신흥 지주, 초기 산업 자본가가 등장하였습니다. 국가는 더 이상 봉건적 토지 기반 수취 체계만으로 운영될 수 없었습니다. 조세와 재정, 군사 동원 체계는 점차 상업 자본과 결합하게 됩니다. 절대군주제는 봉건적 권력 구조에 적합한 통치 방식이었지만, 상업 자본과 식민지 경제가 확대되는 상황에서는 의회 중심 통치가 재정·입법 측면에서 더 효율적인 구조로 작동했습니다. 왕은 과세권을 확대하려 하였고, 의회는 과세 동의권을 무기로 왕권을 제약하려 하였습니다. 이 갈등은 단순한 헌정 분쟁이 아니라 경제적 이해관계의 충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분석 틀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가 제시한 경제적 하부구조와 정치·제도적 상부구조의 관계론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생산 관계의 변화는 법과 제도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영국에서 절대군주제가 의회 중심 체제로 이동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가 확대되면서 그에 부합하는 정치·제도적 상부구조가 재편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1649년은 엘리트 권력 재편의 한 장면이었을 뿐, 국민주권의 제도적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된 뒤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이 집권하며 공화정을 선포했지만, 이는 시민적 민주공화정이 아니었습니다. 군사력에 기반한 통치였고, 보통선거 체제는 아니었습니다. 크롬웰 사후 왕정은 복고되었고, 찰스 2세(Charles II, 1630–1685)가 즉위하면서 영국은 다시 군주제를 유지합니다. 1649년은 엘리트 권력 재편의 사건이었지, 국민주권의 완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제도적 상부구조는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1688년 명예혁명과 1689년 권리장전을 통해 왕권은 법적으로 제한되었고, 의회의 우위가 제도화되었습니다. 이는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도 주권은 국민 전체에게 귀속되지 않았습니다. 의회는 여전히 대지주 귀족과 제한적 재산 보유층이 장악한 권력 기구였습니다.   영국 권리장전((Bill of Rights). 출처/라이선스: 위키미디어. 파일은 ‘영국 국립기록원(The National Archives, UK) 소장 이 시기 주권론 역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리바이어던』(1651)에서 내전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절대적 주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주권론은 질서 회복을 위한 강력한 통치 권력을 정당화했습니다. 이는 전제적 국가 권력을 이론적으로 완성한 사상입니다. 반면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통치론』(1689)에서 통치 권력은 인민의 동의에 기초해야 하며, 정부가 이를 위반할 경우 저항권이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명예혁명 이후 의회 중심 체제를 정당화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민’은 보편적 시민이 아니라 재산을 가진 남성이었습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근대 국가를 합리적-법적 지배 체제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개인적 신분 질서가 아니라 법과 행정 체계에 기초한 국가 운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근대 국가는 곧바로 시민 전체의 주권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합리화된 권력 구조였습니다. 찰스 틸리(Charles Tilly, 1929–2008)는 근대 국가의 형성을 전쟁과 조세 동원 체계의 발전 속에서 설명했습니다. 국가는 군사와 재정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강화되었습니다. 이는 상업 자본과 국가 권력이 결합한 구조였습니다. 이 역시 주권이 시민 전체에게 귀속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본격적인 주권의 대중화는 산업혁명 이후에야 시작됩니다. 18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이 진행되며 도시 노동계급이 형성되었습니다. 경제적 하부구조가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정치·제도적 상부구조 역시 변화를 요구받았습니다. 생산의 주체가 확대되었으나 정치적 권리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 불균형이 참정권 확대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832년 제1차 선거법 개정은 산업 도시의 대표성을 일부 인정했으나 여전히 제한적이었습니다. 1867년 제2차 개정은 도시 노동자 일부에게 선거권을 확대했습니다. 1884년 제3차 개정은 농촌 노동자까지 확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성은 여전히 배제되어 있었습니다. 이 과정은 T. H. 마셜(T. H. Marshall, 1893–1981)이 설명한 시민권의 단계적 확대 과정과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시민권’을 시민적 권리, 정치적 권리, 사회적 권리로 구분하였습니다. 여기서 마셜이 말한 ‘시민적 권리’란 법 앞의 평등, 재산권, 계약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 개인을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자유권을 의미합니다. 이는 18세기 근대 초기에 확립되었으나, 곧바로 정치적 주권의 보편화를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 등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고, 이후 교육 받을 권리, 최소한의 사회보장 등의 사회적 권리가 제도화되면서 비로소 시민 전체가 주권의 주체로 등장하게 됩니다. 20세기에 들어서야 정치적 권리가 보편화되었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는 주권이 엘리트 집단에서 시민 전체로 제도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이었습니다. 1918년 인민대표법은 일정 연령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보통선거권을 부여했습니다. 1928년 동등선거법에 이르러서야 남녀 동등 보통선거가 확립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국민주권이 제도적으로 완성됩니다. 결국 영국에서 주권이 왕과 귀족 엘리트에게서 일반 시민 전체로 이동하는 데에는 수백 년이 걸렸습니다. 1649년은 엘리트 권력 재편의 한 장면이었을 뿐이며, 국민주권의 제도적 완성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습니다. 이 과정을 주권론의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의 출발은 자본주의의 형성과 함께 왕권과 신흥 자본 권력이 결합·재편되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의 주권은 제한적이었습니다. 베버가 말한 합리적-법적 지배는 등장했지만, 시민 전체의 주권은 아니었습니다. 틸리가 설명한 국가 형성 과정 역시 자본과 군사 권력의 결합이었습니다. 현대의 출발은 보통선거와 시민권의 보편화가 제도적으로 확립된 시기였습니다. T. H. 마셜이 분석했듯, 정치적 권리가 보편화되고 사회적 권리가 확장되면서 비로소 시민 전체가 주권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이때 주권은 엘리트 권력에서 시민 전체로 이동합니다. 주권론은 단번에 민주공화정으로 도약하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하부구조의 변화가 정치·제도적 상부구조를 압박했고, 그 속에서 사상과 제도가 점진적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따라서 17세기 영국의 사건을 오늘날 민주공화정의 주권 개념과 동일한 층위에 놓는 것은 역사적 단계의 차이를 지우는 일입니다. 전제정 시대의 주권은 신분적 권력이었습니다. 산업사회 이후의 주권은 시민적 권리였습니다. 이 구분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엘리트 권력 재편의 사건을 국민주권의 사건으로 오인하게 됩니다. ■ 12·3 내란에 대한 판결의 공백 ― 주권자는 누구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단순한 선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이 문장은 권력의 귀속을 규정하는 헌정 질서의 출발점입니다. 대통령, 국회, 법원, 군과 경찰은 모두 주권자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기관입니다. 대통령은 주권자가 아니라 주권자의 대리인입니다. 내란이란 국가 기관의 기능을 방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주권자의 권력 귀속 질서를 전복하려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12·3 사태를 규정하는 첫 질문은 이것이어야 합니다. 첫째, 누구에 대한 내란이었는가. 누가 피해자인가. 1심 판결은 군과 경찰을 동원하여 국회를 봉쇄한 행위를 중대한 헌정 질서 파괴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판결의 중심 서사는 ‘헌법기관 침탈’에 놓였습니다. 피해는 기관의 기능 마비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공화정에서 기관은 주권의 주체가 아닙니다. 기관은 주권자의 위임을 받아 존재합니다. 대통령이 군을 동원해 국회를 제압하려 한 행위는 기관 간 충돌이 아니라, 주권 위임 질서를 전복하려 한 시도입니다. 피해자는 ‘국회’가 아니라 ‘국민’입니다. 이 지점이 판결문에서 충분히 전면화되지 않았습니다. 내란은 헌법기관 기능 방해 사건이 아니라, 주권 귀속 질서에 대한 조직적 침탈입니다. 판결은 주권 침탈이라는 헌법적 언어 대신, 헌법기관 침탈이라는 제한된 언어를 선택했습니다.   12.3 내란의 밤, 국회 전경. 둘째, 판결이 찰스 1세(Charles I, 1600–1649)를 소환한 상징성입니다. 17세기 영국은 국민주권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왕권과 귀족·대지주 엘리트가 권력을 다투던 전제적 구조 속에서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그 시대의 갈등은 엘리트 권력 재편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헌정 질서는 전혀 다른 역사적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선언,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의 삼균주의(三均主義), 제헌헌법,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촛불집회로 이어지는 국민주권 형성의 축적된 경험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민주공화정은 왕권 제한의 산물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주권자임을 선언하고 반복적으로 확인해 온 역사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 역사적 맥락을 전면에 두지 않은 채 전제국가의 사례를 호출하는 것은, 대한민국 민주공화정의 주권 형성 과정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선택으로 읽힙니다. 셋째, 한국 현대사의 국민주권 역시가 제외되었습니다. 판결문에서 거의 호출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주권을 거스른 결과 4·19혁명으로 퇴위하였습니다. 전두환은 광주에서 국민을 학살한 책임으로 사형이 선고된 바 있습니다. 대한민국 현대사는 주권자에 반한 권력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평가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가득합니다. 12·3 사태는 그 연속선 위에 놓여야 합니다. 그러나 판결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중심에 두지 않았습니다. 넷째, 내란의 조직성과 장기성 문제입니다. 특검 수사에서 제시된 자료에 따르면, 노상원 수첩과 노상원의 군 수뇌부 접촉 정황은 1년여 전부터 존재하였습니다. 이는 내란의 결정이 12·3 직전에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기적·조직적 준비 속에서 진행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정황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노상원 수첩을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판결문은 내란의 의도와 목적, 준비 과정의 치밀성을 충분히 서술하지 않은 채, 상대적으로 제한된 범위에서 사건을 규정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내란이 장기간에 걸쳐 군을 동원하여 내·외환적 상황을 기획한 조직적 계획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권력 남용이 아니라 주권자 전체에 대한 체계적 침탈 기획입니다. 이 부분은 2심에서 반드시 엄밀히 다시 다루어져야 할 쟁점입니다. 마지막으로, 형량 문제도 여기서 다시 보아야 합니다. 무기징역은 중형입니다. 그러나 형량의 무게만으로 내란의 본질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민주공화정에서 내란은 기관 침탈이 아니라 주권 침탈입니다. 주권자에 대한 조직적·계획적 침탈이라면, 민주공화정은 최고 수준의 형벌로 응답해야 한다는 원칙이 성립합니다. 형벌은 개인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주권 질서를 수호한다는 헌법적 선언이어야 합니다. 무기징역은 중형이지만, 주권 침탈의 성격을 전면화하지 않은 판결은 헌법적 의미에서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결국 문제는 형량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판결이 누구의 이름으로 선고되었는가입니다. 기관의 이름입니까. 아니면 주권자의 이름입니까. 민주공화정에서 주권 침탈은 헌정 질서 전체에 대한 범죄이며, 그 형벌은 주권의 불가침성을 선언하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이 지점에서 최근 국제적 평가가 중요한 상징성을 갖습니다. 2026년 2월, 세계정치학회(IPSA) 전·현직 회장과 정치학자들은 12·3 비상계엄 사태를 평화적으로 극복한 대한민국 시민 전체”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습니다(한겨레, 2026.2.24; 코리아헤럴드, 2026.2.18). 이들은 12·3 사태를 엘리트 권력 충돌로 보지 않았습니다. 주권적 시민이 헌정 위기를 비폭력적으로 극복한 사례로 보았습니다. 이는 12·3 사태의 본질이 기관 충돌이 아니라 주권자의 헌정 수호였음을 국제적으로 확인한 사건입니다. 내란을 저지한 힘은 권력자의 자제가 아니라 시민의 결단과 저항이었습니다. 국회의원들의 행동 역시 주권자의 대표로서 헌정 질서를 방어한 행위였습니다. 그것이 곧 주권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국제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기관이 아니라 시민이었습니다. 피해자이자 동시에 헌정 질서의 수호자는 주권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민주공화정의 판결 또한 주권자를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12·3 사태는 국회 건물에 대한 범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권 귀속 질서에 대한 범죄입니다. 그리고 그 피해자는 단 하나입니다. 국민입니다. 1. 주권론 및 근대 국가 이론 ,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리바이어던』. 진석용 옮김. 서울: 나남, 2007. , 존 로크(John Locke). 『통치론』. 강정인·문지영 옮김. 서울: 까치, 2012. , 칼 마르크스(Karl Marx).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 김호균 옮김. 서울: 박종철출판사, 1995. , 막스 베버(Max Weber). 『지배의 유형』(『경제와 사회』 발췌). 이상률 옮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03. , 찰스 틸리(Charles Tilly). 『강제, 자본, 그리고 유럽 국가들 990–1992』. 이향순 옮김. 서울: 삼천리, 2010. , T. H.마샬(T. H. Marshall). 『시민권과 사회계급』. 김윤태 옮김. 서울: 나남, 2009. 2. 영국 헌정사 및 선거제도 발전 영국 권리장전(Bill of Rights), 1689.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 『영국 혁명』. 강정인 옮김. 서울: 창비, 2002. 3. 대한민국 사상사 및 헌정사 대한민국임시헌장, 1919.4.11. 대한민국헌법, 1948.7.17. 조소앙(趙素昻). 『삼균주의』(三均主義) 관련 저작 및 임시정부 헌정 구상 문헌. 신용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4. 한국 현대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 4·19혁명 관련 국가기록원 자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보고서. 촛불집회 관련 국회 및 언론 기록. 5. 판결 및 언론 보도 동아일보. 2026.2.19. 「윤석열 전 대통령 무기징역 선고」. 한겨레. 2026.2.24. 「세계정치학회 인사들, 대한민국 시민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 코리아헤럴드. 2026.2.18. 「IPSA scholars nominate South Korean citizens for Nobel Peace Prize」. 관련 보도 종합. 2026.2.25. 「윤석열 내란재판 1심 판결 평가와 내란 청산의 남은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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