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㊸]모름직이 (知不知), 나 몰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모를 뿐”을 입에 달아야 한다. 속에 속, 속 깊은 ‘ᄆᆞᆷ’ 자리에 솟는 슬기는 오직 모를 뿐이다. 모름이 샘 솟으니, 모름이 저절로다. 모름에 까닭이 있을까? 없다! 옛말을 이은 ‘모름지기’라는 말은 본디 모로매-모롬즉이-모름즉이”로부터다. 다석 류영모는 ‘모름직이’로 바꿔 불렀다. 그 뜻은 모름을 지키는 이, 모름을 곧게 가진 이다. 그이가 바로 모름지기다. ‘모름직이’로 쓰고 ‘모름지기’로 소리 낸다. 곧 ‘직이:지기’라는 이야기다. 왜 그랬을까? ‘모름직이’에서 ‘직’은 곧을 ‘직(直)’이다. ‘직(直)’이 가진 다른 뜻에는 ‘바른길(道)’, ‘바른 짓’, ‘바루다’, ‘고치다’, ‘펴다’, ‘씻다’ 등이 있다. 다석은 그런 뜻을 ‘모름직이’에 심었다. 모름을 곧게 가진 이는 아는 체하지 않는다. 저가 밝아 뚜렷이 알아차려도 오직 ‘나 몰라’다. 스스로 낮춤이요, 저를 환히 비움이요, 밑을 훅 터 뚫은 이다. 숭산(崇山, 1927~2004)은 늘 오직 모를 뿐”이라고 크게 으르렁했다. 밑 없이 뻥 뚫린 그 자리가 가장 높은 마루다. 오직 모를 뿐이니, 그저 있는 그대로 하면 된다. 오직 할 뿐이다.
열쇳말: 모름직이 – 알앓이 - 밝없(無明) - 나 몰라 - 빟 앎
#1. 모름직이: 거룩한 모름
모름
너는 있고 나도 있다. 네가 있어 너를 가리고 내가 있어 나를 가린다. 너와 내가 있으니 꽉 막힌 돌벽이다. 너와 내가 없어도 꽉 막힌 돌벽이다. 뵈어 나지 않고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데 ‘너나’ 한꼴(一切)이면 ‘비(虛:無)’이다. 까닭은? 오직 모를 뿐이다. 있든 없든 ‘쪽꼴(相對)’로 나누는 ‘~와/~과’를 쏙 빼야 한다. 그것이 벽이다. 다석은 너나·없:비롯(始無始)”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모름지기를 ‘마땅히’라는 뜻으로 쓴다. 다석은 ‘모름(不知)’으로 이어서 전혀 새로운 알맞이 말로 탈바꿈시켰다. 앎은 ‘안다’는 잘난 체가 아니다. 업신여기지 말아야 한다. ‘없’이 여겨야 한다. 모름직이는 마땅히 모를 수밖에 없는 ‘비(虛)’에 서는 것이다. 늙은이는 71월에 씻어난이의 탈않남이란 그 탈을 탈ᄒᆞ므로, 이래서 탈않남.”이라 하였다. 모름직이는 앎을 밀어내는 게 아니다. 알아가는 앎은 ‘끝이 있다’는 걸 깨닫고 오히려 더 큰 참으로 넘어가는 일이다. 그 자리가 슬기슬기로 넘어가는 구름발치다.
탈
조금만 알아도 앎을 내세워 잘난 척하고 또 자랑질이다. 늙은이는 71월에 모르고, 담 탈이다.”라고 꾸짖었다. 맘 닦는 과정에서 가장 털어내기 힘든 ‘갇옷(囚衣)’이 바로 ‘아는 체’다. 씻어난 이는 앎을 제 것으로 삼지 않는다. 노자 늙은이는 뒤이어 그저 오직 탈을 탈ᄒᆞ면, 이래서 탈않난다.”라고 하였다. 아는 체하는 탈을 뼈저리게 알아차리고 아파할 때, 비로소 그 탈에서 놓여나 모름직이에 다다르리라. 탈을 탈해야 속에 탈이 안 난다. 다석은 ‘탈않난다’라고 했다. 이때 ‘안’을 ‘않’이라 한 까닭은 ‘안(不)’이고, ‘안(內)’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본디 속은 ‘않’이라 해야 옳다. ‘안팎’은 ‘않+밖’이지 않은가!
낮춤
뚜렷이 알아차린 뒤에도 ‘나 몰라’ 하고 뒤물러, 스스로 뒷자리에 머무는 것이 썩 좋다. 뒤물러 섰다고 해서 겁내는 것 아니고, 도망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머무는 그 자리가 고디(貞) 세운 자리다. 곧이 곧게 고디다. 몬(物)에 ‘비(虛)’로 앗숨 튼 자리다. 제나(自我)에 새긴 앎 따위로 얼나(靈我)가 내비치는 신비를 가둘 수 없다는 낮은 선언이다. 마음이 맑고 시원하다고 자꾸만 그 마음을 붙잡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흘러가게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없이 먹구름이다. 깨달음조차도 제 것이 아니다. ‘씻어난이(聖人)’ 몸가짐은 늘 그렇다. ‘나 몰라’ 하고 숨김없이 말하는 찰나에 ‘모신 하나님(侍天主)’이 깨끗이 솟는다. 저절로에 스스로가 오롯하다. 그러니 참으로 오직 모를 뿐이다. 서슬 퍼런 날 위에 모름이 우뚝하다. 홀로 신 내고 신 낳는 춤을 추리라. 신났다! 신낳다!
신비
이 땅에 두루 번진 알음 앎으로 다다른 곳은 어디일까? 다다른 자리가 끝일까? 늙은이는 1월에 이를 만 ᄒᆞᆫ 이름이 늘이름 아니오라.”라고 했다. 또 이름 없에 하늘 땅이 비롯고, 이름 있에 잘몬의 어머니.”라고 하였으니, 결국 다다를 수 있는 끝 너머에 ‘이를 만 ᄒᆞᆫ 이름’ 없는 ‘없이 계신 님’이 두루두루 곳곳이리라. 그 자리마다 신비겠고. 그래서 1월에 이를 ‘야믊(妙)’이라 했다. 야무지게 야물어 여문 참(眞)은 머리로 깨는 게 아니다. 온몸으로 여물어야 그 야믊이 뵈고,”, 또 그 도라감이 뵈와라.”이다. 모름직이는 이 야무진 신비 앞에서 홀로 침묵하는 일이다. 알아도, 아니 모름을 아는 것이 으뜸인 까닭은 말로 우주를 다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앎이 깊어질수록 모름은 더 깊어지리라. 나 몰라야 우주 바깥을 노래할 수 있으리라.
그림1) 경허(鏡虛, 1849~1912) 선사다. 그이는 여사미거마사도래(驢事未去馬事到來)”를 말머리로 동학사 골방으로 들어가 세상을 끊고 꿍꿍에 힘썼다. 나귀 아직 안 갔, 말 벌써 왔.”이라는 뜻. 가고 온다. 그 가온에 ‘지금’을 찍어야 한다. 가고(去) 오고(來)에 ‘지금 여기’가 없다. 그러니 가고 옴이 ‘헛’이다. 그런 와중에 도우무이공처(到牛無鼻孔處)”라는 말을 듣고 깨달았다. 소 코뚜레 꿸 자리 없.”이라는 뜻.
경허 선사 읊이(詩)다.
세여청산하자시(世與靑山何者是)
춘광무처불개화(春光無處不開花)
방인약문성우사(傍人若問惺牛事)
석녀심중겁외가(石女心中劫外歌)
세상 따른 푸른 뫼 무엇?
봄빛 없곳에 안 핀 꽃 없.
곁사람 깬 소 일 묻거든?
돌계집 ᄆᆞᆷ속 때밖 노래.
- 경허(鏡虛, 1849~1912)
여(與): 베풀다, 따르다, 돕다, ~와, ~과.
하자시(何者是): 무엇인가? 옳은가?
무처(無處): 없곳, 어디에나
불개화(不開花): 안 핀 꽃, 꽃이 안 핌
방인(傍人): 곁사람
성우(惺牛): 깬 소, 경허(鏡虛)
겁(劫): 천지개벽에서 다시개벽까지 때, 끝없는 때, 긴긴 때.
‘~와’를 넣으면, 세상과 푸른 뫼, (무엇이) 옳으냐?”일 터인데, ‘~와(與)’를 ‘따름(與)’으로 바꾸어야 한다. 세상 따른 뫼, (그리 보는 게) 무엇이냐?”로 볼 수 있다. 세상 따로 뫼 따로 보는 게 무엇이냐는 뜻이다. 이쪽저쪽이 아니라, ‘보는 눈’이다. ‘없곳(無處)’는 ‘곳’이 없어 ‘어디에나’다. 그런데 뒤이어 ‘안 핀 꽃(不開花)’이 따로 붙는다. 그 앞 ‘없(無)’은 ‘곳’에 붙고, ‘안 핀 꽃’에도 붙는다. 그래서 없곳에 안 핀 꽃 없.”이 된다. 풀어 말하면, 봄빛 어디에나 안 핀 꽃이 없다.”이다. 곳곳에 꽃이 다 피었다는 것. 돌계집-낳없-없에 남, ᄆᆞᆷ속-바탈(빈탕에 얼빛)-산알 자리, 때밖-때 뛰넘(超越), 노래-소리-울림.
경허성우(鏡虛惺牛)는 석녀심중겁외가(石女心中劫外歌)”라 하였다. 풀어 말하면, 돌계집 마음 가온에 긴긴 때 바깥 노래라. 한마디로 ‘ᄆᆞᆷ’이렸다. 여율(呂律)이다. 그이 경허는 돌계집이요, 그런 돌계집 ᄆᆞᆷ속 가온에 때를 뛰넘어 선 노래가 있으니, 천지개벽에서 다시개벽까지 그 긴긴 때조차 넘어선 바깥에서 부르는 노래다. 긴긴 때를 훌러덩 벗어 던졌으니 때가 어디 있으리오. 없는 그 자리가 바깥이다. 돌계집 ᄆᆞᆷ속이다. ‘ᄆᆞᆷ속’은 빈탕이니, 돌계집은 곧 빈탕이다. 가고가고 오고오는 오가는 가온(中) 자리다. 안팎이 하나로 돌아가는 그 자리에 노래 하나가 울려 퍼지고 있다. 들리는가? 없는 귀에 뚫린 마음(無耳孔心)이요, 없는 코에 뚫린 마음(無鼻孔心)이요, 없는 맘에 뚫린 ‘ᄆᆞᆷ’이다(無心孔心). 모를 일이다.
빟(虛)
참 앎이란 속에 들어찬 ‘알’을 비워 ‘빈탕한데’라는 ‘빟’로 돌리는 것이다. 사람 뜻으로 할 수 없다. 알이 영글어 무르익어야 한다. 그래야 가지에서 뚝 떨어진다. 썩어 문드러진다. 그 자리에 ‘밝’ 씨알이 환하다. ‘빈탕한데’는 빈탕 한 가온데 숨 돌리는 가온찌기다. 찍었으니, 찌기/지기로 지킨다. 가온에 ‘하늘아’를 찍고 줏대 세운 씨알은 앎에 짓눌리지 않는다. 일을 이루고도 자취를 남기지 않듯, 앎이 알알이 무르익어도 ‘모름’을 벗어나지 않는다. 모름직이를 실제로 행하는 이는 자취 없는 바람처럼, 걸림 없는 물처럼 세상을 이롭게 하되 결코 저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이 스스로를 비우는 슬기슬기다.
#2. 알앓이: 깨어남
앓이
보통 무언가 배우고 익히는 것을 즐거운 나날 이룸이요, 나날 나아감으로 여긴다. 그런데 다석철학에서 알아가는 날들은 ‘앓이’다. 알음앓이다. 쓰고 아픈 날들이 배어든다. 알음앓이에 알음알이가 열린다. 다석이 ‘므름-브름-프름’이라 했듯이, 므름을 불리는 긴긴 브름은 말머리(話頭)에 코 뚫린 코뚜레 낀 꼴로 질질 끌려다닌다. 말머리에 탈 난 꼴이다. 말머리에 사로잡혀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끙끙 앓는다. 이 약 저 약을 따 써봐도 낫지를 않는다. 말로는 ‘모름직이’를 말하고, 생각으로는 ‘마음(맘)’ 따위가 헛짓인 걸 알아도 도무지 놓여나질 않는다. 누군들 왜 모르겠는가. ‘말을 세우지 말라(不立文字)’고 하지 않았나. 그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할 뿐이다. 그런데도 할! 마음도 없다! 마음이란 놈은 거짓이다! 그놈을 꺼내 보아라!” 따위가 도사린 ‘아는 체’는 탈이다. 몸부림에 얼부림이다. 이것이 알음앓이다. 앓지 않고 깰 수 없다. 버리고, 납작 업드려야 하리라.
아는 체
조금조금, 다시 조금 하다가 그야말로 조금에 이르면 높낮이 없는 때에 이른다. 만조 때에 간조 때가 하나다. 므름에 브름이 범벅 뒤범벅으로 내내 휘돌다가 삽시간에 맑고 맑은 프름이 펼쳐진 그 자리가 정동일여(動靜一如)다. 프름을 제 것이라고 붙잡지 않으니 자나깨나 ‘있는 그대로(一如)’다[정동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宿眠一如)는 성철 스님이 한 말이다]. 노자 늙은이는 닦아남을 좋이지 말아서, 씨알이 다투지 않게.”라고 했다. 그러면서 늘 씨알이 앎이 없게, ᄒᆞ고ᄌᆞᆸ이 없게, ᄒᆞ이금.”을 덧붙였다(작은 글씨는 뺌). 다석은 이때 앎이란 ‘못된 앎’이요, ‘못된 ᄒᆞ고ᄌᆞᆸ’이라고 했다. 까닭은, 좀 닦아서 뭘 안다고 헛짓 꾸미는 이를 조심하기 위해서다. ‘헛짓’이란, 앎으로 남 위에 서려는 모든 짓거리를 말한다. 알앓이는 바로 이러한 탈을 똑바로 보는 일에서 비롯된다. 아는 체하는 탈을 탈해야 탈이 낫는다.
쓴 탈
알앓이로 알음앓이 길에 지름길이 하나 있다. 가지려는 제 뜻을 뚝 꺾어버리는 것이다. 깊이 생각하고 꿍꿍하면서 깨달아가려는 마음 따위를 아예 싹 뚝 잘라내야 한다. 앎을 이루려는 그 어떤 마음도 필요 없다. 이것저것 알아차려서 좀 안다고 자랑하면 얼간이다. 앎이 깊어질수록 ‘나 몰라’에 머물러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 것이라 내세우지 않고 뒤물러서야 뵈어 난다. 뒤물러 나야 보인다. 제나는 ‘저’를 뒤물리는 일이 쓰고 쓴 아픔이겠으나, ‘저’를 붙잡으면 도루묵이다. ‘저’는 크게 죽어야 한다. 쓴(苦) 탈(病)을 탈하는 일은 죽음에 이르는 아픔이다. 앓고 앓아서 쓴 아픔을 싹 다 비워낼 때 앎은 비로소 그 너머에 이르리라. 알이 알알이 영글어 단이슬(甘露)로 풀리리라. 그러니 좀 깼다고 붙잡고 있는 얄팍한 ‘깨달음’조차도 씻어내 버려야 한다.
얼눈
왜 앓아야만 할까? 내가 내 속에 속속들이, 속 깊고 속 깊은 속으로 들어가 ‘얼눈(靈眼)’ 뜨지 못하기 때문이다. 깊깊은 속에서 얼눈 떠야 바로 본다. 앓이는 속으로 파고드는 오직 한 길이다. 몸에 붙은 두 눈과 좀 안다고 깝죽대는 ‘알눈(識見)’으로는 참꼴(眞身)을 볼 수 없다. 알앓이로 진통을 겪으며 제나가 산산이 부서져 내릴 때, 내 속 깊은 속에 ‘얼눈’이 떠진다. 얼눈이 떠지면 두 눈에 ‘한눈(佛眼)’이 크게 열린다. 하나로 뚫린 눈이요, 빈탕을 꿰뚫는 눈이다. 안팎 없이 온 우주가 다 뚫려 환하다. 그러니 ‘앓이’는 온갖 몸맘얼 군더더기를 다 태우고 태워서 ‘깨끗’에 이르는 불꽃이리라. 이 불꽃 속에서 세속 앎은 재가 되고, 오직 하늘 말씀인 ‘말숨’만이 남게 되리라. 그러므로 앓이는 짐승으로 산 때에서 그저 ‘늘길’로 이끄는 산통(産痛)이지 않을까. 앓이가 깊고 깊을수록 얼눈은 더욱 크게 밝으리라.
그대로
앓이 끝은 더 이상 앓지 않는 ‘그대로’다. 있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다. ‘있없’ 따위에 매이지 않는 그대로다. 앓음을 앓음으로 앓아났기에 이제 앓지 않는다. 아는 체를 탈로 알아 그 탈을 탈하니 탈 안 나리라. 앓고 앓아 앓아낸 이는, 이제 앎이 손짓하는 꾐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이는 알아도 안다 하지 않고, 몰라도 모른다 하지 않는 ‘모름직이’에 머문다. 이는 ‘앎몲’이 가온에 하나로 녹아든 알몸이다. 맨몸이요 맨이다. 맨은 궁궁(弓弓)이니 한 둥긂(一圓)이요, 위없는 슬기슬기다. 가없고 밑없고 끝없는 ‘빈탕’이리라. 휑하고 텡하다. 그 자리에 새갈마노(東西南北)가 어딨으며, 이저(此彼) 따위가 어딨으리오. 그런 뒤에야 ‘ᄆᆞᆷ’이 뵈는 법이다. 다석은 ‘맘’과 ‘ᄆᆞᆷ’을 가려서 썼다. ‘ᄆᆞᆷ’은 그저 있는 그대로 돌아가는 땅하늘∞하늘땅에 산알 숨이 있을 뿐이다. 텅 비어 빈 빈탕에 오롯한 숨이다. 앓이를 끝낸 씨알은 오직 삶 하나로 참을 밝힌다. 앓이는 거룩하다. 앓이를 온몸으로 겪어내야 거듭난다.
그림2) 경허 법맥을 이은 만공(滿空, 1871~ 1946)이다. 만공(滿空)은 법호, 실제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수월(水月), 혜월(慧月)과 함께 ‘경허의 세 달’이라 불린다. 끝해에 그이는 예산군 덕숭산 전월사에 있었다. 마지막 공양 뒤 거울을 보며 이 사람 만공! 일흔 해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고생했지. 그동안 수고 많았네?”를 남기고 열반에 들었다.
만공 스님 이야기다.
스님이 스물다섯 살 되던 을미년(1895) 7월 25일에 동쪽 벽에 의지하여 서쪽 벽을 바라보던 중 홀연히 벽이 공(空)하고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계속해 오던 의심을 조금도 흩뜨리지 않고 하룻밤을 지내던 중 새벽 쇠송(鐘頌)을 할 때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를 외다가 문득 법계성(法界性)을 깨달아 화장찰해(華藏刹海)가 홀연히 열리니, 기쁜 마음이야 무엇에 비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吾道頌)을 읊었다.
공산이기고금외 空山理氣古今外
백운청풍자거래 白雲淸風自去來
하사달마월서천 何事達磨越西天
계명축시인일출 鷄鳴丑時寅日出
빈 뫼 올숨 옛이제밖,
흰구름맑바람절로가와.
무슨일달마갈하늘뛰넘?
닭우니두때셋에해돋이.
풀어 말하면, 빈 뫼 올숨이 옛이제밖이니, 흰 구름 맑은 바람이 저절로 가온다. 무슨 일로 달마는 갈하늘 뛰넘는고, 닭우니 두 때요 셋에 해 솟는다. 빈(空)-뫼(山)-올(理)-숨(氣)은 하나하나가 큰 뜻이다. 빈뫼는 빈자리요, 올숨은 한꼴이요, 그런 한꼴이 옛이제밖이다. 큰 뜻이 예부터 이제까지 왔으나, 만공은 그 ‘밖(外)’에 섰다. 그 밖이 곧 ‘겁외(劫外)’일 터이다. 긴긴 때 밖에 서 보니, 또한 있는 그대로 흰 구름 맑은 바람이 저절로 가온다. 이때 ‘자(自)’를 스스로라 하면 안 된다. 스스로는 ‘있꼴(有形)’이요, 저절로는 ‘없꼴(無形)’인 까닭이다. 그 자리가 법계성(法界性) 자리다.
그러니 물을 수밖에. 무슨 일로 달마는 갈하늘을 뛰넘었는고?” 동서남북은 우리말로 새갈마노다(샛바람 갈바람 마파람 높바람). 서천(西天)은 갈하늘이다. 이때 서천은 서역국(西域國)으로 인도를 뜻한다. 그렇다고 갈하늘이 인도는 아니다. 그저 본디 있어 온 자리다. 다석은 있다시 온”이라 했다. 본디 자리로 여래(如來)라 할 것이다. 닭 울음을 뜻하는 계명(鷄鳴)은 새벽별(雞鳴星)이요, 깨달음 소리요, ‘밝없(無明)’ 깨는 소리다. 축시(丑時)는 새벽 1시부터 3시까지다. 첫 닭이 울 무렵이니 계명(鷄鳴)이다. 스승 경허는 코뚜레 ‘없’에 깨달았다. 축(丑)은 둘이요, 소다. 인(寅)은 셋이요, 범이다. 셋때, 셋에 해가 돋았다. 경허를 이은 만공이지 않은가! 만공은 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