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과 정체성 강요하는 사회… 흐름 을 받아들이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로랑스 드빌레르 파리카톨릭대 철학과 교수 사진= 피카 출판사
로랑스 드빌레르(Laurence Devillairs)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 철학자이자 교육자이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비롯한 고전 철학 연구로 학문적 성취를 쌓아왔으며, 2022년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 교수’로 꼽혔다. 그러나 그를 오늘의 독자에게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학문적 이력보다도, 철학을 다시 삶의 언어로 되돌려 놓았다는 점이다.
드빌레르의 철학은 설명보다 질문에 가깝고, 이론보다 태도에 가깝다. 그는 철학을 문제 해결의 기술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모든 삶은 흐른다』는 그 철학적 태도가 가장 응축된 책이다.
흐른다”는 말의 철학적 무게
『모든 삶은 흐른다』라는 제목은 언뜻 단순해 보인다. 누구나 삶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빌레르가 말하는 흐름”은 변화에 대한 상식적 인정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이해하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철학적 전제다.
우리는 흔히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사고라고 생각한다. 본래는 안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불가피하게 흔들리는 상태. 그래서 변화 앞에서 우리는 늘 조급해지고, 다시 제자리를 찾으려 애쓴다. 드빌레르는 이 전제를 근본에서부터 의심한다. 삶은 본래 고정된 상태가 아니며, 안정은 예외적 순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흐름은 삶의 조건이지, 위기가 아니다. 이 관점은 인간의 고통을 전혀 다른 자리로 옮겨 놓는다. 고통은 변화 때문이 아니라, 변하지 않으려는 집착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변하는 자신을 실패로 오해하고, 흔들리는 삶을 잘못된 경로로 착각한다. 그러나 드빌레르는 말한다. 삶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이 멈춘 상태일지 모른다고.
모든 삶은 흐른다.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이주영 옮김. 피카(FIKA)
이 책이 특히 날카로운 지점은 현대 사회가 삶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이해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를 통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간다. 인생 설계, 커리어 관리, 노후 준비라는 말들은 삶이 관리 가능한 대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드빌레르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인간을 끊임없는 불안 속으로 몰아넣는다고 본다. 프로젝트는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획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곧바로 ‘낙오자’가 된다.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는 구조를 의심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비난한다.
『모든 삶은 흐른다』는 이 사고방식에 제동을 건다. 삶은 완성해야 할 작품이 아니라, 끝까지 열려 있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어떤 순간도 최종적이지 않으며, 어떤 실패도 결정적이지 않다. 이 관점은 단순한 위안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의 전환을 요구한다.
불안은 제거할 문제가 아니라 동반자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주제는 불안이다. 현대인은 불안을 병처럼 취급한다. 불안은 관리해야 하고, 통제해야 하며, 가능하다면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드빌레르는 이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에게 불안은 삶의 오류가 아니다. 불안은 우리가 여전히 미래를 살고 있다는 증거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면 불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불안은 우리가 아직 희망하고, 아직 두려워하고, 아직 잃을 것이 있다는 신호다. 문제는 불안 그 자체가 아니라, 불안과 동일시하는 태도다. 불안한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는 그것을 곧바로 현실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되면 끝이다”, 나는 실패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곧 진실이 된다. 드빌레르는 이 지점에서 철학의 역할을 제시한다. 생각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는 것, 감정이 곧 ‘나’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 이는 단순하지만 매우 어려운 훈련이다.
『모든 삶은 흐른다』는 체념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드빌레르는 흐름을 받아들이라”고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삶의 성숙은 통제의 범위를 정확히 구분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종종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소진시킨다. 타인의 평가, 미래의 결과, 사회의 구조, 우연한 사건들. 반면 정작 통제할 수 있는 것들―태도, 선택, 반응―에는 무관심하다. 드빌레르는 철학의 역할을 바로 이 지점을 분별하는 데서 찾는다. 삶을 흐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싸움을 멈추는 일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진짜로 책임질 수 있는 자리로 돌아온다.
모든 삶은 흐른다 의 저자, 프랑스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Laurence Devillairs). 사진=피카 출판사
정체성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드빌레르는 ‘정체성’에 대한 집착 역시 비판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정의하는 데 익숙하다. 직업, 성격, 역할, 과거의 선택들로 자신을 설명한다. 이러한 정의는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삶을 가둔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은 변화를 거부하는 문장이 되기 쉽다. 드빌레르는 인간을 하나의 고정된 성격이나 본질로 환원하는 사고를 경계한다. 사람은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이며, 각 국면마다 다른 자신을 살아낸다. 이 관점은 특히 나이 듦, 실패, 전환의 시기를 통과하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한때의 자신으로 현재를 재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과거의 정의가 미래의 가능성을 봉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흐름의 철학이 주는 해방이다.
이 책이 자기계발서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빌레르는 독자에게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덜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라고 말한다.
그의 철학은 성취의 윤리가 아니라, 존재의 윤리에 가깝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애써왔고, 충분히 견뎌왔으며, 충분히 살아왔다. 삶이 흐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지금의 자신을 실패한 존재로 보지 않는 일이다.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책
『모든 삶은 흐른다』가 궁극적으로 요청하는 것은 하나의 신뢰다.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신뢰,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신뢰, 지금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신뢰. 이 신뢰는 맹목이 아니다. 오히려 삶의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인정한 뒤에야 가능한 태도다. 드빌레르는 말한다. 삶을 완전히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덜 두려워질 수 있다고.
『모든 삶은 흐른다』는 읽고 나서 즉각적인 변화를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독자의 사고 속에 오래 머문다. 삶이 흔들릴 때, 계획이 무너질 때, 불안이 밀려올 때 이 문장이 떠오른다. 삶은 원래 흐른다.
이 한 문장은 삶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지만, 불필요하게 무겁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 차이가 이 책의 힘이다. 빠른 답을 요구하는 시대에, 느린 시선을 건네는 철학. 로랑스 드빌레르는 그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말한다. 멈추지 않아도 괜찮고, 완성되지 않아도 괜찮으며, 흐르는 채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