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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엔 늘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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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사후 세상은 그를 ‘뒷것’이라는 이름 아래, 성자 급의 ‘어른’으로 각인했다. 뒤에서 가꾸고 키우는 이의 희생과 헌신을 부각했다.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거목’의 서사는 ‘청년 김민기’를 그 그늘 속에 가렸다. 그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망, 더 낮은 곳을 향한 의지, 더 따듯한 세상을 향한 열정, 고통과 슬픔에 대한 신비로운 감수성, 이웃에 대한 애정으로 똘똘 뭉친 청년이었다. 몸은 늘 뒤에 있었지만, 당대의 문제를 푸는 시작엔 늘 그가 있었던 건 그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한국 포크’의 시작에도, 프로테스트 포크와 민중가요 운동 그리고 마당극의 시작에도, 음악극과 노동 문화운동의 시작에도 그가 있었다. 약관에 전설이 된 김민기의 ‘불온하면서도 순수했던 청년’을 따라가 본다. ‘청년 맑스’가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시대가 있었다. ‘청년 김민기’가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그런 계기가 되기를, 외람되게도 기대한다. (편집자 주) 시작엔 늘 그가 있었다 김민기의 음악적 삶을 관통했던 게 하나 있다. 몸은 뒤에 있었지만, 시작엔 늘 그가 있었다. ‘한국 포크’의 시작에도 그가 있었고, 싱어송라이터 흐름을 열어젖힌 것도 김민기였다. 서양 음악 구조에 전통적 음악 요소를 접합한 ‘한국 포크 운동’을 시작한 것도 그였다. 음악의 민족적 형식을 찾기 위한 시도의 시작에도 그가 있었고, 그 결과 출현한 마당극의 첫 작품도 그와 함께 탄생했다. 단형의 노래에서 벗어나 서사적 형식의 노래 출현에도 그가 있었고, 굿과 서구의 뮤지컬을 결합한 한국적 음악극의 탄생에도 청년 김민기가 있었다.   20004년 김민기의 작품을 소개한 책. 출판기념회에서 그가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출처: 연합뉴스  이른바 민중음악도 그와 함께 시작했으며, 민중음악의 대중화도 그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가 시작한 소극장 콘서트는 방송사들의 정규 음악 프로그램으로 확장됐고, 이를 통해 싱어송라이터들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획기적으로 확장됐다. 그 연장에서 탄생한 것이 ‘김광석 콘서트 1000회 공연’이었다. 한국 공연 예술계가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소극장 뮤지컬을 시작한 것도 그였고, 본격적인 어린이 청소년 뮤지컬을 시작한 것도 그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공연 예술계에선 처음으로 공정계약서를 도입한 것도 그였다. 그리하여 그의 연기자들은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연기에 열중한 덕에 한국 공연 예술계의 수준을 두세 단계 높인 준봉이 되었고, ‘방화 1천만 관객 시대’ ‘소극장 콘서트 전성시대’ 등을 연 ‘별’이 되었다. 생전 그 앞에서 ‘원조’ 운운하려 했다면, 그와 절연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평소 말수가 적은 그였지만, ‘쓸데없는 소리’라는 말만큼은 자주 했던 그의 입에서 이 날벼락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별로 닮은 데가 없지만, 그 어투만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비슷했다. 특히 ‘한국 포크의 원조’ 같은 불편한 화제에서 그를 주인공으로 삼는다면 그가 아무리 좋아하는 맥주가 박스로 쌓여 있어도 그는 자리를 박찼을 것이다. 마이크를 대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그의 목소리였지만, 아주 가끔은 ‘버럭’ 하기도 했다. 그러나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이 주제의 논의는 사실 이미 오래전 말끔하게 결론이 났다. 이른바 ‘한국 포크’의 원조가 김민기라는 데 우리 대중음악계는 이론이 없다. 포크란 민요에서 출범한 것인 만큼, 포크엔 나름의 국적이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우리 가요계에는 서양의 포크송이 팝송과 함께 밀려 들어왔다. 음악다방 ‘쎄시봉’은 확산의 진원지였고 서유석, 송창식, 윤영주, 조영남, 김세환 등은 그 주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 신세대 가수들이 부른 포크는 기껏해야 외국 특히 미국 포크의 가사만 우리 식으로 번안한 게 고작이었다. 한국 포크가 아니라 ‘미국 포크’라고 해도 무방했다. 트로트가 있었지만, 일본이 서양 음악의 단음계를 토착화한 화성과 구조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한국의 정서와 이야기, 음악적 전통이 포함된 것도 아니었다. 이런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1970년 김민기의 ‘친구’가 동양방송 피디이자 음악프로 진행자 이백천에 의해 발견돼 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충격을 먹었다. 이어 ‘아침이슬’ ‘그날’ ‘아하, 누가 그렇게’ ‘꽃 피우는 아이’ 등 김민기의 자작곡 포크가 잇따르면서 뿌리째 흔들렸다. 가객들은 너도나도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뛰어들고, ‘번안 포크’ 시장은 흔들렸다. 말없이 풍운을 몰고 온 그런 김민기를 눈여겨보던 또 다른 이가 있었으니, 경음악 평론가이자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인 최경식 CBS 피디였다. 그는 1971년 9월 김민기의 노래들을 모아 독집 앨범 제작에 나섰다. 김민기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던 것이었다. 최경식은 선곡하고, 밴드를 구하고, 음반사를 섭외하고, 녹음을 지휘하고, 자금까지 마련해 발매한 것이 김민기의 1집 ‘김민기’이었다. 머잖은 훗날 한국의 대중음악계가 ‘한국 포크’의 효시로 인정한 앨범이었다. 그로부터 선후배 포크 가수들은 노래를 짓고 직접 부르기 시작했다. 송창식을 비롯해 윤형주, 서유석, 이장희 등이 앞장섰고 김도향, 양병집, 방의경, 김광희, 현경과 영애, 한돌 등이 ‘한국 포크’의 싱어송라이터 대열에 뛰어들었다. 싱어송라이터만으로 보면 김민기에 앞서 한대수나 이필원 등이 있었다. 특히 한대수는 1969년 ‘쎄시봉’ 가수들과 함께 선 남산드라마센터 무대에서 자작곡을 발표했다. 그의 히피 스타일 노래들은 당시 한국적 정서와 어울리지 못했고, 그는 군에 입대했다. 그가 당대의 이야기, 당대의 시대상을 노래한 포크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4년이 되어서였다. 1972년 김민기는 문화의 새로운 민족적 형식을 모색했던 김지하와 ‘폰트라’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인 ‘한국 포크 운동’에 나섰다. 서유석이나 한돌 등 당시 선배 및 후배 포크 가수와 연주자가 함께 주도한 맷돌 공연이 그것이다. 당시 그는 본의 아니게 박정희 정권에 찍혀 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면 개개의 노래가 아니라 가수 한 사람 전체가 ‘금지 대상’이 된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맷돌 공연 참가자들은 전통 가락과 장단, 민요나 노동요 그리고 정가의 요소까지 두루 포함한 노래를 직접 짓고 불렀다. 이 공연은 비록 두 번으로 끝났지만, 전통 장단과 멜로디를 서양 음악과 접목해 ‘지금 여기’ 우리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또 드러내려 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두 번째 공연에는 양희은, 서유석, 송창식, 한돌, 김도향, 4월과 5월 등 당시의 대표적인 가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공장의 불빛’은 문화적 이정표 마당극의 시작에도 그가 있었다. 그는 닫힌 무대의 극이 아니라 열린 마당의 극, 연기자와 관객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가는 극, 노래와 무용과 서사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형식의 극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1974년 초 무대에 올린 소리굿 ‘아구’가 그것이었다. 음악적 형식의 굿이라는 뜻의 ‘소리굿’은 그가 작명한 것이었다. ‘아구’는, 197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를 휩쓸면서 저항운동의 문선대 구실을 했던 마당극의 효시가 되었다. 지금도 마당극은 한국적 연희 양식으로 굳건하게 맥을 유지하고 있다. 1978년 그야말로 땅속 저 깊은 곳에서 완성한 음악극 ‘공장의 불빛’은 그야말로 ‘문화적 이정표’였다. 공연 예술 각 장르에서 이전의 것들을 깨고 새로운 것의 탄생을 알리는 분기점이었다. 노래만으로 서사 구조를 완성한 음악극의 효시이며, 처참했던 노동 현장을 예술적으로 재현한 노동 문화운동의 시작이었다. 당시 파시스트 체제의 억압이 집중됐던 노동 현장에는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노동자는 소모적인 기계였을 뿐이었다.   2004년 10월 발매 기념 쇼케이스에서  수록곡을 공연하고 있는 모습. 출처: 연합뉴스 음악극을 구성하는 개개의 노래들은 노동자의 노래가 되었으며, 노래들로만 이루어지는 전체 작품은 당대의 모순을 드러내고 당대의 꿈을 대변하는 서사였다. 이 가운데 ‘이 세상 어딘가에’ ‘두어라, 가자’ 등의 노래는 민중가요의 전형이 되었다. 카세트테이프에 수록해 배포하는 방식은 노래의 유통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왔고, 테이프에 담긴 노래 반주에 따라 누구나 노래극을 제작할 수 있도록 해 노동자들의 황폐화한 삶에 문화의 싹을 심었다. ‘공장의 불빛’ 이후 대학 노래패들은 민중가요와 노동가요의 창작에 박차를 가해, 1980년대를 변혁의 가요 무대로 만들었다. 민중가요의 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민중가요의 대중화에도 그가 있었다. 그는 1980년대 초중반 저항의 현장에서 분출했던 노래들과 거리의 노래꾼들을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제작했다. 이때 참여했던 꾼들은 훗날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결성해 ‘민중’과 ‘대중’의 가교로 역할 했다. 어린이 청소년 뮤지컬이나 연극이 하나의 장르로 정착하는 데도 그가 있었다. 그의 시도가 있기 전 한국의 문화 지형에는 ‘어린이 청소년’이 없었다. 이들은 오로지 진학과 취업 준비에 영혼을 갈아 넣어야 했다. ‘문화’란 그런 아이들의 장래를 훼방 놓는 것일 뿐이었다. 그들이 즐길 거라곤 정체불명의 팝송이나 사랑 타령뿐이었다. 그런 풍토에서 김민기는 ‘개똥이’ ‘아빠 얼굴 예쁘네요’ ‘연이의 일기’ 등 어린이 뮤지컬이나 음악극을 작곡하고, 무대에 올리기 위해 기를 썼다. 또 훗날 학전 시절 어린이 청소년 연극에 자신의 역량과 자산을 모두 쏟아부었다. 소극장 ‘학전’의 개관과 함께 시작한 ‘소극장 콘서트’는 대형 무대 중심의 한국 대중음악계의 풍토를 뿌리부터 바꿨다. 1990년대 들어 한국의 대중음악은 자본이나 방송 등 ‘큰 손’에 장악됐다. 상업성이 검증된 가수와 노래들, 자본이 받쳐주는 가수나 노래만이 우대를 받았다. 디지털 전자기기의 기계음과 댄스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자신만의 음악 세계에 천착하고자 하는 싱어송라이터, ‘인디 음악인’들은 설 자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들에게 무대를 주고, 각자의 음악 세계를 펼쳐 보일 수 있게 한 게 김민기였다. ‘큰 손’에서 독립해 자신과 시대를 이야기하려던 이들의 정신은 오늘날 ‘K-팝’의 정체성이 되었고, 그 위에서 ‘K-팝’의 신화는 싹트고 성장했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교로운 것은 시작엔 언제나 그가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도 그의 출연을 막지 않고 오히려 그의 출현을 간절히 요청했지만, 그는 여전히 햇살 혹은 스포트라이트 아래에선 볼 수 없었다. 양희은이 일찍이 그에게 ‘석구’라는 별명을 줬다. ‘구석’을 뒤집은 말이다. 그는 노래를 시작할 때부터 고집스럽게 조명이 비치지 않는 곳에 머무르려 했다. 30년 이상 지나 ‘학전’ 대표 시절 ‘뒷것’을 자호로 삼았지만, ‘석구’에서 ‘뒷것’으로 이어지는 그의 삶은 변한 게 없었다. 물이 그러하듯이 그는 언제나 저를 아래에 두었다. 저를 자양분 삼도록 했고, 저의 등과 어깨를 내밀어 뛰고 날게 했다.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성인은 자신을 뒤에 둠으로써 앞선 이가 된다.”(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7장) 강과 바다가 모든 산과 계곡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선함을 아래에 두기 때문이다.”(江海 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도덕경 6장) 저를 ‘성인’이라 한다면 생전의 김민기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속된 곳을 떠나버렸으니, 이런들 저런들 누가 뭐라고 한들 무슨 상관이랴. 용기를 내어 한마디 더 하자. 노자가 말한 이런 덕성은 ‘물’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도덕경 8장)다. 삼척동자도 아는, ‘가장 훌륭한 것은 물과 같다’라는 뜻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노자도 물처럼 살 수 없어 속세를 떠나야 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물과 같은 덕을 가진 사람은 살아가면서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씀씀이는 깊고도 깊으며….” 물은 높은 산 깊은 계곡에서 발원해 가파른 곡류를 거쳐 들로 나오면,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흐르고 스며, 땅을 적시고 논밭을 적셔 풀을 키우고 곡식을 키우고 움직이는 것들을 키운다. 저를 꾸미지도, 저를 돋보이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흘러 만물을 보듬어 살리고 키우는 바다가 된다. 만물의 어머니, ‘시작’이 된다. 김민기 또한 그랬다. 그가 다다른 봉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 그가 딛고 선 자리였다. 따라서 그의 삶은 언제나 시작이었다. 그게 그의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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