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몫의 길을 놓는 사람, 영화 기차의 꿈 리뷰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화 기차의 꿈 (Train Dreams)은 거대한 서사를 선택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영웅을 세우지 않고,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한 한 남자의 생을 끝까지 따라간다. 20세기 초 미국 태평양 북서부의 숲과 철로를 배경으로, 영화는 로버트 그레이니어라는 이름 없는 노동자의 시간을 천천히 펼쳐 보인다. 그 시간은 격렬하지 않고, 설명도 많지 않다. 대신 묵묵히 흐른다. 그러나 그 흐름은 어느 한 지점에서, 잿더미 위에 주저앉은 한 남자의 절규로 응축된다. 내 가족이 무슨 죄를 지었어?” 왜?” 그 질문은 단지 한 인물의 외침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가장 오래된 물음처럼 울린다.
로버트는 고아로 성장했다. 부모의 품을 오래 기억하지 못한 채 세상에 던져진 그는 어린 나이부터 몸을 써야 했다. 철도 공사 현장은 그의 학교였고, 숲은 그의 집이었다. 나무를 베고, 철로를 놓고, 땀으로 하루를 채우는 삶. 그를 연기한 조엘 에저튼(Joel Edgerton)은 이 인물을 과장 없이, 거의 침묵에 가까운 연기로 세운다. 그는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감정을 견디는 얼굴을 보여준다. 동료들과 어울리면서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태도, 삶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 눈빛은 어린 시절의 상실을 암시한다.
철로를 놓으며 그는 말한다. 사람은 자기 몫의 길을 놓을 뿐이야. 그 위를 누가 달릴지는 모르는 거지.” 이 대사는 단순한 노동자의 겸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의 세계관을 압축한다. 그는 결과를 통제하려 하지 않는다. 미래를 장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 주어진 몫을 감당한다. 그 태도는 체념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성실한 책임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몫의 길을 놓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글래디스와의 만남은 로버트의 생에 처음으로 따뜻한 빛을 드리운다. 두 사람은 격렬한 감정을 쏟아내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함께 걷고, 저녁을 나누고,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영화는 이 시간을 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면의 온도가 달라진다. 작은 집 안에서 함께 웃는 장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그의 생이 비로소 뿌리를 내렸음을 보여준다. 고아였던 그는 이제 가족을 가진 사람이다. 떠돌이였던 그는 이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다.
딸의 탄생은 그의 삶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이전에 없던 확신이 스민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의 노동은 단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된다. 이 시기의 로버트는 조금 더 자주 웃고, 조금 더 오래 머문다. 관객은 이 평온이 오래가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 바람을 허락하지 않는다. 거대한 산불이 마을을 덮친다. 로버트가 일터에 있는 동안 불길은 집을 삼키고, 글래디스와 딸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장면은 요란하지 않다. 불길의 장면은 짧고, 이후의 침묵이 길다. 불타버린 터전 위에 서 있는 로버트의 모습이 화면을 채운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무너진다. 잿더미 위에 주저앉아 절규한다.
내 가족이 무슨 죄를 지었어?”
왜?”
그의 외침은 공허한 하늘로 흩어진다. 이 장면에서 그는 고대의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욥기 (Book of Job)의 욥이다. 욥 역시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식들을 잃고, 재 위에 앉아 하나님께 묻는다. 왜 나입니까?” 그는 이유 없는 고통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다. 오히려 항변한다. 로버트의 절규 역시 그러하다. 그는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무고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묻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영화는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자연은 침묵하고, 하늘은 열리지 않는다. 불길은 이미 지나갔고, 숲은 여전히 푸르다. 이 무심함이 더 잔혹하다. 욥에게는 결국 신의 음성이 있었지만, 로버트에게는 아무런 계시도 없다.그의 질문은 공중에 떠 있다. 그 공백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이다. 세상은 언제나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고통은 도덕적 인과를 따르지 않는다.
상실 이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그는 다시 일터로 돌아가지만, 이전의 활기는 없다. 몸은 일하지만, 마음은 잿더미 위에 남아 있다. 숲을 바라보며 그는 말한다. 숲은 우리를 기억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숲을 기억하지.” 자연은 인간의 비극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다. 기억하기에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잊히지 않기에 슬픔은 지속된다.
그는 환영을 본다. 불타지 않은 집 안에서 웃고 있는 글래디스, 숲속에서 들려오는 딸의 웃음소리.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광기가 아니라 기억의 힘이다. 사랑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남아 그를 붙잡는다. 그는 그 기억을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 함께 살아간다. 욥이 결국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가듯, 로버트 역시 해답 없이 살아간다.
철로 옆에 서서 기차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그는 중얼거린다. 기차는 계속 달리는데, 나는 여기 남아 있군.” 발전과 진보는 멈추지 않는다. 산업은 확장되고, 세상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한 인간의 슬픔은 제자리에서 맴돈다. 이 대비는 냉혹하다. 영화는 그 냉혹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대신 잿더미 위의 인간을 끝까지 응시한다.
그는 말한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그냥 살아 있는 사람일 뿐이야.” 이 문장은 체념이 아니라 고백이다.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 이해받지 못해도 된다. 그는 여전히 숨 쉬고 있고, 그 사실만으로도 존재는 지속된다. 욥이 재 위에서 다시 일어났듯, 로버트도 잿더미 위에서 일어난다. 기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미학은 절제에 있다. 카메라는 울음을 강요하지 않는다. 음악은 감정을 부풀리지 않는다. 대신 얼굴을 오래 비추고, 숲의 소리를 들려준다. 자연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때로 잔혹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인간의 비극과 무관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아름다움은 위로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라져도 숲은 남고, 기차는 달리고, 시간은 흐른다. 그 흐름 속에서 개인의 삶은 작은 점처럼 보이지만, 그 점 역시 분명 존재했다.
기차의 꿈 은 질문을 지우지 않는다. 왜?”라는 물음은 끝까지 남는다. 영화는 교리적 답을 제시하지 않고, 인과적 설명도 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하는 인간의 얼굴을 오래 보여준다. 그 얼굴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본다. 사랑을 잃어본 사람, 이유 없는 고통을 겪어본 사람, 하늘을 향해 답을 요구해본 사람이라면, 로버트의 절규는 낯설지 않다.
이 영화는 결국 한 인간의 생에 대한 애도이자 찬가다. 세상은 그를 기억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그를 기억한다. 그리고 관객 역시 그를 기억하게 된다. 그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랑했고, 잃었고, 질문했고, 다시 일어났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잿더미 위에서 왜?”라고 묻는 인간의 목소리는 약하지 않다. 그것은 신앙의 부정이 아니라, 가장 정직한 신앙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해도 묻는 것, 답이 없어도 살아가는 것.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그렇게 자신의 몫의 길을 다시 놓는다. 기차는 달리고, 숲은 흔들리고, 시간은 흐른다. 그리고 한 인간의 생은 조용히, 그러나 결코 하찮지 않게, 그 위에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