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도 브랜드 처음 보여준 앨프리드 히치콕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뚱뚱한 몸집에 뚱한 얼굴. 자기 영화에 슬쩍슬쩍 얼굴을 비추며 관객에게 윙크를 날리던 그 감독. 앨프리드 조지프 히치콕(Alfred Joseph Hitchcock, 1899~1980)은 영화사에서 가장 성공한 브랜드 였다. 감독이 곧 장르가 되고, 이름이 곧 흥행 보증수표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몸소 보여준 최초의 스타감독 이었다.
1960년대의 앨프리드 히치콕. (위키피디아)
경찰서 감방에 갇힌 여섯 살, 평생의 트라우마
1899년 8월 13일 런던에서 태어난 히치콕은 양계업과 과일 도매업을 하는 집안의 막내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장난으로 그를 경찰서 감방에 10분간 가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 사건은 평생 경찰에 대한 공포로 남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영화에서 죄 없는 사람 이 누명을 쓰고 쫓기는 설정의 원천이 됐다.
191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히치콕은 전신회사 기술자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런던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다 영화에 눈 뜨기 시작했고, 1920년 영화사에서 자막 도안을 그리는 일로 영화계에 첫발을 디뎠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아버지 윌리엄 히치콕이 맏아들 윌리엄과 함께 1900년쯤 런던에 있는 가족 소유 상점 앞에서 찍은 사진. 상점 위 간판에는 W. Hitchcock s 라고 쓰여 있다. 히치콕 가족은 조랑말을 이용해 식료품을 배달했다. (위키피디아)
1925년 데뷔, 그리고 평생의 동반자
1925년 기쁨의 정원 으로 정식 감독 데뷔를 한 히치콕은, 1926년 하숙인 으로 평론과 흥행 모두에서 성공하며 영국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같은 해 1월 2일, 영화 편집자 앨마 리빌(Alma Reville, 1899~1982)과 결혼했는데, 앨마는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라 평생의 창작 동반자였다. 그녀 없이는 히치콕 영화의 절반도 완성되지 못했을 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929년 영국 영화사상 첫 유성 영화인 협박 을 발표하며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 입지를 다졌다. 그 뒤 39계단 (1935), 사라진 여인 (1938) 등을 내놓으며 대서양 건너 할리우드의 눈에 띄었다.
히치콕이 태어난 레이턴스톤 하이로드 517번지에 들어선 주유소; 527~533번지 건물의 기념 벽화(오른쪽).(위키피디아)
할리우드 진출, 그리고 단 한 번의 작품상
1938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의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David O. Selznick, 1902~1965)과 계약하며 할리우드로 건너간 히치콕은 레베카 (1940)로 미국 데뷔 신고를 했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수상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히치콕 본인은 감독상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영화 중 유일한 작품상 수상작이었다.
그 뒤로도 오명 (1946), 이창 (1954), 현기증 (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59), 싸이코 (1960), 새 (1963) 등 걸작을 쏟아냈지만, 아카데미 경쟁 부문에서 수상한 경력은 없다. 단지 연출 업적을 인정받아 1968년 어빙 탈버그 기념상을 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상 소감으로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만 말하고 내려간 그의 뒷모습에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1980년 4월 29일,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 북부 혹스턴 풀 스트리트에 있는 게인즈버러 사진관 부지에 설치된 히치콕 조각상. (위키피디아)
맥거핀 과 카메오 , 그리고 현기증 기법
히치콕 영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맥거핀 (MacGuffin)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중요하지 않은 소품이나 목표물을 뜻한다. 싸이코 의 4만 달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의 마이크로 필름이 대표적이다. 중요한 건 그것 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긴장과 추격이라는 점을 꿰뚫은 것이다.
또 히치콕은 자신의 영화에 짧게 출연하는 카메오 출연으로도 유명했다. 지나가는 행인, 신문 속 사진, 심지어 여장까지 하며 관객에게 재미를 선사했다. 이는 감독이 단순히 뒤에 숨는 존재가 아니라 작품과 호흡하는 예술가임을 보여준 상징이었다.
기술적으로는 현기증 기법 이 유명하다. 카메라를 뒤로 빼면서 렌즈를 줌인하면 화면 중앙이 멀어져 보이는 효과로, 인물의 심리적 불안을 시각화했다. 이 기법은 이후 죠스 , 반지의 제왕 , 심지어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 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1926년 12월 2일 히치콕과 리빌의 결혼식, 브롬턴 오라토리오. (위키피디아)
한국사회가 히치콕에게 배워야 할 것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에서 히치콕의 유산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첫째, 형식의 완성 이 곧 내용이라는 점이다. 히치콕은 기술, 편집, 미술, 음악 모든 면에서 완벽주의자였다. 한국 영화는 종종 메시지와 이념에 치우쳐 형식미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히치콕은 완벽한 형식 자체가 관객에게 전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임을 증명했다.
둘째, 감독이 브랜드 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봉준호, 박찬욱 같은 감독이 이름만으로 관객을 모으지만, 히치콕만큼 대중적이면서도 예술적 완성도를 동시에 인정받은 경우는 드물다. 히치콕 극장 시리즈로 TV에 진출하며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한 그의 전략은 오늘날 넷플릭스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셋째, 협업의 중요성이다. 히치콕과 앨마 리빌의 관계는 단순한 부부 이상이었다. 앨마는 싸이코 의 샤워 장면에서 버나드 허먼(Bernard Herrmann, 1911~1975)의 날카로운 현악기 연주를 삽입할 것을 제안했고,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1인 천재 신화에 경도돼 있지만, 진정한 걸작은 협업에서 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넷째, 권위에 대한 건강한 불신이다. 어린시절 경찰서 감방 트라우마는 그의 영화에서 누명 쓴 무고한 사람 이 거푸 나타나게 만들었다. 권력과 제도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도 검찰, 경찰, 권력기관에 대한 맹목적 신뢰는 위험하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매들린 캐럴(히치콕 영화의 전형적인 금발 미녀)과 로버트 도나트가 출연한 영화 39계단 (1935)의 한 장면. (위키피디아)
아카데미는 왜 히치콕을 외면했나?
히치콕은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5번 올랐지만, 오스카는 번번이 그를 비껴갔다. 현기증 은 후보로조차 오르지 못했다. 당대 아카데미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이분법으로 나눴다. 히치콕처럼 대중을 사로잡으면서도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든 감독은 너무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평가 절하됐다.
하지만 1950년대 프랑스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 가 예술가 히치콕을 발견한 이래 그는 가장 널리 연구되는 영화감독이 됐다. 영국 평론가 로빈 우드(Robin Wood, 1931~2009)는 그를 현대의 셰익스피어 라고 불렀다.
이는 한국 영화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흥행한 영화는 상업영화로 치부하고, 난해한 영화만 예술영화 로 추켜세우는 이분법은 히치콕 같은 거장을 놓칠 위험이 있다.
1937년 8월 24일의 앨마 리빌, 조앤 해리슨, 히치콕, 그리고 팻 히치콕. (위키피디아)
지금, 히치콕을 다시 본다는 것
오늘날 한국사회는 극심한 양극화, 세대갈등, 정치적 분열에 시달리고 있다. 히치콕 영화 속 누명 쓴 무고한 사람 의 설정은 어쩌면 오늘날 우리사회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누군가는 억울하게 몰리고, 진실은 묻히며, 권력은 무소불위로 작동한다.
하지만 히치콕의 영화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관객에게 긴장을 선사하되 카타르시스도 동시에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힘이다. 사회를 비판하되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현재 한국사회도 물에 빠진 듯 허우적대고 있다. 하지만 히치콕의 유산을 되새겨 우리는 다시 헤엄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형식의 완성, 협업의 가치, 권위에 대한 건강한 불신, 그리고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 이것이 바로 80년이 지난 지금도 히치콕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마거릿 록우드(가운데)와 마이클 레드그레이브(오른쪽)가 주연한 영화 사라진 여인 (1938) 홍보 사진.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