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공작원이 납치해 온 부자는 북파공작원이 됐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범진 사단법인 생명평화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공작원. 간첩 또는 무장공비로 불리운 이 존재는 남과 북의 적대적 갈등과 대결의 산물이다. 지난 시기 이남에서 이북으로, 이북에서 이남으로 수 많은 공작원들이 사선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와 실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국가는 명령을 내렸으나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국가 안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엄청난 폭력과 반인권, 범죄,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는 진실에 기반해 당사자와 가족들이 겪은 그 고통을 우리 사회가 적극적으로 안아내고, 생명과 평화에 반하는 이 비극을 끝내야 한다. 나아가 위기로 치닫는 남북 관계를 화해와 협력 국면으로 전환하기 위한 마중물로 남북 공작원 신원(伸冤)사업을 자리매김해 볼 것을 제안한다. 핵심은 남과 북에 존재하는 망자와 생존자 그리고 가족들의 명예 회복과 인도적 귀환, 송환이다.
파주 북한군 묘지. 정범진
적군 묘지 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하략)
구상 '초토(焦土)의 시'(청구출판사, 1956)
파주 북한군 묘지. 정범진
장면 1 : 북파공작원이 납치해 온 아들과 아버지는 북파공작원이 되었다
함경남도 북청군 바닷가 마을이 고향인 김성길(82) 씨는 1955년 8월, 13살 때 대한민국 육군 첩보부대(HID) 소속 공작원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납치돼 강원도로 끌려왔다. 당시 아버지 나이는 53살 고령이었다.
한국군은 이들 부자를 서로 인질로 삼아 북파 교육훈련을 시켰다. 1956년 10월, 김 씨의 아버지는 북파 공작에 동원됐다가 사망했으나 국군 첩보부대는 그 죽음을 감췄다.
1957년부터는 15살 아이에게도 군사 훈련을 시키고 두 차례나 북파 공작에 동원했다. 김 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공식 확인한 것은 반세기가 지난 2009년이 되어서였다. 김 씨는 지난해 4월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5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여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북에서 끌려온 아들과 아버지”, 한겨레신문, 2024년 6월 1일).
장면 2 : 흑산도 무장공비 사건(1969. 6. 12〜17), 15명 전원 사망
중앙정보부는 1969년 6월 12일 23시 50분경 이미 남파되어 있는 간첩 김○○(필자 삭제)를 월북시키기 위해 전남 신안군 대흑산도 남쪽 해안으로 접근해 오는 75톤급의 북괴 무장간첩선 1척을 육‧해‧공군 합동작전으토 나포하고, 북괴 무장공비 15명을 완전 섬멸했다고 발표했다. 간첩선에 타고 있던 공비 15명 중 6명이 지상에서 사살되었고,7명은 선내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으며,나머지 잔당 2명은 섬에 상륙하지 못하고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국방군사연구소, 對非正規戰史Ⅱ(1961~1980), 283~285쪽).
장면 3 : 납북어부 → 북파공작원 → 이근안 고문으로 간첩 조작→ 무죄 → 전기고문 장애
1971년 8월 30일 김성학 씨는 아버지가 선장으로 있는 어선 ‘제2 승해호’(13t)를 타고 오징어잡이를 하고 속초항으로 돌아오던 중에 이북의 경비정에 의해 나포되었다. 승해호 선원 23명은 1년 뒤 귀환했다. 한국전쟁 월남자였던 김 씨의 아버지는 ‘고의로 월선’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북에서 돌아온 다음 해 김 씨는 방위 복무를 마친 후 어느 날 특수부대 관계자들에게 납치되어 속초 설악산에 있는 육군첩보부대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설악개발단’에서 특수부대 복무계약서에 강제로 손도장을 찍는다. ‘간첩 꼬리표’를 떼어준다는 말을 희망 삼아 안전가옥에서 지옥의 산악훈련과 해상훈련을 1년 동안 받았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붙잡혔고, 아들의 소재를 찾아 나선 어머니의 노력 등으로 겨우 죽음의 부대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10년 뒤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김 씨를 이북의 지령에 따라 북파 특수부대에 들어간 것으로 몰며 전기고문을 가했고, ‘고정간첩’ 혐의로 구속했다. 하지만 형편없는 조작은 1심부터 무죄가 나왔고, 이근안은 김 씨와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고문한 혐의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국가폭력은 김 씨의 온 인생을 짓밟았고, 고문으로 척추 디스크는 녹아내려 장애만 남았다(김성호, 북파공작원의 진실(가을밤, 2022), 249~257쪽).
탈북민단체 자유북한운동연합이 6일 새벽 대북전단 20만장을 경기도 포천에서 추가로 살포했다고 밝혔다. 자유북한운동연합은 대북전단 20만장, K팝, 드라마'겨울연가', 나훈아·임영웅 트로트 등 동영상을 저장한 USB 5000개, 1달러 지폐 2000장 등을 10개의 대형애드벌룬으로 북한에 보냈다고 밝혔다. 2024.6.6. 연합뉴스
기록으로 확인되는 남북의 공작 규모
관련 자료에 따르면 1951년부터 2002년까지 이남에서 이북으로의 파견을 목적으로 양성된 요원은 총 1만 4008명이고 이 중 1만 1446명이 북파되었다. (필자 주: 1946년 이후 미국 극동군사령부와 중앙정보국(CIA)의 지도 아래 활동한 미 극동육군 한반도 연락사무소(KLO, 켈로), 극동공군 6004항공첩보대(AISS, 네코), 영도 유격부대 등 미군이 독자적으로 관리한 첩보부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규모 추정이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그 규모를 대략 3만 명 이상으로 추산한다.) 북으로 파견된 1만 1446명 중 8160명이 돌아오지 못했으며, 이는 71%에 달한다. 미 귀환자 중 행방불명으로 처리된 4849명은 이북 당국에 체포 또는 자수 후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남의 ‘적군묘지’처럼 이북에서도 사망한 북파공작원들의 묘지는 따로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북에서 이남으로 파견된 공작원의 규모도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50년부터 1999년까지 총 6446명이 남파되었으며, 이 중 3177명이 생포되었다. 1644명이 사살되었으며, 275명은 자수했고, 1350명은 이북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사살된 1644명 중 58구는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소재 적군묘지에 매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공작사업 관계자가 아닌데도 납북된 인원은 한국전쟁 당시 4777명(‘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위원회’), 전후 납북자는 총 3835명이다. 이 중 3319명이 귀환했고, 억류된 납북자는 516명이다. 이들 역시 이북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 2023년 9월 기준 선교사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그리고 이탈주민 3명 등 총 6명이 억류된 것으로 파악되지만, 이들의 생사 및 구금 장소는 미공개다(통일연구원, 북한인권백서 2023).
북한이 날린 대남 풍선이 9일 오전 경기 파주시 금촌동 한 도로에 떨어져 있다. 북한은 국내 민간 단체의 대북 전단 배포를 빌미로 지난달 28∼29일과 이달 1∼2일 등 2차례에 대남 오물 풍선을 날렸고, 총 1천개가량이 식별됐다. 2024.6.9. 연합뉴스
북파공작원 사업의 흑역사 : 반인권, 폭력, 살해, 납치, 정치공작...
북파공작원 양성 사업은 중앙정보부가 주도하고, 그 지휘 하에 육군(HID)과 해군(UDU, 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AISU, Airforce Intelligence Unit) 등이 별도의 부대를 운영했다. 중앙정보부가 직할로 운영하는 조직도 있었다. 요원들의 신분은 다양해서 민간인, 군인, 이남으로 납치되어 온 사람, 심지어 재소자들도 있었다.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한 영화 ‘실미도’는 공군이 관할하는 첩보부대 소속 조직(2325전대 209파견대)이었고, 그들은 민간인 신분이었을 뿐 재소자로 구성된 조직은 아니었다. 군 출신 범죄자들로 구성된 조직은 육군이 운영한 ‘선갑도부대’였다. 하지만 모든 북파공작원은 민간인 신분으로 북에 파견되었다. 이들이 민간인 신분으로 북파된 이유는 무장 공작원 파견 등 휴전선을 넘는 무력도발은 정전협정 위반이기 때문이었다.
북파공작원들의 채용, 훈련, 북파, 생환, 재북파, 해고, 사후 처우 등에 이르는 모든 과정은 가장 반인간적이고, 상상하기 어려운 끔찍한 폭력 그 자체였다.
국가는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 등으로 이들을 유혹 또는 강제로 조직원으로 만들고, 가혹한 훈련과 폭력으로 길들였다. 훈련에 뒤처지거나 조직에 반기를 든다는 이유로 동료로 하여금 폭력을 행사해 사망케 하거나 안가로 불러 살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임무 수행 중 행방불명, 사망’ 등으로 처리했다. 국가가 이들에게 약속한 신분 보장이나 보상은 그 어떤 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군에 두 번 입대한 사례도 다수 존재하고, 심지어 보상금이 입금된 통장을 주고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그 통장은 가짜였다.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록을 보면 생포 또는 사살된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북측의 주장을 허위라고 일축하고 시신의 인수마저 대한민국은 거부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국가가 인정한 돌아오지 못한 공작원 명단에 올라 있다.
‘이중간첩’ 혐의로 총살당한 심문규의 사례는 영화보다 더 비극적이다. 북파공작원이 되었다가 귀환선을 보내지 않아 북측에 생포된 심문규는 이북의 남파공작원 제안을 거부하던 중 자신을 찾던 아들이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귀순 HID 요원을 통해 알게 된다. 어떻게든 아들만은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이북의 공작원 제안을 수용하고, 이남으로 내려와 자수한 심문규는 563일 동안 불법 감금과 남파 간첩 위장 접선 등에 이용 당하다 조작된 ‘이중간첩’ 혐의로 총살 당한다.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이중간첩’ 혐의로 처벌받은 사례가 10명이나 더 있다.
이북에 침투하기 위해 훈련된 북파공작원들은 정보사령부에 의해 국내 정치 공작에 악용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 가택 침입과 서류 탈취, 양순직 국회부의장 가택 잠입과 서류 탈취 및 테러, 민주당 김동주 의원 테러, 재야 문화운동단체 ‘우리마당’ 침입과 서류 탈취 및 강간, 최근 용산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 경질 시 언급된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 기자 테러,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 후보 단일화 방해 공작 등. 2016년 ‘류경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사건’ 역시 종업원들의 의사에 반하여 정보사가 국내 정치에 활용할 목적으로 ‘귀순공작’을 수행했다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흑역사에는 심지어 한국전쟁 시기에 북파공작원들이 이북에서 여성들을 납치해 낮에는 허드렛일을 하는 노무자로, 밤에는 위안부로 운영했다는 증언도 있다. 한성대 김귀옥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군 위안부’는 일부 첩보부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방부 차원에서 서울, 강릉, 춘천, 원주, 속초 등에 ‘특수 위안대’가 운용되었다고 한다. ‘한국군 위안부’는 대부분 체포된 인민군 간호사, 납치된 이북 여성, 인민군에 부역한 혐의로 붙잡힌 이남 여성들이었다. 1951년 5월부터 1954년 3월까지 운용된 한국군 특수 위안대에는 전국적으로 300여 명의 위안부가 있었다(김성호, 앞의 책, 685~689쪽).
11일 오전 강원도청 앞에서 강원연석회의, 춘천공동행동 등 시민단체가 대북 전단 살포와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국내 민간 단체에서 살포하는 대북 전단 등이 남북 긴장을 높이고 군사 충돌 위기를 부추긴다고 주장했다. 2024.6.11. 연합뉴스
남북 공작원 신원 사업을 화해와 협력의 출발점으로: 명예회복, 인도적 귀환과 송환
대한민국 정부가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공식 인정한 것은 2003년 국회였다. 당시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1만3천여 명의 ‘특수임무’ 수행자들을 양성했으며, 그중 7726명이 임무 수행이나 훈련 중 사망했다고 밝혔다. 2004년 7월에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발효됐다. 그러나 보상규모는 물론이고 뒤늦은 보상에서조차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도 많다. 이들에 대한 처우 개선에 사회적 관심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이남과 이북에서 진행된 공작사업은 분단과 대결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이들의 존재는 부인되었으나 엄연한 현실이었으며,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북과 이남에는 공작사업으로 희생된 다수의 망자와 생존자가 있다. 남파되었다가 사망한 1600여 명의 유해는 어디에 있는가? 북파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한 8천여 명의 사망자와 생존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분단국가였던 동서독은 상대방을 대상으로 치열한 공작사업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공작원들이 체포되었지만, 서로 맞교환을 하거나, 특히 서독정부는 거금(1인당 평균 3만 마르크)을 들여서라도 반드시 공작원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조치했다.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미군의 유해 송환은 조미 정상회담의 마중물로, 또는 의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미국은 유해 발굴을 지원하는 의미에서 이북에 일정 비용을 지불했다. 서독과 미국의 국가를 위한 자국민의 희생에 대한 처리와 대한민국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남의 이탈주민 단체가 입에 올리기도 거북한 이북의 퍼스트레이디와 이남의 전직 대통령을 합성한 가짜 사진을 풍선에 실어 보내고, 이북은 그 대응으로 오물이 담긴 풍선을 투하하는 현실은 부끄러운 우리의 민낯이다. 표현의 자유를 이유로 이를 방관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태도는 인식 수준의 저열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남북 관계를 위기 국면으로 이끌어 무지와 무능으로 한계에 봉착한 내치의 어려움을 돌파하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이면에 있다.
이대로 두면 남북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고, 위기는 고조될 뿐이다. 모든 것이 꽉 막힌 상황에서 흑역사로 얼룩진 공작사업을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신원 사업은 글자 그대로 (伸 펼 신, 冤 원통할 원) 억울함을 풀어주는 사업이다. 공작사업에 동원된 본인은 물론 가족들은 수십 년의 세월을 국가 안보를 이유로 존재는 부정되고, 고통과 희생을 강요받았다. 지금이라도 분단과 대결의 산물로서 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하고, 명예 회복과 함께 희생과 피해에 대해서는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한다. 국가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행한 반인권과 폭력에 대해서는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남과 북에 남아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는 예를 갖춰 북과 남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당연히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사를 물어 본인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미 사례도 존재한다. 2000년 9월 63명의 비전향 장기수(이 중 46명은 남파공작원)가 북으로 송환됐다. 미 귀환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청계산 충혼탑이나 지역의 사찰, 정릉 청수장 등의 훈련장, 적군 묘지는 기억과 추모, 탈분단의 생명과 평화의 교육 공간으로 조성하자. 남북 공작원 신원 사업은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우리 사회가 안아내야 할 마지막 사각지대, 아니 새로운 출발선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