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그 실속을 어떻게 챙길 것인가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백일 전 울산과학기술대 교수
케데헌이 조회수가 3억 회, 수익은 10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되는 등 역대 최고 흥행이다. 컨텐츠 내용은 케이팝 스타가 한국판 무속에 근거하여 악귀(데몬)를 처치하는 것으로 내면세계까지 개척했다는 등 온갖 신문 인터넷이 긍정 평론 일색이다. 솔직히 음악성을 제외하면 기대만큼 대단한 이야기 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케이컬처 전성시대의 한 축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면 생각을 좀 다시 해봐야 한다. 우선 한국 문화의 세계적 유행 차원으로 보면 라면이든 김밥이든 문화의 세계적 향유 속도에 따라 간접 매출이 훌쩍 늘 것이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제작자는 일본계 미국법인 소니픽처스이고, IP 저작권은 초국적기업 OTT 영상 유통사인 넷플릭스 권한이어서 직접 수익은 한국과 관계없다. 더불어 한국 문화예술의 세계화를 선양한 오징어게임 역시 편마다 2억을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심지어 후속작 4편에 대한 기대마저 고무되는 사정이지만 여기서도 넷플릭스 저작권에 따라 수십억 달러 수익 중 한국에 떨궈지는 몫이란 그 1/100 선인 200억 원∼1000억 원 추정의 제작비 정도라는 점이 안타깝다.
인터넷 전성 시대에 문화예술의 국지성을 주장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건 넋 놓고 감탄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 부동의 한국 영화 독점 제작 유통의 CJV, CJENM 이 퇴출 위기설에 빠져 있다. 이걸 인터넷 시대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한국문화예술 매체의 한계 또는 자본능력의 문제로 보든 말든, 외국자본 넷플릭스에 끌려다니는 대로 흘러가도 괜찮은 건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한국 문화예술 컨텐츠의 세계화 현상을 삐딱하게 흘길 필요까지는 없지만, 유행 산업의 부질없는 흥망성쇠처럼 문화예술 경쟁력 기반이 무너지는 것까지 좌시해서는 안 된다. 넷플릭스 주연급 배우들의 회당 출연료 수억 원의 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티빙 같은 토종 OTT 나, 중소 영화제작자들은 수백억 원대로 오른 제작비 수준을 맞출 수 없어 애를 태운다거나, 문화예술인력 연평균 소득 1천만 원, 문학 미술 음악 등 기초 장르는 그 반도 안되는 500만 원 안팍, 요즈음 잘나간다는 웹툰 작가조차도 평균 2500만 원에 불과한 실정에 이르면 심히 부족한 나눠줄 떡, 문화예술계 빈부격차의 그늘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문화예술, 그중 종합예술 상업화의 토대인 국내 영상 드라마 제작 기반이 대자본 중소자본에 관계없이 흔들린다는 사실을 자못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당연히 한국 문화예술의 장래도 장담할 수 없다.
케데헌의 한 장면.
코로나 사태 이전 필자에게 의뢰된 문화예술 컨텐츠 미래에 대한 연구 과제 중 하나는 한국 영화제작 유통의 지나친 독과점 현상을 개선하고 문화예술 특유의 생산성인 중소 제작업체의 다양성을 부양시키는 방향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지나친 오프라인 극장 스크린 점유 독과점 현상은 철 지난 얘기(물론 문제는 여전히 진행중)가 되었고, 인터넷 OTT 상 컨텐츠 독과점 점유율과 제작 여건, 그리고 온/오프라인 영상 소비 매체 점유율의 문제로 상황이 역전되었다. 그간 오프라인 극장 스크린 독과점 비난의 총아였던 CJV는 2025년 현재 폐점만 12곳이고, 수년간 적자 상태이며, 천만 영화가 수두룩하던 한국 영화 실적이 무색하게, 2025년 상반기 실적은 300만 관객 영화 달랑 2편에 불과하다. 경기가 안 좋으면 비 생필재, 가령 문화예술 소비부터 줄이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 소비의 급작스런 감소를 단순히 인터넷의 자극적 내용에 익숙해진 취향 변화나, 경제요인 탓으로 몰고 가기에는 뭔가 빼먹은 게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케이 컬처에 대한 세계적 호응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원 탐구이다.
우리 말고도 세계적으로 영상을 자체 제작할 수준의 국가는 제법 많다. 그런데 왜 하필 케이 컬처인가. 컨텐츠 생산 유통의 관점으로 보면 이는 크게 매체의 변화, 건강한 영상 제작 기획 능력, 시나리오와 이야기 구성 능력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매체의 변화란 잘 알려진 바, 인터넷 가상공간의 유포로 영상이미지를 중심으로 국경없는 배포 환경이 극대화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가상공간 환경의 구축이 없었다면 변방에 불과한 케이컬처의 세계화란 오래 걸렸을 것이다.
한국의 케이 컬처는 문학, 음악, 게임, 웹툰, CG는 물론 메신저, 플랫폼, 방화벽 등에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경지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따질 바는 아니고, 다만 OTT 점유율 독과점에 대한 단속 처리가 남는다. 국제조약인 한미FTA도 트럼프에 의해서 일거에 무너지는 판인데, 한국 측에 유리한 독과점법의 준용을 주저할 이유란 없다. 한국의 문화컨텐츠 세계적 생산능력을 믿자. 둘째 문화개방 홍수 속에서도 이에 대항되는 창의적 국내 문화예술 생산 및 기획 기반이 유지되어 세계화의 밑거름이 된 것이므로 문화예술 컨텐츠 창작인들에 대한 소득 보전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계가 문제라면 세계적 케이 컬처 수준 유지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우리는 케이 컬처마저 미국에 이식되어 문화예술 산업공동화로 기반이 무너지거나, 한국의 배우 제작자들마저 그 나라에 가서 불법이민자로 또 다시 체포되는 현상을 바라지 않는다. 셋째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수준과 내용의 차별성이 케이 컬처 생산성의 본질이라면 그 지속성을 북돋는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케데헌의 다른 이면은 ‘귀멸의 칼날’ 류의 일본계 애니메이션 주축 시나리오인 악귀와의 전투라는 소재이고 이는 인터넷 세대에 익숙한 판타지 문화의 혼종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일본류와 다른 것은 한국의 전통 문화특색과, 실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현실성이 가미되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성격부터가 바뀌었다. 가령 정의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세상의 이분법, 현실에 적응하자면 냉전시대 자유의 수호자로서 익숙한 미국판 영웅들, 2022년 미국 국방전략에서 새로운 사이버를 포함한 정보전쟁개념으로 공식화된 통합억제(Integrated Deterrence) 또는 인지전(Cognitive Warfare)에 대한 저항 축의 부상으로 해석하면 어떤가. 미국판 헐리우드식 영웅 활극과도 다른 21세기 한국 문화예술 시나리오의 차별성이란 이른바 정치 경제 성장 시나리오가 아닐까 한다. 가령 케데헌 중 악귀 데몬을 물리치는 공연에 등장하는 응원봉의 물결은 지난해 내란 사태를 극복한 반짝이는 수많은 응원봉을 연상케 한다. 이것은 정치성장 시나리오의 직간접 이미지 반영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사태를 지켜본 세계인들이 유사한 분위기의 케데헌 공연을 단지 만화적 흥미로만 감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 정권의 등장으로 세계가 관세전쟁의 불안을 겪고 있는 바, 내란을 극복한 한국의 정치 분위기가 적어도 동병상련의 불안정한 내우외환을 격고있는 많은 나라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다는 생각은 나만의 상상이 아닐 것이다.
한편 한국은 식민지와 내전, 수차례의 시민혁명을 겪으면서도 빠른 속도로 경제 성장한 국가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남을 침략하지 않고도 이룬 이러한 고난 속의 성장 이미지는 당연히 동경의 대상으로 잠재력을 가진다. 미국판 문화예술의 전성기도 2차 대전 후 승전국, 또는 냉전시대의 서방진영의 파수꾼이라는 선량한 영웅 이미지였을 것이다. 왜 그 살짝 색 바랜 구시대 영웅들, 슈퍼맨, 베트맨, 스파이더맨, 람보, 터미네이터, 특수작전 수행 전직 네이버실 이미지 있잖은가. 그들은 기회의 자유를 맹종하는 가족의 수호자이며, 주적은 빈부격차가 아니라 냉전시대 소비에트이거나 핵전쟁, 외계인, 바이러스, 좀비, 테러리스트, 마피아, 은행강도, 디스토피아 등이다.
한국의 상업 영상들이 이들을 전혀 모방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형 좀비, 조폭, 판타지가 유행한 것은 사실이다. 케이컬처라고 호칭할 수 있는 장르도 문화적 상상력이라는 이름하에 비현실 판타지류나 비열한 음모, 또는 극단적 폭력성을 동원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2025년 케이 컬처 전반에 대한 세계적 호응은 뮤지컬을 겸비한 케이팝 스타라는 대리만족 호감도를 활용한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지난한 미국 영웅주의에 대한 반발, 혹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MAGA로 인한 세계 분열에 대한 반발, 인지전(Cognitive Warfare) 으로 보자면 미국판 영웅주의 또는 자유수호 우상의 추락, 결국 미국의 전후 패권주의에 대한 실망, 미국판 문화예술장르에서는 찾기 어려운 기득권 비판 등에 대한 공감은 아닐까. 가령 빈부격차(오징어게임 1), 외래자본의 비도덕성(오징어게임 3), 자본으로부터 소외(기생충), 청년 성장 또는 발산 퍼포먼스(BTS, 싸이), 한국 전통문화+정치성장(케데헌) 등에 이르기까지 이는 미국판 비현실 문화예술 장르 주류가 외면한, 오래되어 잊은 듯하지만 소환해서 다시 신선한 현실 소재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케이 컬처 특유의 선량한 성장 이미지는 어떻게 지속 가능한가.
무엇보다도 세계 만방에 통할 대체 도덕성 상징 이미지 구축이 요청된다. 가령 인도네시아 국회의원 특혜에 대한 반정부투쟁, 네팔 정부의 SNS 차단에 대한 청년 봉기는 언론자유와 관료주의에 대한 그 나라 나름의 사회적 경고라는 점에서 나름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는 미국 우호정권 수립을 위한 칼라혁명(우익 NGO, 언론 동원, 부패정권, 가짜뉴스, 부정선거 주장 등등)의 인지전 일환이라는 소문은 바로 얼마 전 한국판 극우세력이 상용한 수단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불편하다. 일본의 5500억 달러를 넘는 6000억 달러 투자 이행, 한국측 투자에 대한 트럼프의 90% 이익 전유에 대한 합의문 요구, 한국측 기술자 300여명에 대한 불법입국자 취급 체포는 나라간 최혜국대우 혹은 상호주의의 선을 넘은 것이다. 심지어 미국 일각에서조차 그 돈을 다 줄 바에야 25% 상호관세, 연간 125억 달러 관세를 수십 년간 내는 편이 나을 것으로 조롱하지 않는가. 트럼프판 새 미 국방전략은 기존의 중국 위협 최우선에 대한 철회, 미국 본토 방어 최우선으로 후퇴한다는 소문에 따르면 주한미군 철수설이 장애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일본처럼 투자약속 합의문을 작성하고 정치 퇴진한 이시바의 전철을 따를 것인지 어려운 선택의 기로다. 솔직히 지금까지 통상 관행으로 보면 구두 합의를 전면 부정하고 인도 브라질처럼 전면적 무역전쟁 결단은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항복 전철을 따르는 것도 여기저기 협상 실속 계산이 속속 발표되어 후폭풍이 걱정되는 판에 어려울 것이다.
관건은 세계 정세의 냉철한 판단 능력에 달려있다고 본다. 주한미군 철수란 단 한 번의 행정명령으로 단행될 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인도태평양 전력의 미 본토 위주 방어로 실전 배치 이행이란, 큰 변수가 없는 한 사실상 급발진할 것으로 보기는 어려워서 예의주시는 하더라도 일단 논외로 하는 편이 낫다. 문제의 관세 및 투자 이행 선택도 급할 것 없다. 상호적으로 미국 측도 전기차 및 배터리, 반도체, 선박 등 제조업 복구의 중단, 쇠고기 등 농축산물 수출 충격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점은 무기력하게 물러서지 않으며, 요구할 것은 요구하는 선공의 자세로 협상에 임하는 것이다.
케데헌 사례로부터 아쉬운 바는 케이 컬처의 가치를 그 원작자인 한국이 아니라 미국 일본 자본이 일찍 눈뜨고 신속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문화의 근원적 생산성에 대해서 우리는 눈 뜬 장님일지 모른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순간이다. 협상기술의 달인인 트럼프에 덜 휘둘리는 길은 일본과는 다른 길, 적어도 쉽게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는 것이다. 좀 더 적게 잃어서 총체적으로 더 큰 득실이 생긴다면 결단의 문제일 뿐 선택은 오히려 어렵지 않다. 트럼프에 쉽게 굴종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저항과 성장 이미지 케이 컬처에 대한 세상의 관심은 더 높아진다. 케이 컬처의 불가사의한 생산성의 이면에는 이러한 기득권에 대한 저항성, 분열된 세계의 돌파구, 새로운 희망의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치열한 정보 컨텐츠 문화 인지전의 승자, 열광하는 관객이 많은 문화예술이 이제까지 그러하듯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