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의 한글철학 ㉜] 한아 (一), 가장 아주 ‘큰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아’ ‘한나’는 숫자 일(1)을 넘어선 크고(大) 하나(一)인 나(我)”이다. ‘큰나’(大我)를 뜻한다. 이때 ‘큰나’는 오롯한 온새미로의 ‘밑몸’(本體)이요, 본디 있는 그대로의 ‘참나’(眞我)다. 가없이 너르고 밑없이 큰 이 우주 빈탕 집에서 그렇다. 또한 너와 나로 쪼개지기 이전의 오롯한 ‘너나’(始․無)로 온몸(全體)이자, 온 우주 그 스스로 하나인 참 자아다. 다석 류영모는 ‘큰나’(大我, 한아)에는 그런 제나가 없어 무아(無我)다”라 했고, 또 하느님의 얼이 주관하는 나가 큰나(大我)요, 얼나(靈我)요, 참나(眞我)다.”라고도 했다. 제나로 살다가 ‘말숨’에 저절로 깨어난 참나(한아)와 하나가 될 때 너나는 비로소 외롭지 않으리라.
[다석의 한글철학]에 가져다 쓰는 노자 풀이는 다석 류영모의 것이다. 있는 그대로 가져왔기에 띄어쓰기, 하늘아(), 이어쓰기를 그대로 두었다.
열쇳말: 한아-낱-한아 얻음-온통-고디
그림1) 국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의 얼굴이다. 제나(몸나)를 벗어나 얼나(참나)로 깨어나는 깊은 명상의 상태를 보여준다. 입가에 머문 미소는 ‘말숨’에 저절로 깨어난 참나의 평화를 상징하며, 다석이 강조한 ‘사유하는 사람’의 정수다.
#1. 한아(一): 오롯이 ‘큰나’
‘한’은 하나요, 온통
우리 겨레는 유독 ‘한’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라 이름도 한국(韓國)이요, 입는 옷도 한복(韓服), 쓰는 말도 한글이다. 이 ‘한’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사전적으로는 ‘하나’를 뜻하지만, 그 깊은 속뜻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한’은 하나는 하나인데 그냥 하나가 아니라, 크고(大), 가득하고(滿), 가운데(中)이며, 전체(全)인 하나다. 숫자 1, 2, 3 할 때의 시작하는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숫자를 다 포함하고도 남는 ‘절대적인 하나’다. 다석은 여기에 ‘나 아’(我) 자를 붙여 ‘한아’라는 철학적 이름을 지었다. ‘한아’는 ‘하나인 나’이자 ‘큰나(大我)’다. 쪼개질 수 없는 오롯한 전체로서의 나다. 너나는 지금 작은 껍데기 속에 갇혀 ‘나’를 좁게 여기지만, 너나의 본래 크기는 우주만 한 ‘한아’라는 것이다. 다석은 얼나는 큰나(大我)이다. 우리 말로는 ‘한아’‘한나’라면 큰나(大我)를 뜻한다. 이 큰나는 얼나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다.”라고 했다.
얼나로 솟나는 길
너나는 종종 왜 괴로울까? ‘나’를 너무 작게 잡았기 때문이다. 내 몸뚱이, 내 가족, 내 재산만을 ‘나’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제나’(小我)다. 제나는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다. 너나를 너와 나로 가르고, 우리 것을 내 것과 네 것으로 따지면서 끊임없이 다툰다. 갈라져 있기에 외롭고, 작기에 불안하다. 다석은 제나(自我)로 죽고 얼나(靈我)로 솟나는 길밖에 없다”고 외쳤다. 달걀 껍데기가 깨져야 병아리가 나오듯, 제나라는 좁은 감옥을 깨뜨려야 우주적인 생명인 ‘한아’로 부활할 수 있다. 노자 늙은이도 말했다. (옛날에 한아 얻은 이로) 하늘이 하나를 얻어서 맑게 쓰고, 땅이 하나를 얻어서 편안케 쓰고(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39월) 하늘도 땅도 ‘하나’를 얻었기에 존재하듯, 사람도 이 ‘한아’를 얻은 이가 되어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내가 우주와 하나임을 깨닫는 순간, 아니 내가 우주라는 깨달으면 소유욕과 경쟁심은 눈 녹듯 사라진다. 이미 전체가 나인데, 무엇을 더 욕심내겠는가?
한아는 곧 하느님
다석에게 ‘한아’는 곧 하느님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하느님은 없이 계신 한아”라고 고백했다. 기존의 신앙은 하느님을 저 높은 곳에 따로 계신 분, 나와는 전혀 다른 타자(他者)로 섬겼다. 그러나 다석은 하느님을 ‘나의 밖’에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나의 가장 깊은 안’이자 ‘우주 전체’로 보았다. 하느님은 만물을 하나로 꿰뚫는 생명의 원리이자, 우주 그 자체인 ‘큰나’이시다. 그래서 다석은 기도를 할 때도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르기보다, 한아님!” 하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신을 부르는 호칭인 동시에, 내 안의 참나를 깨우는 주문이기도 하다. 다석은 내 맘의 뜻은 하나의 뜻이다. 하나는 가장 큰나(大我)요 참나(眞我)이다. 바로 하나인 하느님이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더불어 한아님 안에 있고, 한아님이 더불어 내 안에 계시는 이 신비한 합일(合一), 이것이 다석이 말한 신앙의 정점이다.
우주가 내 몸
다석이 말하기를 우리는 전체에서 나온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를 밝혀야 한다. 부분은 전체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분은 전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전체를 아버지라면 부분이 아들이다.” 떨어져 나온 인간은 외롭다. 군중 속에 있어도 외롭고, 가족과 함께 있어도 외롭다. 왜 그럴까? 자신이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낱)’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닷물을 컵에 담아 놓으면 그 물은 금세 마르고 썩는다. 그러나 그 물을 바다에 쏟아부으면 영원히 마르지 않고 출렁인다. 너나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한 컵의 물로 떨어져 있으면 외롭고 두렵다. 그러나 내가 저 거대한 생명의 바다(한아)와 하나임을 알면 외로움은 사라진다. 나를 버리고 전체인 한아와 합일될 때 우리는 비로소 외롭지 않다. 한아를 깨달은 사람은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다. 온 우주가 내 몸이고, 길가에 핀 풀 한 포기,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가 다 나와 한 몸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이다.
그림2)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된 천상열차분야지도. 숙종 복각의 탁본(숙종 이후 제작품). 밤하늘의 별자리를 기록한 이 지도는 ‘가없이 너르고 밑없이 큰 우주 빈탕 집’을 눈으로 보여준다. 사람(낱)이 거대한 우주(한)의 질서 속에 속해 있음을 보여준다.
오롯한 하나
‘한아’는 쪼개지지 않는다. 너와 나, 선과 악, 삶과 죽음이라는, ‘~과’의 이분법을 넘어선 자리다. 다석은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데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를 깨닫는 것이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하느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라고 했다. 세상은 자꾸만 갈라치려고 한다. 나누고 쪼개려고만 한다. 아니 서로의 마음이 그렇다. 그러나 한아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갈등은 한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일 뿐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때리지 않듯, 한아를 깨달은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는다. 남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74월에 큰나무 다르는이(大匠)를 대신해 깎는다”는 말이 나온다. 대장장이가 나무를 깎아서 그릇을 만들듯, 문명은 전체를 쪼개어 도구를 만든다. 그러나 알아 본 것을 도로 싸 뭉뚱그려야 달리 보인다. 쪼개진 지식과 문명을 넘어, 다시 태초의 순수한 통나무(朴), 오롯한 ‘한아’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낱’으로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한’으로 돌아가 ‘늘살이’ 할 것인가? 늙은이(老子)와 다석은 ‘한아’가 되라고 손짓한다. 그 크고 넓은 품에 안길 때, 우리는 비로소 ‘참나’로 깨어날 것이다.
#2. 낱(個): 온몸에서 낱몸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
너나는 ‘한’을 잃어버렸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어머니와 내가 ‘한몸’이었지만,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오는 순간 우리는 ‘낱(個體)’이 되었다. 이것이 너나의 운명적인 비극이자 고독의 시작이다. 다석 류영모는 온몸(全體)를 ‘한’이라 하고, 부분을 ‘낱’이라 불렀다. ‘낱’은 ‘낱개’, ‘낱알’ 할 때의 그 낱이다.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요, 오롯한 하나가 깨져서 생긴 조각들이다. 그이가 우리는 하나(一, 절대, 전체, 하느님)로 시작해서 마침내 하나(一)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다. ... 사람은 이처럼 하나(전체)를 찾아 마지않게 생긴 존재다.”라고 말한 까닭이 예 있다. 유리병을 바닥에 떨어뜨려 보라. ‘한’ 병이었던 것이 산산조각 나서 수많은 ‘낱’ 유리조각이 된다. 지금 인류의 모습이 꼭 이와 같다. 본래 하느님 안에서 ‘한아’였던 우리는, 욕망과 아집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 80억 개의 외로운 ‘낱’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군중 속에 있어도 늘 춥고 외롭다. ‘한’을 잃은 ‘낱’은 뿌리 뽑힌 나무와 같기 때문이다.
낱 껍질을 벗고
다석은 아주 무서운 말을 남겼다. 몸이 죽어야 얼이 산다.” 낱개는 힘이 없다. 낱알 하나는 새가 쪼아 먹으면 그만이고, 물방울 하나는 햇볕이 내리쬐면 금방 말라버린다. 우리 인생이 허무한 까닭은, 자꾸만 내가 ‘낱’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 혼자 잘살아 보겠다”, 내 것만 챙기겠다” 하며 낱개의 삶을 고집할수록 너나는 죽음과 가까워진다. 제나(몸나)는 철저한 ‘낱’이다. 낱개인 몸뚱이는 늙고 병들어 결국 흙으로 흩어진다. 낱에 매달리는 삶은 필연적으로 멸망을 향해 달리는 폭주기관차다. 반면, 물방울이 바다로 들어가면 영원히 마르지 않는다. 바다라는 ‘한’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길은 오직 하나, ‘낱’의 껍질을 벗고 다시 ‘한’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래서 다석은 몸나는 노병사(老病死)이지 진선미(眞善美)가 아니다. 얼나가 진·선·미이다. 몸은 죽어 썩지만 얼은 살아 빛난다.”라고 했다.
그림3) 창덕궁 인정전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이다. 우주의 중심에 선 한아를 보여준다. 해와 달, 다섯 봉우리는 온 우주를 상징하며 그 중심은 비어 있다. 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는 임금은 다석이 말한 ‘우주의 중심에 선 한아’를 뜻한다(실제 권력을 가진 조선시대 임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한아’가 곧 우주의 주체임을 시각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보여준다.
쪼개고 가르는 병
현대 문명은 ‘낱’의 문명이다. 과학은 모든 것을 쪼개고 분석한다. 물질을 쪼개 원자를 보고, 원자를 쪼개 소립자를 본다. 의학도 사람을 통째로 보지 않고, 심장 따로 위장 따로 본다. 이렇게 자꾸 쪼개다 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생명(한)’은 놓치고 만다. 늙은이(老子)는 39월에 높임은 낮힘으로써 밑을 삼고, 높은 아레로 터됐음이여.”라고 하며, 낱개로 흩어지려 하지 말고 뿌리인 하나를 지키라고 경고한다. 수레가 분해되어 바퀴 따로, 축 따로 있으면 더 이상 수레가 아니다. 그냥 고철 덩어리들(낱)일 뿐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가 극에 달해 모두가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 ‘낱’만 있고 ‘한’이 없는 사회, 그것은 지옥이다.
내 안의 한 점
그렇다면 ‘낱’은 무가치한 것일까? 아니다. 다석철학은 여기서 절묘한 반전을 보여준다. 무한한 우주(한)가 내 안의 한 점(낱)에 있다.” 곡식의 낱알을 보라. 작디작은 낱개지만, 그 속에는 우주 생명의 전체 정보가 들어 있다. 땅에 심으면 거대한 생명을 틔워낸다. 이것이 ‘씨알’의 신비다. 너나는 비록 겉모습은 보잘것없는 ‘낱’ 사람이지만, 우리 속알(靈魂)에는 하느님의 ‘한’이 온전히 들어와 있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 작은 티끌 가온데 든 빈탕(宇宙). 이것은 화엄의 이치와 같다. 이 무한 우주의 테두리가 이 내 속에 있는 한 점(얼)과 같다. 이 무한 우주의 중심이 내 속에 있는 한 점이다.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다. 이 한 점이 바로 된 데가 본 내 자리다.”(다석어록) 문제는 자기가 ‘낱’인 줄만 알고 그 속에 든 ‘한’을 모르는 것이다. 자기가 파도인 줄만 알지 바다인 줄 모르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아, 내가 외로운 낱알인 줄 알았더니, 내 속에 거대한 우주 나무가 들어 있구나!” 하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
낱으로 살되 한을 품으라
다석은 내 맘속에서 자꾸만 하나의 뜻이 일어난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내 뜻이다. 내 맘의 뜻은 하나의 뜻이다. 하나는 가장 큰나(大我)요 참나(眞我)이다. 바로 하나인 하느님이시다.”라고 했다. 너나는 몸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낱’의 형상을 하고 살아간다. 너와 나의 몸이 따로 있고, 각자의 이름이 따로 있다. 그러나 겉모습은 ‘낱’이어도, 속마음은 ‘한’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따로 또 같이’의 삶이다. 몸은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되(낱), 마음은 늘 전체와 연결되어 있어야(한) 한다. 나의 밥 한 끼가 농부의 땀과 햇빛과 비(한)로 이루어졌음을 아는 것, 나의 숨 한 번이 숲과 바람(한) 덕분임을 아는 것, 지나가는 이웃이 남이 아니라 또 다른 나(한)임을 아는 것. 이렇게 ‘낱’의 삶 속에서 ‘한’의 숨결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 늙은이가 말한 ‘성인’(聖人)이다. 그이가 곧 ‘씻어난 이’다. 우리는 ‘낱’으로 떨어져 나왔기에 외롭다. 하지만 그 외로움 덕분에 다시 ‘한’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낱’은 ‘한’으로 돌아가는 징검다리다. 작은 조각에 매달려 울지 말아야 하리라. 너나는 조각난 파편이 아니라, 전체를 품은 거룩한 씨알이다.
그림4) 전북 정읍시 영원면 후지리 탑동에 있는 돌로 반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본체)으로서 우주 그 자체를 상징한다. 손 모양(지권인)은 이치와 현상이 하나임을 뜻하는데, 이는 ‘너와 나로 쪼개지기 이전의 온몸(전체)’인 ‘한아’의 개념과 일치한다. 사진작가 정태호가 찍은 것이다. 영축산 법성사 발행, 『깨달음의 빛 비로자나불』(2017, 안그라픽스)
#3. 한아 얻음(得一): 하나를 얻으라!
맘에 불꽃 하나
저 높은 하늘은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떠 있을까? 저 두터운 땅은 어떻게 갈라지지 않고 잘몬(萬物)을 떠받칠까? 강물은 마르지 않고, 사람은 어떻게 숨을 쉬며 살아갈까? 과학은 중력이나 생물학적 원리로 설명하겠지만, 노자 늙은이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도 심오하다. 그들이 모두 ‘한아 얻은 이’(得一者)다.(39월) 다석 류영모는 ‘하나’를 우리말 ‘한’이라 했다. 단순히 숫자 1이 아니다. 우주를 관통하는 생명의 원리이자, 잘몬을 하나로 묶어주는 절대적인 힘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느님이요, 동양식으로 말하면 길(道)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이 ‘한’을 얻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한’을 얻었다는 것은 뿌리와 연결되었다는 뜻이다. 전구에 전기가 연결되어야 불이 들어오듯, 우리 존재도 이 거대한 ‘한’에 플러그가 꽂혀 있어야 비로소 생명의 불이 켜진다. 이것이 ‘득일’(得一), 즉 ‘한아 얻음’의 신비다.
하나를 얻어서 쓴다
늙은이는 39월에 ‘한아 얻은 이’의 목록을 장엄하게 나열한다. 하늘이 하나를 얻어서 맑게 쓰고(天得一以淸), 땅이 하나를 얻어서 편안케 쓰고(地得一以寧), 신이 하나를 얻어서 령케 쓰고(神得一以靈), 골이 하나를 얻어서 참으로 쓰고(谷得一以盈), 잘몬이 하나를 얻어서 삶으로 쓰고(萬物得一以生).” 하늘이 저토록 푸르고 맑은 것은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라, ‘한’(眞理)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땅이 저토록 묵묵히 만물을 싣고 있는 것도 ‘한’의 덕을 입었기 때문이다. 골짜기에 물이 마르지 않는 것도,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모두 이 ‘한’이라는 생명줄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석은 이를 보며 한은 곧 온통(全)”이라고 했다. 부분(낱)들이 제각각 노는 것이 아니라, ‘한’이라는 질서 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져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참꼴이다.
씀이 잃으면 없어질라
그런데 늙은이는 무서운 경고를 덧붙인다. 만약 이 ‘하나’를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늘로 맑게 씀이 없으면 아마 찌져질라. 땅으로 편안을 씀이 없으면 아마 픠여버릴라. 신으로 령ᄒᆞᆷ에 씀이 없으면 아마 쉴라. 골로 참을 씀이 없으면 아마 다ᄒᆞᆯ라. 잘몬으로 삶을 씀이 없으면 아마 없어질라.”(39월) ‘한’을 잃어버리는 순간, 모든 것은 파국을 맞는다. 하늘은 오존층이 파괴되어 찢어지고, 땅은 지진과 가뭄으로 갈라진다. 골짜기의 물은 말라버리고, 생물 종들은 멸종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기후 위기와 환경 재앙을 보라. 이것은 지구가 ‘한’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과 ‘하나’됨을 거부하고,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 대상으로 삼아 ‘낱’으로 분리시켰기 때문이다. 연결 고리인 ‘한’이 끊어지니, 세상은 찢어지고, 픠여버리고, 쉬고, 다하고, 없어진다. 이 경고는 2500년 전의 예언이 아니라, 오늘의 참혹한 현실이다.
그림5)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이다. 척박한 풍경 속 곧게 선 잣나무와 소나무는 다석이 말한 ‘고디(貞)’를 상징한다. 거센 바람에도 나는 꼼짝 않는다”는 배짱으로 영원한 길 위에 서 있는 ‘쇠심 같은 정신’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그림은 없다.
셰상고디
자연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늙은이는 임금들이 하나를 얻어서 셰상고디 되니”(39월)라고 했다. 참으로 솟난 이는 돈이나 권력을 얻은 사람이 아니다. ‘한아 얻은 이’다. 마음속에 하늘의 뜻인 ‘한’을 품고, 온씨알과 ‘한’마음이 된 사람이라야 세상의 중심을 잡는 벼리(고디:貞)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인간들이 ‘한’을 잃고 사리사욕(낱)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나라가 두 쪽으로 찢어지고, 민심은 갈라지며, 국운은 말라버린다. 가정이든 회사든 나라든, 인간들이 ‘한’을 놓치는 순간 공동체는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다석은 우리는 하나(一)를 얻자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득일(得一)할 것인가? 큰나 속(大我中)에 이것이 있다. 그러므로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대아중(大我中)이다. 큰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얼나는 우주와 통하는 ‘한’이기 때문이다. 얼나를 얻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 속에 우주의 중심축이 서 있기 때문이다.
하나로 돌아가자
너나는 지금 무엇을 얻으려 애쓰고 있는가? 돈을 얻으려 하고, 명예를 얻으려 하고, 사랑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낱(조각)’들이다. 낱개는 얻었다가도 잃어버리고, 많아지면 오히려 짐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을 얻는 것이다. ‘한’을 얻으면(得一) 모든 것을 얻은 것이요, ‘한’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성경에서도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한)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태16:26, 마가8:36, 누가9:25)라고 했다. ‘한’을 얻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꽉 쥐고 있는 ‘낱’들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내 작은 고집, 내 작은 소유를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우주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한아님!” 하고 불러보라. 내 안의 찢어진 마음을 기워달라고, 갈라진 관계를 붙여달라고, 메마른 영혼을 채워달라고 ‘한’에게 속삭여 보라. 우리가 다시 ‘하나’를 회복할 때, 찢어진 하늘은 기워지고 갈라진 땅은 아물 것이며, 우리 삶은 다시 푸르게 살아날 것이다. 살길은 오직 ‘한을 얻음’에 있다. 진리(하느님)인 하나(一)밖에 없다. ... 내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를 알고(知一) 하나로 돌아가자는(歸一) 것이다.”(다석어록)
#4. 온통(全): 너나가 없는 한 그물
쪼개지지 않는 ‘온통’
너나는 흔히 방이 온통 물바다다”, 산이 온통 단풍이다”라고 할 때 ‘온통’이라는 말을 쓴다. ‘남김없이 모조리’라는 뜻이다. 다석 류영모는 이 흔한 우리말을 심오한 철학 언어로 승화시켰다. ‘온’은 ‘백’(百)이자 ‘완전함’(全)을 뜻하는 우리말이다. ‘통’은 ‘거느릴 통’(統)이자 ‘통할 통’(通)이다. 즉, ‘온통’은 전체가 하나로 묶여 막힘없이 통하는 상태”다. 세상은 자꾸만 우리를 ‘쪽’(片)내려 한다. 내 편과 네 편을 가르고, 사람과 자연을 가르고, 몸과 마음을 가른다. 이렇게 쪼개진 조각은 ‘반쪽’짜리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아’를 깨달은 사람은 세상을 쪼개 보지 않고 ‘온통’으로 본다. 우주는 수많은 부품이 조립된 기계가 아니라, 핏줄과 신경이 온몸에 뻗어 있는 하나의 거대한 ‘산알몸’(生命體)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오색(五色) 색동옷처럼 알록달록하게 서(恕), 신(信), 습(習), 인(仁), 예(禮)로 나누어 있지만 이것은 다 하나이다. 다른 이름을 하나 더 붙인 것뿐이다. 원래가 하나이다. 도대체가 하나(하느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굽어야 온통(曲則全)
어떻게 하면 이 ‘온통’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늙은이(老子)는 22월에서 아주 역설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구브려서 성ᄒᆞ고, 구펴서 곧고, 움푹ᄒᆞㅣ서 차고, 묵어서 새롭고, 적어서 얻고, 많아서 홀려 놓지 오라.” 여기서 ‘성ᄒᆞ고’(全)는 바로 ‘온통’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온통이 되려면 먼저 ‘구브려서’(曲) 한단다. 뻣뻣하게 굳어서 내가 제일이다” 하고 버티는 나무는 강풍에 부러진다. 그러나 바람 부는 대로 부드럽게 굽히는 갈대는 꺾이지 않고 온전히 살아남는다. ‘제나’(ego)를 고집하면 세상과 불화하여 ‘반쪽’이 되지만, 자기를 굽혀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면 세상 전체를 얻어 ‘온통’이 된다. 다석은 이를 제 뜻을 굽혀 하늘 뜻에 맞추는 것”이라 했다. 나의 모난 뿔을 굽히고, 나의 날카로운 주장을 접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웃과 하나 되고 우주와 통하는 ‘온통’의 사람이 된다.
그림6) 고구려 강서대묘의 다석은 현무(玄武)다. ‘현’(玄)을 단순히 검은색이 아니라 우주의 밤하늘, 즉 감아 돌며 솟구치는 기운으로 풀었다. 뱀과 거북이 한 몸으로 꼬여 소용돌이치는 현무의 자태는 ‘있없/없있’이 하나로 돌아가는 ‘감ᄋᆞᆫ’의 역동성을 완벽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하나 되는 ‘감ᄋᆞᆫ 가틈’
온통의 절정은 56월에 나오는 ‘현동(玄同)’이다. 다석은 이를 감ᄋᆞᆫ 가틈”이라 풀었다. 까마득히 감아 돌아가는 같음이요, 가는 틈이요, ‘한아’라는 이야기다. 그 날칼옴도 무디고, 그 얼킴도 플리고, 그 빛에 타브ᅟᅥᆫ지고, 그 티끌에 한데드오라.”(4월) 이것이 바로 ‘온통’의 모습이다. 잘났다고 뽐내는 예리함을 무디게 갈아내고, 너와 나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얽힘)를 풀어버린다. 내 지혜의 빛도 너무 눈부시지 않게 부드럽게 하여, 마침내 세상의 ‘티끌(먼지)’과도 하나가 되는 경지다. 보통 사람은 더러운 먼지를 피하려 한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려 한다. 그러나 ‘한아’를 산 사람은 더러움과 깨끗함의 경계마저 허물어버린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고, 귀한 것과 천한 것이 둘이 아니다. 모두가 ‘한’ 생명에서 나온 ‘온통’임을 알기에, 그는 가장 낮은 곳의 먼지와도 기꺼이 입을 맞춘다.
우주가 내 몸
‘온통’을 깨달으면 몸의 크기가 달라진다. 좁쌀만 한 육신이 내 몸이 아니라, 저 광활한 우주 전체가 내 몸이 된다. 다석은 우주가 내 집이요, 내 몸이다”라고 했다. 내 손가락 끝이 아프면 온몸이 아프듯, ‘온통’의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남의 일로 보지 않는다. 지구 반대편의 굶주림이 내 배고픔으로 느껴지고, 파괴되는 숲의 신음이 내 살이 찢기는 통증으로 다가온다. 이것이 자비(慈悲)요, 사랑이다. 사랑은 억지로 짜내는 감정이 아니라, 네가 곧 나구나!” 하는 ‘온통’의 자각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것이다. 다석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하느님은 온통이시다”라는 말과 같게 보았다. 전체를 하나로 끌어안는 그 거대한 포용력이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다석은 부분은 전체 앞에서는 없다. 전체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분은 부분의 생명인 전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진리는 부분들의 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전한 ‘온통’이며, 하나라도 빠지거나 분리되면 그것은 이미 진리(全體)가 아니라는 뜻이다.
뚫린 이, 꿰뚫은 이
‘온통’은 막힘이 없는 것이다. 혈관이 막히면 병이 오고, 소통이 막히면 싸움이 난다. 다석은 통(通)해야 산다”고 했다. 위로는 하늘과 통하고(上通天文), 아래로는 땅과 통하며(下達地理), 옆으로는 사람과 통해야 한다. 마음의 벽을 헐어야 한다. 내 종교, 내 사상, 내 핏줄만 옳다는 벽을 헐어버리면, 그 자리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만물이 서로 오가는 ‘온통’의 장(場)이 열린다. 우리는 지금 ‘불통’(不通)의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지만, 정작 마음은 고립되어 있다. 낱낱으로 흩어져 외로움에 떨고 있다. 이제 다시 ‘온통’을 회복해야 한다. 나를 둘러싼 담장을 걷어치우고, 우리는 원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낱은 작게 살고 온은 크게 산다.” 부분에 매달려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고, 눈을 들어 전체를 보라. 너와 내가 따로 없는, 생명으로 꽉 찬 저 ‘온통’의 세계가 보이리라. 그곳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진짜 고향이다.
#5. 고디(貞): 중심 잡는 벼리
곧게 선 고디
세상은 어지럽게 돌아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유행이 바뀌고, 가치관이 뒤집힌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 혼란 속에서 너나는 길을 잃기 쉽다.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이 바로 ‘고디’(貞)다. 다석 류영모는 늙은이(老子)의 ‘정’(貞) 자를 우리말 옛말인 ‘고디’로 살려냈다. ‘고디’는 ‘곧다(直)’에서 나온 말이다. ‘곧이’, ‘곧장’, ‘고지식하다’ 할 때의 그 뿌리다. 비굴하게 굽히거나 이리저리 휘지 않고, 하늘 땅 사이를 뚫고 ‘곧게 선 것’, 그것이 고디다. 또한 고디는 ‘표준’이자 ‘본보기’다. 옛날 문짝을 달 때 중심을 잡아주는 돌쩌귀(지도리)처럼, 만물이 그것을 기준으로 돌아가는 움직이지 않는 축(Axis)이다. 다석은 진리파지(眞理把持)는 참(얼)을 꽉 붙잡는다는 뜻이다. 참(얼)을 꼭 붙들어야 산다는 것이다. 참을 잡으면 참사람(眞人)이 된다. 참사람이 되어서 일해야 세상이 바로 된다.”라고 했다.
그림7)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도’(1740~1741)이다. 홀로 앉아 있으나 우주의 이치(뜰)와 마주하는 선비의 모습은 ‘한아’를 얻은 사람은 외롭지 않다”는 문장을 뒷받침한다. 낱몸은 혼자이나 정신은 ‘한아’와 연결된 상태를 보여준다. 간송미술문화재단·삼성문화재단
하나 얻어서 고디
늙은이는 39월에 임금들이 하나를 얻어서 셰상고디(天下貞) 되니”라고 했다. 높은 이는 누구일까? 단순히 지위가 높은 사람이 아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하나’(一/한)를 꽉 붙잡고 있는 사람이다. 구성원들이 이해관계(낱)로 찢어져 싸울 때, 전체(한/온통)를 바라보며 중심을 잡아주는 사람이 바로 ‘고디’다. 팽이를 보라. 팽이가 쓰러지지 않고 도는 이유는 그 한가운데 ‘심’(고디)이 바로 서 있기 때문이다. 심이 흔들리면 팽이는 쓰러진다. 가정이든 나라든, 그 중심에 선 어른이 ‘한’을 품고 꼿꼿하게 서 있으면(고디) 그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는다. 다석은 참(眞)을 찾으면 무엇이냐 하면 하나(一)이다. 하나(一)밖에 찾을 것은 없다. 그 밖에 많은 것은 다 거짓이다.”라고 강조했다. 임금은 대통령이 아니다. 내 삶의 주인인 ‘나’ 자신이 바로 임금이다. 내 마음속에 ‘한아’(큰나)가 고디처럼 서 있어야, 온갖 번뇌와 유혹 속에서도 인생이 춤추듯 돌아갈 수 있다.
맑아 가만함이 고디
어떻게 해야 고디가 될 수 있을까? 늙은이는 45월에서 그 비결을 밝힌다. 맑ᄋᆞ 가만ᄒᆞᆷ이 세상 바름(고디) 됨(淸靜爲天下正).” ‘고디’가 되려면 막 뛰어다니며 간섭하는 게 아니라, 맑고 고요하게(淸淨) 가만히 있어야 한다. 흙탕물이 맑아지려면 가만히 두어야 하듯, 마음을 가라앉혀 맑은 ‘빈탕’이 되어야 중심이 잡힌다. 다석은 맑ᄋᆞ 가만ᄒᆞᆷ”을 강조했다. 세상이 시끄럽다고 같이 떠들면 중심을 잃는다. 태풍의 눈처럼, 주변은 요동쳐도 중심은 고요해야 한다. 이 ‘가만함’이 바로 고디의 힘이다. 높은 이가 허둥대면 아랫사람은 우왕좌왕한다. 그러나 그이가 태산처럼 고요하게 제 자리를 지키면(고디), 아랫사람들은 저절로 안정을 찾고 질서가 잡힌다. 이것이 ‘함없 함’(爲無爲)의 다스림”이다.
뼈대 있는 사람
우리말에 뼈대 있는 집안”이라는 말이 있다. 단순히 족보가 좋다는 뜻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올곧은 정신(고디)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에게 척추가 없으면 바로 설 수 없듯, 정신에 ‘고디’가 없으면 흐물흐물한 연체동물처럼 세태에 휩쓸린다. 돈 좀 준다고 하면 굽히고, 힘 좀 쓴다고 하면 엎드리는 사람은 ‘고디 없는 놈’이다. 다석은 머리를 하늘에 두고 곧곧하게 땅을 딛고 반드시 서야 우리는 산다. 곧이 곧게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이 정신이다. 정신의 생명은 정직(正直)이다.”라고 했다. 이 정직의 기상이 바로 고디다. 굶어 죽을지언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선비 정신, 그것이 우리 겨레의 ‘고디’였다. 너나는 지금 ‘고디’를 잃어버렸다. 편리함과 이익을 좇느라 뼈대(原則)를 팔아먹었다. 그래서 사회가 휘청린다. 다시 뼈대를 세워야 한다. 내 안의 양심, 내 안의 얼나를 꼿꼿이 세워야 한다.
그림8) 고구려 오회분 4호묘 ‘해와 달의 신(복희와 여와)’이다. 하늘을 상징하는 원과 땅을 상징하는 각을 들고 있는 두 신이 꼬리를 맞대고 있는 모습은 하늘 땅 사이에 ‘가온’을 잡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준다. 다석이 강조한 기윽(ㄱ)과 니은(ㄴ)의 조화, 그 가온데 중심의 ‘가온찍기’ 일치하는 그림이다.
셰상고디 되기, 가온찍기
다석은 말한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곧게 일어서는 것은 우(하느님)로부터 온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언제나 우(하늘)로 머리를 두고 언제나 하느님을 사모하며 곧이 곧장 일어서서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세상이 썩었다고 손가락질만 하지 말아야 하리라. 내가 바로 서지 못했기에 세상이 기우는 것이다. 내가 ‘한아’를 깨달아 바르게 서면, 내가 선 그 자리에서부터 세상은 깨끗해지리라. 가장들은 가정의 고디가 되고, 스승은 교실의 고디가 되며, 정치인은 나라의 고디가 되어야 한다. 고디가 바로 서면 그물코(낱)들은 저절로 펴진다. ‘한’을 품은 사람은 외롭지 않다. 그가 서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나는 꼼짝 않는다”는 배짱으로, 저 영원한 ‘늘길’ 위에 쇠말뚝처럼 굳건히 서야 하리라. 그 꼿꼿함, 그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寧) 만들 것이다. 너나가 바로 이 어지러운 세상의 ‘고디’다. 다석은 말한다. 한글 모음에서 한 금(線)을 내려그은 ㅣ로 발음하며 영원한 진리의 생명줄을 뜻한다. … 내 속에 있는 곧이(貞)를 살려 내어 내 속에 있는 가온찍기, 내 속에 가장 옹근 속알(德)이 있는 것을 자각하여 깨닫고 나오는 가온찍기가 가장 소중하다.”라고.
[부록] 다석 류영모의 우리말 철학 용어 풀이
1. 한아 (一我)
뜻: 크고 하나인 나, 쪼개지기 이전의 전체적 자아
풀이: 숫자 ‘하나’가 아니라, 우주 전체와 하나인 참나. 하느님의 다른 이름.
2. 큰나 (大我)
뜻: 제나를 넘어선 우주적 자아
풀이: 개인의 몸·소유·이름을 넘어, 얼로 깨어난 전체 생명으로서의 나.
3. 제나 (小我 / 自我)
뜻: 자기만을 나로 여기는 좁은 나
풀이: 몸나·소유나에 갇힌 자아. 갈등과 고독의 근원.
4. 얼나 (靈我)
뜻: 얼로 선 나, 하느님과 통하는 나
풀이: 몸이 아닌 얼로 사는 자아. 큰나·한아와 통한다.
5. 낱 (個)
뜻: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부분
풀이: 혼자 존재하는 조각. 낱으로 살면 외롭고, 한으로 돌아가야 산다.
6. 한 (一)
뜻: 전체·근원·절대 하나
풀이: 모든 존재를 살리는 생명의 뿌리. 숫자가 아니라 질서.
7. 온통 (全)
뜻: 남김없이 하나로 통함
풀이: 쪼개짐 없는 상태. 부분이 전체와 막힘없이 연결된 생명 상태.
8. 고디 (貞)
뜻: 중심을 잡는 곧음
풀이: 흔들리지 않는 생명의 축. 개인·가정·사회의 중심 원리.
9. 셰상고디 (天下貞)
뜻: 세상의 고디
풀이: 한을 얻어 공동체의 중심을 잡는 사람. 지위가 아니라 상태.
10. 씨알
뜻: 생명의 씨가 든 낱알
풀이: 가장 작은 존재 안에 전체 생명이 들어 있다는 다석의 생명관.
11. 늘살이
뜻: 죽지 않는 삶
풀이: 몸의 생존이 아니라, 한과 하나 되어 이어지는 생명 상태.
12. 감 가틈 (玄同)
뜻: 까마득히 감아 도는 같음
풀이: 너와 나, 성과 속, 깨끗함과 더러움이 갈라지지 않은 궁극의 하나됨.
13. 말숨
뜻: 말을 통해 깨어나는 숨
풀이: 언어는 정보가 아니라 생명을 깨우는 호흡이라는 다석의 언어관.
14. 함없에 함 (爲無爲)
뜻: 억지하지 않음으로써 이루는 다스림
풀이: 제나의 작위를 버릴 때, 한의 질서가 저절로 작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