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며 찌른다 초서, 700년 전 권력을 농담으로 해부 [사회혁신] 권력을 비판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정면으로 맞서다가 목이 날아가는 방법, 그리고 웃음 뒤에 칼을 숨기는 방법. 14세기 잉글랜드의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년 경~1400년)는 두 번째를 택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아니, 그 이상으로, 죽고 나서도 600년 넘게 살아 있다.
제프리 초서 초상화 1412년(위키피디아)
포도주 상인 아들이 왕궁에 들어가다
초서는 런던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늘날로 치면 중산층 자영업자 집안 출신이다. 신분사회의 계단을 오른 것은 재능과 눈치 덕분이었다. 그는 에드워드 3세(Edward III, 1312~1377) 왕실에서 시동(侍童)으로 시작해, 훗날 외교사절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러 차례 오갔다. 리처드 2세(Richard II, 1367~1400) 치세에도 왕실건물 관리감독관으로 일하며 관료 생활을 이어갔다. 요컨대 그는 평생 체제 안에 있는 사람 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체제를 가장 통렬하게 비웃은 사람이기도 했다. 이 모순이 초서를 흥미롭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다.
그가 남긴 대표작 『캔터베리 이야기(Canterbury Tales)』(1387년~1400년 경 집필)는 런던 남쪽 사우스워크에서 출발해 캔터베리 성당에 성 토머스 베켓의 유해를 참배하러 가는 순례단 30여 명이 각자 이야기를 돌아가며 나누는 액자 구조의 작품이다. 이야기꾼은 기사, 수녀원장, 상인, 방앗간지기, 면죄부 파는 사기꾼, 다섯 번 결혼한 욕망 넘치는 바스의 아내까지, 중세 잉글랜드 사회의 거의 모든 계층이 한 자리에 모였다. 지금 한국으로 치면 전철 안에 재벌 2세, 비정규직 노동자, 구청 말단 공무원, 강남 부동산 투기꾼, 유명 대형교회 집사가 모여 앉아 각자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꼴이다.
15세기 초 엘즈미어 캔터베리 이야기 필사본은 초서를 순례자로 표현했다.(위키피디아)
교회가 부패했다 , 그러나 직접 말하지는 않는다
초서가 살던 14세기 잉글랜드의 가톨릭교회는, 한 마디로 말해 신을 팔아 재산을 불리는 기관에 가까웠다. 성직록(聖職祿)은 돈 있는 자가 자리를 사고파는 거래대상이었고, 면죄부 판매상(Pardoner)은 가짜 성물을 들고 시골마을을 돌며 농민들을 털었다. 『캔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면죄부 장수는 대놓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직 돈을 위해 설교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독자는 이 인물에게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난다. 초서의 묘한 기법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인물을 직접 비난하지 않는다. 그냥 그 인물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도록 내버려둔다. 독자가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오늘날의 풍자만화나 시사 콩트의 원형이 여기 있다.
수도사(Monk)는 수도원 규율을 무시하고 사냥과 연회를 즐기며 살찐 배를 두드리고, 탁발 수도사(Friar)는 고해성사를 들어준 대가로 돈을 뜯는다. 이들을 향해 초서는 이분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시지요 라고 쓴다. 이 문장 뒤에 이어지는 그의 묘사를 읽고 나면, 독자는 그 훌륭함 이 얼마나 깊은 비웃음인지를 즉시 이해한다.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 경~1384년)가 교회 권위에 정면 도전해 이단 시비에 휘말리고 그 제자들이 이후 탄압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초서가 웃음이라는 방패를 선택한 것은 단순한 문학적 취향이 아니라 생존전략이기도 했다.
19세기에 그려진 초서의 모습(위키피디아)
농민이 런던을 뒤집어엎던 날
1381년, 잉글랜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리처드 2세(1367~1400)가 부과한 인두세(Poll Tax)에 분노한 켄트와 에식스 농민 수만 명이 런던을 향해 행진했다. 와트 타일러(Wat Tyler, ?~1381)가 이끈 이 반란은 귀족의 저택을 불 지르고, 캔터베리 대주교를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존 볼(John Ball, 1338년 경~1381년)이라는 성직자는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베를 짤 때, 귀족이 어디 있었는가? 라는 구호를 외쳤다. 중세사회의 신분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폭발적인 구호였다.
초서는 이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캔터베리 이야기』의 한 대목에서 와트 타일러의 동료 잭 스트로(Jack Straw, ?~1381년)를 은밀히 언급한다. 반란은 리처드 2세가 약속을 지키는 척하며 지도자들을 제거하면서 진압됐다. 타일러는 런던시장에게 살해됐고, 왕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적어도 150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반란이 완전히 헛되지는 않았다. 인두세는 폐지됐고, 농민임금 통제도 서서히 완화됐다. 실패한 반란 이 세상을 조금씩 바꿨다.
16세기에 그려진 초서의 초상화(위키피디아)
민중의 말로 쓴 문학, 혁명이라 불러도 좋다
초서가 이룬 또 하나의 거대한 업적은 언어 그 자체에 있다. 그 시대 잉글랜드의 고급 문학은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쓰였다. 학자와 귀족의 언어였다. 초서는 런던 서민들이 쓰는 중세 영어(Middle English)로 썼다. 당시로서는 굉장한 결단이었다. 마치 오늘날 국제학술지에 굳이 한국어로 논문을 제출하겠다는 것과 비슷한 배짱이다.
이 선택은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이 이야기의 주인인가 를 선언하는 행위였다. 지식과 이야기를 독점해온 성직자와 귀족의 손에서 글을 빼앗아 장터의 상인에게, 밭가는 농부에게, 다섯 번 결혼한 바스 아낙에게 돌려준 것이다.
그로부터 약 두 세기 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가 꽃을 피운 영문학의 토양을 실은 초서가 먼저 일궈 놨다. 초서가 없었다면 셰익스피어도 없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린 초서의 초상화, 1800년 경(위키피디아)
초서를 읽으며 한국을 보다
자, 이제 700년 전 런던을 출발해 지금 서울로 돌아오자.
초서가 살던 14세기 잉글랜드와 2020년대 한국의 공통점은 몇 가지 불편할 정도로 선명하다.
첫째, 제도종교의 물질화. 초서가 면죄부 장수와 살찐 수도사를 조롱했을 때, 그가 겨냥한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을 빌려 치부하는 구조였다. 대형교회가 세습되고, 헌금이 목사 일가의 사업자금이 된다는 소식이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초서라면 오늘 어떤 순례자 인물 을 더 추가했을까?
둘째, 언어 권력의 문제. 초서는 라틴어 대신 민중의 언어인 영어를 택했다. 오늘 한국에서는 어떤 언어가 고급 이고 어떤 언어가 저급 으로 취급받는가? 전문가들의 난해한 법률 용어, 관료의 알 수 없는 행정언어, 언론의 권위 있어 보이는 외래어들, 이 모든 것이 누군가를 배제하는 언어 권력의 문제다. 초서가 싸운 것은 바로 그 배제였다.
셋째, 풍자라는 무기. 독재권력 앞에서 시인과 소설가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직접 말하지 않고, 웃음으로 찌른다. 1980년대 한국의 마당극이, 탈춤이, 5·18을 담은 노래들이 그렇게 살아남았다. 초서는 그 방법의 원조 중 하나다.
넷째, 실패한 반란 의 역설. 1381년 농민반란은 진압됐다. 그러나 그 충격은 인두세를 없애고 봉건질서를 조금씩 허물었다. 성과 없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저항이 씨앗이 됐다. 한국의 수많은 거리집회, 촛불의 기억들도 그렇게 역사에 쌓인다.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저서 《영국 시의 씨앗과 열매》(1845): 초서는 가운데(에드워드 흑태자 옆)에 서 있고,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밀턴, 바이런 경, 로버트 번즈 등 여러 시인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위키피디아)
웃으며 찌르는 자가 살아남는다
초서는 1400년 10월 25일 세상을 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의 시인 기념관(Poets Corner) 에 처음 묻힌 인물이 됐다. 그가 평생 완성하지 못한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이야기꾼 중 일부가 결국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미완성이다. 그것도 어쩌면 현실적이다. 세상 이야기는 원래 미완성이니까.
그는 권력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대신 웃음을 건넸다. 그 웃음 안에는 날카로운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이 700년을 건너왔다.
권력이 스스로의 우스꽝스러움을 인식하지 못할 때, 그것을 기록하고 웃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초서가 그랬다. 우리에게도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캔터베리의 베스트 레인과 하이 스트리트 모퉁이에 있는 캔터베리 순례자 복장을 한 초서 동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